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③-1] 일제 하에서 공산 혁명을 꿈 꾼 세 남자·세 여자의 사랑과 이별, 투쟁과 고난 이야기 :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고명자를 중심으로 / 6-①
2019년 8월 29일 · zznz
↑ 위에서 오른쪽으로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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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1920년대 초반, 상해로 모여든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
▲들어가며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로부터 수년 사이 자의든 타의든 조국을 떠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상해로 몰려들었다. 당시 상해는 신사상과 신문화의 별천지였다. 동양이면서 서양이었고 중국이면서 유럽이었다.
상해는 풍운아·혁명가들의 집합소였다. 김구·안창호 등의 민족주의자들, 여운형·김규식 등 온건 사회주의자들, 이동휘 등 공산주의자들, 이회영·신채호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즐비했다. 박헌영·김단야·임원근·허정숙·주세죽 등 20살 전후의 젊은이들도 그곳에서 자유와 해방의 공기를 만끽했다.
그들은 고향도 다르고 상해로 이주한 이유도 달랐지만 나이가 비슷하고 정치적 성향이 비슷했다. 해서 곧바로 단짝이 되어 우정과 애정과 이념으로 반죽되어 밤이고 낮이고 함께 어울렸다. 그중에서도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은 ‘삼인당(三人黨)’ ‘상해 트로이카’로 불리며 청년공산주의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박헌영과 허정숙은 국내에서 조선여자교육협회 일을 함께 해 구면이었다.
이들 청춘들은 가슴도 뜨거웠지만 몸도 뜨거워 수 년 안에 세 쌍의 부부로 탄생했다. 박헌영과 주세죽, 임원근과 허정숙, 김단야와 고명자 쌍이었다. 고명자는 당시 상해에는 없었지만 수년 후 서울에서 허정숙·주세죽과 만나 ‘여성 트로이카’로 활동했다. 공산 혁명을 꿈꾼 6명 청춘들이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어떻게 간난의 세월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이별하고 배신하고 투쟁했는지를 살펴본다. 먼저 그들이 상해로 가기 전의 삶을 알아본다.
▲김단야와 임원근
김단야는 1900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무렵 생년이라는 게 정확하지 않아 1899년, 1901년생 설도 있다. 뒤에 소개될 임원근과 박헌영의 생년도 1899년, 1900년, 1901년 등 자료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3명의 생년이 1900년 동갑내기라는 글이 많아 이 글에서는 1900년으로 통일한다.
김단야는 1915년 대구 계성고보에 입학했으나 동맹휴학에 앞장섰다가 1916년 11월 퇴학당했다. 1917년 1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코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니다가 그해 9월 귀국 후 서울 배재고보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시위 주도로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고 피범벅이 되어 삼촌에게 업혀 나왔다. 이후 비밀결사인 적성단에서 활동하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1919년 12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이하 글에서 세 남자 세 여자가 언제 상해에 도착하고 언제 무슨 단체에 가입했는지 시기가 명기되지만 사실 자료마다 제각각이어서 상해에서 활동한 단체나 학교의 가입 시기나 입학 시기가 정확치 않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김단야는 중국 항주의 배정학교에 적을 두고 1921년 5월 창당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에 가담, 집행위원과 책임비서로 활동했다. 그곳에서 만난 인물이 동갑내기 박헌영과 임원근이다. 이후 세 사람은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서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 등에서 함께 활동하며 동지애를 키워나갔다. 당시 상해에는 고려공산당 이름으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상해파는 자생적 공산당 조직이고 이르쿠츠크파는 모스크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조직이었다.
김단야,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
김단야는 1922년 1월 코민테른 주최로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참가하고 돌아왔다. 극동민족대회는 한국, 중국, 일본, 몽골, 인도 대표 등이 참가한 가운데 코민테른 주최로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사실 이 대회 명칭은 1920년 제2차 코민테른 회의에서 채택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에 입각, 극동의 피압박민족 문제를 다루기로 해 극동피압박인민대회였으나 참가국 중 일본이 피압박민족이 아니라는 문제 제기가 있어 극동민족대회로 바뀌었다. 정식 명칭은 ‘극동의 공산주의·혁명 단체 대회’다.
한국에서는 김규식과 여운형을 비롯해 홍범도, 이동휘, 조봉암, 김단야, 최고려 등 56명이 참석했다. 공산주의 계열, 아나키즘 계열, 노동자 대표, 조선기독교연맹 등 국내외 각급 독립운동 단체나 지도자들이 이념과 지역, 정파, 국내외를 뛰어넘어 앞다퉈 참석했다. 흔히 박헌영과 임원근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두 사람은 참석하지 않았다.
각국 대표자는 총 144명이었다. 한국이 56명(35%)으로 가장 많았고 중국 42명, 일본 16명, 몽골 14명, 부리아트(재시베리아 몽골계 소수민족) 3명, 인도 2명 순이었다. 개막일에 각국 대표단장이 차례로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할 때 한국에서는 김규식이 대표로 연설했다. 김규식은 조선독립의 이유와 현재 조선인이 일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을 폭로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 한국 대표들은 레닌을 두 차례 만나 조선독립문제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임원근은 日 게이오의숙을 다녔던 엘리트 청년
대회에서 코민테른이 고려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국내에도 새로 조직하라고 결정함에 따라 김단야는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서울로 돌아가 국내에 혁명 거점을 마련하기로 했다. 세 친구는 1922년 3월 말 상해를 떠나 4월 3일 중국 안동의 한 음식점에서 압록강을 건너갈 방법을 모색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임원근은 1900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17년 4월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코쿠 영어학교를 거쳐 낮에는 인쇄소 직공으로 일을 하며 밤에는 게이오의숙에 다녔다. 곧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자 2년만 수료하고 조선을 거쳐 1919년 12월 상해로 망명했다.
김단야와 마찬가지로 1921년 5월 창당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연구했다. 임원근 역시 1922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다.
▲박헌영과 주세죽
박헌영은 190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첫 부인과 사별 후 박헌영의 어머니와 결혼했는데도 호적에는 서자로 기재되었다. 부친은 쌀가게를 운영하고 약간의 농지를 소유한 중상의 재산가였다. 박헌영은 1915년 경성제일고보(경기고 전신)에 입학했다가 졸업반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경찰에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적극적 참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졸업장은 3·1운동의 여파로 학교가 휴교중이어서 1919년 3월 말 개별적으로 받았다.
1920년 9월 유학차 도쿄로 건너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1920년 11월 일본에서 상해로 건너갔다. 1921년 4월 상해상과대학에 입학해 공부하면서도 상해에서 만난 김단야의 주선으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 고려공산당의 비합법 기관지 ‘올타’ 편집을 하고 당에서 운영하는 사회주의연구소에서 사상연구에 힘썼다. 이 과정에서 허정숙의 소개로 주세죽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갔다. 1922년 3월에는 고려공산당 청년조직으로 결성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책임비서를 맡았다.
주세죽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캐나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함흥의 영생여고보를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1개월 간 유치장 신세를 지고 퇴학당했다. 그후 영생여고보와 같은 재단의 제혜병원에서 1년간 근무하다가 1920년 가을 상해로 건너가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던 중 박헌영을 알게되었다.
두 사람은 1921년 어느날 동거를 시작하고 그해 여름 프랑스 조계의 교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여운형이 주례를 본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독일어판 ‘자본론’ 위에 손을 얹고 결혼을 약속했다. 결혼 연도가 1924년, 1926년이라는 설도 있으나 전후 삶을 살펴보면 1921년이 유력하다. 김단야, 임원근, 허정숙은 수시로 박헌영의 신혼방에 모여 놀았다. 주세죽 역시 1921년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고려공산당에 입당한 후 열성적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허정숙
허정숙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 하에서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허헌이다.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수도원처럼 규율이 엄격한 고베의 관서신학교에 다녔으나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여름방학 때 귀국하고서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여자교육협회에서 활동했다. 그때 허정숙은 협회 일을 보고 박헌영은 협회 기관지 ‘녀자시론’ 편집일을 했다.
허정숙은 조선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1920년 가을 아버지한테 얘기도 하지않고 상해로 건너가 상해외국어학교에 적을 두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연구소 활동에 참여해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드는 한편 또래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과 어울렸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귀족적 풍모의 임원근과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후 허정숙과 주세죽, 박헌영과 임원근 네 사람은 서로의 하숙집과 자취방을 오가면서 사랑을 키우고 혁명을 논했다. 허정숙은 1921년 초여름 늑막염 초기 진단을 받아 서울로 돌아갔다.
■상해를 떠나 조선에서 전개한 합법·비합법 투쟁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의 투옥과 기자생활
박헌영·김단야·임원근 세 사람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1년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뒤 1924년 1월 만기 출옥했다. 박헌영은 고향으로 내려가 1924년 11월 7일 주세죽과 제대로 격식을 갖춘 결혼식을 올렸다. 박헌영으로서는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세 남자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를 뿌리로 하는 화요회에 들어가 활동했다.
박헌영은 1924년 4월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로 입사했다. 당시 지방부 기자는 지방의 판매국 직원도 겸했다. 비슷한 시기 임원근도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당시 신문기자는 혁명 활동을 하는데 유리한 점이 많았다. 팍팍한 살림에 고정 수입이 들어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비밀결사 임무를 수행하는데도 편리했다.
대표적인 게 철도를 이용한 지방 이동이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철도 여행은 비합법 활동을 하는 혁명가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기차역 개찰구와 열차 속에는 어느 때건 경찰이 상주했다. 일경은 의심스러운 자가 있으면 불시에 검문하고 소지품 검사를 하고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연행을 능사로 했다. 그러나 기자 신분증만 제시하면 모든 게 무사통과였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국경을 넘을 때도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신문 지면을 이용한 선전 활동에도 적격이었다. 비록 총독부의 검열과 정간의 위협 때문에 표현을 조심해야 했지만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당시 신문사는 공산주의자를 지칭하는 ‘주의자(主義者)’들에게는 최적의 활동 공간이었다. 사회주의 기자들이 많았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김단야는 출옥 후 합법·비합법 양 영역에서 활동했다. 비합법 영역에서는 비밀결사에서 활동하고 합법 영역에서는 1924년 9월 입사한 조선일보 기자로 이름을 드러냈다. 이렇게 세 사람은 표면상으로는 취재 활동을 하면서 이면에서는 비밀결사 세포단체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했다.
‘주의자(主義者)’들에게 신문사는 최적의 활동 공간
세 기자 중 글을 가장 잘 쓴 이는 김단야였다. 국내외 정세에 밝을 뿐만 아니라 문장력이 좋고 외국어 능력도 출중했다. 김단야가 쓴 기사 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끈 것은 3년 전 레닌을 만났던 경험을 글로 되살린 ‘레닌 회견 인상기’(조선일보 1925.1,22~2.3) 제목의 11회 연속 기사였다. 1925년은 레닌이 사망한 지 1년이 되는 해였다.
김단야는 1922년 초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했을 때 각국 대표들과 함께 레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기사에서 레닌의 이름 앞에 “프로공화국의 아버지” “인류역사상 위대한 새 기록의 주인공” 등의 수식어를 붙였고 레닌의 죽음을 “위대한 죽음” ‘비통한 죽음“으로 묘사했다.
박헌영은 기자로서 활동은 미미했다고 한다. 기사를 거의 쓰지 않았고 기자로서의 글재주도 뛰어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 유광열은 “박(헌영)은 글은 못 썼어도 셋(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중 머리가 제일 좋은 것 같았다”며 “비밀은동을 하는 사람답게 말이 없는 대신 아주 엉큼했다”고 회고했다. 임원근 역시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기사를 잘 쓰지 못했는지 기명 기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세 사람은 조선·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5년 4월 창당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공청) 결성에 핵심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조선공산당과 공청에는 조선일보의 현직 기자이거나 나중에 몸담게 되는 인물들이 많았다. 김단야, 조봉암, 김재봉, 홍증식이 그런 사람이었다. 박헌영과 임원근도 나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조선공산당과 공청 결성 모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논설반에 포진한 신일용과 편집부의 손영극 등도 당시는 ‘주의자(主義者)’로 분류되는 인물들이었다.
‘상해 트로이카’, 감옥도 함께 신문사도 함께
임원근은 1924년 1월 출옥하고 그해 8월 임신 상태의 허정숙과 결혼을 하고 그해 말 첫 아들을 낳았다. 허정숙이 거침없고 활달한데 반해 임원근은 섬세하고 다정다감했다. 허정숙은 출산 후 1925년 1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그해 5월까지 다녔다. 그 시기는 임원근도 동아일보 기자일 때여서 허정숙·임원근 두 사람은 당시로서는 흔치 않는 사내부부이자 잉꼬부부로 유명했다.
박헌영, 임원근은 1925년 5월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들의 모임인 ‘철필구락부’가 임금인상 투쟁을 주도할 때 동조했다가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로써 이미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김단야와 더불어 ‘화요회 3인조’가 모두 조선일보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허정숙은 임원근과 함께 동아일보를 떠난 뒤 사회주의 색채를 강하게 띤 ‘신여성’지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같은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사상적 지향과 조직적 뿌리를 달리하는 여러 그룹의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영업국장 홍증식을 비롯해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조봉암 김재봉 홍남표 홍덕유 등은 화요회 인물이었고 논설반의 신일용은 고려공산당 상해파에 속했다. 일본 유학 출신이 주축인 북풍회 일원도 있었다. 이중 회원 숫자로나 회사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단연 우세한 쪽은 화요회였다. 그런데 화요회는 자기들끼리만 어울려다녔다. 민족주의 계열의 기자들은 물론 같은 ‘주의자’라 할지라도 계보가 다른 기자들과는 말도 섞지 않았다.
그러나 ‘화요회 3인방’을 포함해 대부분의 주의자들은 1925년 10월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조선과 露國(러시아)과의 정치적 관계’(1925년 9월 8일) 제목의 논설을 문제삼은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 처분을 받았는데 조선총독부가 좌익 기자들을 해직시키지 않으면 정간 처분을 해제하지 않겠다고 압력을 가해 10월 15일 세 사람을 포함해 모두 17명의 기자를 해직시켰기 때문이다.
▲고명자, 허정숙·주세죽과 ‘여성 트로이카’로 활동
허정숙은 1924년 1월 출소한 임원근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인데도 1924년 5월 주세죽 등과 함께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고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조직했다. 여자들끼리 모여 그것도 사회주의 단체를 만들어 공개적으로 여성인권 운운하는 것만으로도 당시로서는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회원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성계몽 강연을 했다. 1924년 여름 끝 무렵 조선여성동우회에 이화학당 출신의 한 여학생이 나타났다. 부유한 판사를 아버지로 둔 20살의 고명자였다. 이후 허정숙·주세죽·고명자 세 여자는 언니 동생하며 어울려 다녔다.
총각인 김단야는 임원근·허정숙, 박헌영·주세죽 부부와 어울리다보니 자연스럽게 고명자를 알게 되고 고명자를 마르크시스트로 만들기 위해 과외선생을 자처했다. 이 과정에서 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싹텄다. 김단야는 1924년 추석에 김천 고향집에 내려가 본처와 이혼하고 고명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고향에는 자식도 있었다. 고명자 역시 김단야와 결혼하겠다고 집에 알렸으나 고명자의 집에서는 금지옥엽 키운 딸이 전처가 있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하겠는 것에 대경실색하며 반대했다.
김단야는 1924년 12월말 상해로 건너가 코민테른 극동부 책임자 보이틴스키와 조선공산당 창립을 논의하고 1925년 1월말 돌아왔다. 그후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계획이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925년 8월 허정숙·주세죽·고명자가 함께 단발을 했다. 당시 여성의 단발은 사회적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은 물론 주위의 눈총도 따가웠다. 그런데도 허정숙은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신여성’지 1925년 10월호에 단발을 했노라고 기사를 썼다. 단발을 한 후 세 여자가 개울에 발을 담그고 노닥거리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남아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