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日 패전 후 美 제24군단 인천 도착

2차대전도 사실상 막을 내린 1945년 8월 11일. 오키나와 주둔 미 제24군단 사령관 존 하지에게 미국 태평양사령부에서 한 통의 전문이 날아들었다. “한반도 38선 이남을 접수하라”는 전문이었다. 이미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8월 8일)하고 한반도를 향해 속전속결로 진군하던 긴박한 상황에서 한반도로부터 1600여㎞나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24군단에 이 임무가 떨어진 것은 단지 다른 부대에 비해 한반도와 가장 가깝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는 과달카날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군인중의 군인” “태평양의 패튼장군”이라고 불렸지만 한반도에 대해서 만큼은 무지했다. 하지가 상륙을 준비하는 동안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은 맥아더에게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려 미군 상륙 전까지의 치안유지 권한을 위임받았다. 하지 역시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 상륙 작전 때의 피해를 의식해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 지역 경비를 일본군이 맡도록 했다.

9월 8일 아침, 마침내 하지가 이끄는 2개 사단이 인천 월미도에 도착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실로 40년만에 맞은 해방군이었다. 여운형이 보낸 건준 대표와 조병옥·정일형 등 한민당계가 출영했지만 이들에게는 대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질서유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으로부터 날아든 총탄세례만이 한국인을 맞았을 뿐이다. 해방군의 입성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 가운데 2명이 현장에서 사살된 것이다. 진정한 광복은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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