스토리박스

아웅산 국립묘지는 전대미문의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이 벌어진 곳… 그 만행의 순간을 되짚어본다

↑ 폭파되기 수십초 전, 도열해 있던 수행원들이 자세를 바로잡고 있다. 앞열 오른쪽부터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김동휘 상공, 서상철 동자, 이계철 대사, 함병춘 비서실장, 심상우 국회의원, 이기백 함참의장

 

by 김지지

 

미얀마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9월 4일 양곤의 아웅산 국립묘지에 있는 ‘대한민국 순국사절 추모비’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방문해 참배했다. ‘대한민국 순국 사절비’는 1983년 북한의 폭탄 테러로 아웅산에서 순직한 17명의 대한민국 외교사절과 수행원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2014년 건립되었다. 36년 전 벌어진 ‘아웅산 테러’의 실상을 되짚어본다.

 

미얀마는 전두환 대통령이 6개국을 순방하는 일정의 첫 방문지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태운 대통령 전용기가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수도 양곤(당시는 랑군)에 착륙한 것은 1983년 10월 8일 오후 4시 조금 지나서였다. 미얀마는 전두환 대통령이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 등 6개국을 순방하는 일정의 첫 방문지였다.

영빈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전 대통령은 10월 9일 오전 10시 30분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아웅산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었다. 예정된 출발 시간은 10시 20분. 그런데 전 대통령을 안내할 미얀마 외무장관이 영빈관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전 대통령은 10시 25분에야 출발했다. 그 시각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 십수 명의 장차관으로 구성된 공식 수행원은 전 대통령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아웅산 묘소 앞 단상에 2열 횡대로 도열해 있었다. 최금영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사진부장과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는 아웅산 봉분 옆에서 참배객을 대상으로 촬영 준비를 했다.

비슷한 시각, 천병득 경호처장이 묘역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이상한 차림의 두 미얀마을 발견했다. 경호처장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한 미얀마인은 손에 나팔을 쥐고 뒷짐을 지고 있다가 경호처장이 손을 내밀자 웃으며 나팔을 불었다. 훗날 밝혀지지만 미얀마인은 경호처장이 손을 내민 것을 “나팔을 불어보라”는 뜻으로 잘못 알고 나팔을 불었던 것이다.

 

나팔에서 “뿌~”하는 소리가 나고 몇 초 후 폭발

10시 28분, 나팔에서 “뿌~”하는 소리가 나고 몇 초 후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아웅산 묘소 건물 지붕이 하늘로 붕 뜨더니 폭삭 내려앉았다. 묘소 천장에 설치된 강력한 TNT 폭발물이 터진 것이다. 현장에서만 우리 측 수행요원 16명이 목숨을 잃고 십수 명이 부상했다.

우리 측 각료와 수행원들이 북한의 폭탄 테러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이들을 청와대 경호원들과 미얀마 주재 대사관 직원들이 달려가 일으키고 있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의원, 강인희 농수산부 차관, 김용한 과기처 차관,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이계철 주버마 대사, 하동선 기획단장, 이재관 공보비서관,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한경희 경호원, 정태진 경호원,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16명은 이렇게 타지에서 황망히 떠났다. 중상을 입은 이기욱 재무부 차관이 필리핀으로 이송되어 치료받던 중 숨져 순직자는 모두 17명으로 늘어났다. 국가원수의 외국 순방길에 17명이나 되는 장차관이 테러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위 왼쪽부터 서석준 이범석 김동휘 서상철, 아래 왼쪽부터 함병춘 김재익 이계철 심상우

 

미얀마 정부, 북한과 단교

폭발 순간 묘소로부터 1.5㎞ 떨어진 지점을 통과하고 있던 전 대통령은 “폭발했다”는 긴급 연락을 받고 영빈관으로 돌아갔다. 장세동 경호실장으로부터 오후 1시 30분(미얀마 시간 오전 11시) 쯤,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에서는 오후 2시(미얀마 시간 오전 11시 30분) 군과 경찰에 비상근무령이 발령되고 오후 3시와 9시 두 차례 비상국무회의가 열렸다. 같은 날 북한도 전군 경계령을 내렸다. 경계령은 이튿날인 10일 준전쟁상태 경계로 강화되었다.

미얀마 시간 오전 11시가 지났을 무렵 우 산 유 미얀마 대통령이 영빈관을 찾아와 전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오후 3시에는 미얀마의 최고 실력자 네윈 의장이 찾아와 역시 심심한 유감을 표하고 돌아갔다. 전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오후 4시 30분 미얀마를 떠나 한국 시간으로 10월 10일 새벽 3시 4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상황 파악을 위해 박세직 안기부 2차장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미얀마 랑군공항에 도착한 것은 10월 11일 오전이었다. 도착 바로 전 미얀마 군경은 이미 범인 3명의 신병을 확보해놓고 있었다. 조사단은 범인들이 사용한 권총, 수류탄, 무전기 등을 분석한 결과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웅산 테러 직후 한국과 버마 합동조사단이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공식 발표를 미뤘다. 게다가 당시 랑군시에서는 한국의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일본의 지지통신이 한국의 경호원들이라고 밝힌 범인들이 뇌물을 주고 사다리를 빌려 폭탄을 장치했다고 보도한 것이 와전되어 한국 경호원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지지통신의 보도는 결국 사실이 아닌 오보로 밝혀졌다.

 

암살범들, 묘소 천장에 원격조종으로 폭발하는 2개의 폭발물 설치

미얀마 정부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연 것은 11월 4일이었다. 미얀마 정부는 테러가 북한의 소행이라며 북한과 단교를 선언하고, 북한 대사관 요원들에게 “48시간 이내에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미얀마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군 특수부대 강창수 소장으로부터 전 대통령 암살 밀명을 받은 북한 특수부대원 진모(본명) 소령,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3명은 2300t급의 북한 선박 동건애국호를 타고 9월 9일 북한 원산항을 떠나 9월 17일 랑군항에 입항했다.

동건애국호

 

암살범들은 9월 22일 시내로 잠입, 북한 대사관이 임차한 숙소에 은거하며 범행 장소를 사전조사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전 대통령이 미얀마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10월 7일 새벽 2시 묘소 천장에 원격조종으로 폭발하는 2개의 폭발물을 설치했다.

사고 당일에는 묘소로부터 200m 떨어진 곳에서 구경꾼들 틈에 끼어 전 대통령 일행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10시 24분쯤 미얀마 경찰이 앞에서 선도하고 태극기가 걸려 있는 벤츠 안에 머리가 벗어진 사람의 모습이 언뜻 보이자 암살범들은 그가 전 대통령이라고 믿었다. 사실 벤츠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이계철 주미얀마대사였다.

 

암살범 3명 중 1명은 현장에서 사살, 2명은 생포

암살범 중 진모는 국빈 차량이 앞을 지나가자 곧 참배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호주머니 안에 든 무선전파 발사기에 손을 얹고 때를 기다렸다. 10시 28분 아웅산 묘소에 도착한 이계철 대사가 이미 도열해 있는 공식 수행원들에게 다가가 “각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말하자 수행원들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범인들은 전 대통령이 악수하는 것으로 오인했다. 뒤이어 묘소 쪽에서 “뿌~”하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범인들은 참배 행사 중 진혼나팔을 부는 것으로 알고 원격 버튼을 눌렀다.

사고 후 미얀마 정부는 즉각 공항을 폐쇄하고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암살범들은 탈출로를 찾던 중 신기철은 10일 오전에 발견되어 사살되고 진모는 10일 밤, 강민철은 11일 아침 생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얀마 군인 3명도 사망했다. 전체적으로는 한국 측에서 17명이 목숨을 잃고 14명이 다쳤으며 미얀마 측에서는 4명이 죽고 32명이 부상했다.

양곤 인민법원은 1983년 12월 진모와 강민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두 범인은 즉각 항소했으나 최고 재판소가 1984년 2월 항소를 기각, 사형을 확정했다. 그후 진모는 1985년 4월 사형되었고 강민철은 집행이 유예된 상태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8년 5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1983년 10월 9일 발생한 버마 아웅산 테러범 진모 (왼쪽에서 두번째)와 강민철(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버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아웅산 사건은 남북한의 외교관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가 버마에 이어 외교를 단절하고 호주, 일본, 미국 등 25개국이 규탄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탈리아, 바레인, 태국 등 21개국이 북한과의 인적·물적 교류 제한을 밝혔다. 한국은 1983년 말 수교국 수에서 120개국 대 102개국으로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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