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내정된 주한 일본대사의 장인은 50년 전 할복한 극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平岡公威)… 그는 과격한 천황주의자였다

↑ 1969년 5월 13일 일본 도쿄대 교양학부 대강당에서 전공투 학생들과 격론을 벌이고 있는 미시마 유키오

 

by 김지지

 

새로 부임하는 주한 일본대사의 장인이 태평양전쟁 패전 뒤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다가 1970년 할복 자살한 미시마 유키오(平岡公威)라고 한다. 미시마에 대해 알아본다.

 

‘천황 보호하는 방패 되겠다’며 사병대 결성

미시마 유키오(平岡公威, 1925~1970, 본명 히라오카 기미타카)는 도쿄에서 태어나 귀족학교로 유명한 가큐슈인(學習院)과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며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48년 대장성 은행국에 들어갔다가 8개월 만에 그만둔 것은 문학에 대한 열정과 미련 때문이었다.

‘설국’으로 노벨상을 탄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고 1949년 장편소설 ‘가면의 고백’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었다. ‘가면의 고백’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동성애자가 겪는 고통을 묘사한 자전적 작품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발표한 소설들에서도 신체적 문제를 안고 있거나 심리적 갈등으로 주변과 화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그렸다.

스승 가와바타 야스나리(오른쪽)가 노벨상 수상 후 제자인 미시마와 대담하고 있다.(1968년 10월 18일)

 

미시마는 이후에도 전후 세대의 허무주의와 이상심리를 탐미적 스타일로 표현한 ‘사랑의 목마름’(1950년), ‘금지된 색’(1954년), ‘금각사’(1956년)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일본 문단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다. 그 중에서도 말을 더듬어 열등감에 사로잡힌 청년이 교토 금각사의 미에 매료되어 방화를 결심하기까지의 심리 흐름을 치열하게 묘사한 ‘금각사’는 대표적인 탐미주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 중엔 전후 허무주의와 이상심리를 다룬 소설이 많다.

미시마는 ‘우국’(1960년)을 쓸 무렵부터 과격한 천황주의자로 변했다. 그 후 작품에서는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그렸다. 애국심과 군국주의에 빠져 있던 그는 일본의 전후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문학 외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이 1968년 10월 ‘천황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겠다는 의미에서 사병대 ‘다테노카이(楯の會)’의 결성이었다. 강령으로는 반공과 천황제 지지, 폭력 불사를 내세우고 제복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제복을 만든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강인한 인상 주기 위해 칼을 들고 포즈 취한 미시마

 

미시마의 직접 면접으로 입회가 허락된 100여 명에 달하는 회원들은 도쿄대, 와세다대, 게이오대 등 명문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1개월 동안 자위대 체험을 했다. 회원들은 시위대를 미행하거나 노동자로 가장해 간이 숙박소에 잠입하는 등의 군 정보 수집 훈련에도 참가하고 1968년 10월 국제반전데모 집회 때는 학생시위대에 잠입해 리더를 색출하는 실전훈련 등을 벌였다. 미시마는 1969년 5월 13일 극좌 학생운동단체였던 일본 전공투의 도쿄대 농성장에 혼자 들어가 1000여 명의 학생들과 공개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할복 자살 후 구심점 없던 일본 우익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

미시마를 유명 인물로 만든 것은 화려한 작품 목록이 아니라 충격적 죽음이었다. 1970년 11월 25일 오전 11시쯤 미시마는 ‘다테노카이’ 회원 4명을 이끌고 도쿄의 육상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 들어가 총감을 인질로 삼고 건물 밖의 자위대 간부들에게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도쿄의 육상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 건물 발코니에서 자위대원들에게 연설하는 미시마 유키오

 

자위대원을 모두 본관 앞에 집합시키고 일체의 공격이나 방해를 하지 않으면 총감의 신변 보장을 약속한다는 그의 요구조건에 따라 곧 1000여 명의 자위대원들이 건물 밖에 모였다. 미시마는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칠생보국(七生保國)’이 적힌 띠를 이마에 두르고 2층 발코니에서 연병장에 도열한 자위대원을 내려다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잘 들어라. 지금 일본 혼을 유지하는 사람은 자위대 너희들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피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들은 사무라이다. 너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 나를 따를 이는 없는가?” 그러나 미시마에게 돌아온 것은 냉소와 야유뿐이었다. 건물 밖에서는 TV 카메라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으며 생중계했다.

미시마는 호응이 없는 것에 낙담하고는 “이제 자위대에 대한 꿈은 사라졌다”며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뒤 총감실로 돌아갔다. 뒤이어 웃통을 모두 벗은 알몸 상태에서 기합과 함께 단도로 자신의 배를 갈랐다. 그와 동시에 뒤의 한 청년회원이 군도(軍刀)로 미시마의 목을 쳤고 잘린 목은 카펫 위에 나뒹굴었다. 목을 친 청년도 미시마를 따라 배를 가르자 또 다른 청년이 그 청년의 목을 날렸다. 시간은 12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쿄 후추시(府中市)에 있는 미시마 묘지

 

두 사람의 목을 유해 앞에 가지런히 놓은 세 청년은 총감의 결박을 풀어 자위대원에게 인도하고 곧 경찰에 체포되었다. 할복 후 미시마는 뚜렷한 구심점이 없던 일본 우익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했다. 그의 죽음은 전후 일본 사회 저변에 흐르던 군국주의를 준동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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