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박람회 개막

내선일체 정책을 추진해온 조선총독부는 “조선 고유의 위대한 문화유산과 일제통치 이후 발전된 조선의 모습을 내외에 알리자”며 박람회를 구상했다. 박람회장은 경복궁에 세워졌고, 215만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신문 월구독료가 1원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1929년 9월 12일, 개막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조선박람회가 개막됐다. 경성 인구 30만 명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다고 판단한 총독부가 철도요금 할인 등으로 지방 관람객을 끌여들인 탓에 빚을 지거나 부모 돈을 훔쳐 상경하는 사람도 많았다.

10월 31일까지 50일 간 계속된 박람회에 지방에서 57만 명이나 상경해 가히 ‘민족의 대이동’을 방불케 했다. 입장료는 소인 15전, 대인 30전이었으나 연예관 등 구경거리가 될만한 전시관은 따로 돈을 받아 박람회장을 모두 들르려면 족히 3~4원이 들었다. 특히 인기를 끈 곳은 외국 문물을 소개하는 만몽참고관·동경관·대만관이었고,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은 조선과 일본의 기생들이 가무를 했던 연예관이었다. 기생들의 노래와 춤은 박람회장 최고의 눈요깃거리였다.

열기가 점차 달아오르면서 전국은 박람회로 몸살을 앓았고, 경성으로 오는 열차는 연일 만원이었다. 서울 지리에 익숙치 않은 지방 손님들이 전차·우마차·자동차 등에 치여 137명(사망 3명)이나 죽거나 다쳤고, 실가아(失家兒·미아)도 460명이나 발생했다. 소매치기는 대목을 만났고, 경성으로 원정온 화류계는 호황을 맞았다. 일본인 6만 여명을 포함해 총 110만 명의 유료 관람객을 끌어들여 성공작으로 평가되긴 했으나 폐막 후에도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일자리를 잃어 길거리로 내몰린 3000여 명의 실업자가 사회문제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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