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세계 체제론의 창시자’ 이매뉴얼 월러스틴, 필생의 역작 ‘근대 세계체제’(전5권) 중 제4권까지만 완간하고 세상과 작별하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by 김지지

 

‘세계 체제론’을 주창했던 미국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 교수가 지난 8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월러스틴은 ‘근대 세계 체제’나 ‘세계 체제 분석’ ‘반체제 운동’ 같은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학자다. 그의 부음 소식을 국내 언론 모두 크게 다뤘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누구인지 알아본다.

 

학문의 경계 허물고 장기적 조망 중시하는 분석틀 세워

이매뉴얼 월러스틴(1930~2019)이 주창한 ‘세계 체제론’은 특정한 사회체제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개별 사건이 아닌 수 세기 동안의 장기적 조망을 중시하는 분석 틀이다. 월러스틴은 이 ‘세계 체제론’의 독창성과 참신성을 인정받아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인 지성’으로 추앙받아왔다.

월러스틴은 미국으로 이주한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951년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1959년 같은 대학에서 사회학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58년 모교의 교수가 되었으나 1968년 학생 소요사태에 연루되어 1971년 캐나다 맥길대로 옮겼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월러스틴이 자신의 대표 저서 ‘근대 세계체제’ 제1권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맥길대로 옮기기 1년 전이었다. 당시 그는 종속이론의 영향을 받아 아프리카 신생국의 민족 해방 문제와 선진국·제3세계 간의 불평등·불공정한 관계를 집중 연구하던 아프리카 전문학자였다.

그러나 점차 식민지 분석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식민지의 실체를 알려면 식민 모국과 연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사회체제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주권국가나 민족을 분석 단위로 삼지 않고 그것을 포괄하는 전체 사회체제 즉 세계체제를 분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계 체제론의 핵심은 만약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시스템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경로를 따라 탄생했고 종말은 어떻게 고할 것인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지난 500년간 근대 세계체제를 형성해온 자본주의가 어떤 것이었으며 하나의 체제로서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해명해보는 것이다.

 

‘세계 체제론’의 출발점은 1974년 출간된 ‘근대 세계체제’ 제1권

그 첫 결실이 1974년 출간된 ‘근대 세계체제’ 제1권이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농업과 16세기 유럽 세계경제의 기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1권에서 1450년부터 1640년까지의 시기에 서유럽이 자본주의 기초를 처음 확립하고 전 세계의 많은 지역을 예속시켰다고 분석했다. 중심부에는 서유럽이 있고 그 주위에 반주변부 또 그 바깥으로 주변부가 둘러싸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 착취와 예속 관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근대 세계체제’는 폭발적인 파장을 불러왔고, 월러스틴은 ‘세계 체제론의 창시자’로 불렸다.

‘근대 세계체제’ 제1권(왼쪽)과 제2권

 

‘중상주의와 유럽 세계경제의 공고화(1600~1750)’라는 부제가 붙은 ‘근대 세계체제’ 제2권은 1980년에, 1730~1840년 사이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성장이 중심부와 주변부 국가들에 미친 영향을 심도 있게 고찰한 제3권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2차 대팽창’은 1989년 출간되었다.

3권까지를 종합하면 근대 문명을 유럽에서 등장한 자본주의 세계체제로 보고 16세기 유럽 세계경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17~18세기에 걸쳐 유럽 세계경제가 어떻게 공고화되었는지, 19세기에 그 세계경제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확산되는지를 역사사회학적 방법으로 분석한 것이다.

월러스틴은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1914년 1차대전에 이르는 ‘긴 19세기’를 2011년 출간한 제4권(부제 : 중도적 자유주의 승리)에 담았다. 제4권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과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념으로 부상한 자유주의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개인적 자유 향유의 결과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보수주의와 사회경제적 평등을 지향한 사회주의 사이에서 자유주의가 중도적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추적했다. 월러스틴은 제5권에서 20세기를 다룰 계획이었지만 결국 미완성인 채 이번에 세상과 작별했다.

‘근대 세계 체제론’ 제3권(왼쪽)과 제4권

 

 

자본주의가 사실상 종말에 다가가고 있다고 주장… 혹독한 비판도 받아

월러스틴은 1976년 맥길대를 떠나 뉴욕주립대(빙엄턴 캠퍼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그곳에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의 업적을 기려 ‘페르낭 브로델 센터’를 창설했다. 이 센터는 그 후 장기적 시각에서 세계체제 분석을 적용하는 연구기관이 되었고 미국판 반체제 운동의 산실 역할을 했다.

페르낭 브로델

 

월러스틴은 다양한 저서와 강연을 통해 자본주의가 사실상 종말에 다가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9년 사회주의 붕괴 후 “사회주의 붕괴야말로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해체의 위기에 처한 징표”라고 해석하고, 자본주의도 역사 속의 한 체제이므로 수명이 다하는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라고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1970년 초부터 시작된 미국 헤게모니의 쇠락과 함께 위기를 맞았다. 그 이후는 새로운 질서 창출을 위한 이행기라고 보고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론’에 비판이 없을 리 없다. 대표적인 비판은 유럽 중심적 시각에 갇혀 세계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고 전 세계를 하나로 포섭하기 이전에도 이미 전 세계의 주요 지역들이 하나의 경제체제로 묶여 있었는데도 이에 대한 본질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서유럽은 500년 전부터 지구상의 다른 어느 곳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상태에 있었고 지금도 그런 상태에 있다는 그의 전반적인 주장을 맹신하다 보면 제3세계가 강고한 예속 관계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제3세계가 월러스틴의 세계 체제론에 신선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무언가 답답한 심정을 품는 이유다. 월러스틴의 주장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문제 제기는 여전히 중대한 지적 도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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