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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후쿠오카 이토시마 반도(糸島 半島)의 개야(芥屋)를 찾아가다… 그곳은 제국주의 시대 한·일간의 슬픈 역사를 안고 흐르는 현해탄(玄海灘)의 길목

↑  바다로 돌출된 이토시마 반도(糸島 半島) 앞에 현해탄이 펼쳐있다. 반도 왼쪽 끝이 ‘개야 대문(芥屋大門)’이고 가운데 선착장이 개야어항이다.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일본의 규슈(九州)에서 업무를 마치고 잠시 짬을 내어 깜짝 관광을 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백화점이나 지하상가를 헤매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바다로 가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일본 여행 중에, 그것도 밤 비행기로 돌아오는 날에 바다로 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바다로 갑시다. 일본의 바다가 너무 아름다울 것 같아서요.”

순식간에 일행의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조건이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후쿠오카(福岡)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고, 기차를 타고 가는 운치 있는 곳이어야 함. 필히 바다가 있어야 하고, 생선회가 싱싱하고 맛이 있어야 함.>

개야의 광어회

 

나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한 곳을 지목하고 무릎을 쳤다. 이토시마 반도(糸島 半島)에 있는 개야(芥屋)라는 곳이다. 이토시마 반도는 후쿠오카 서북부에 있는 지역으로 현해탄(玄海灘)에 돌출해 있는 조그마한 반도이다. 그 곳은 작은 어촌이어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다. 내가 일본 친구들과 자주 들렀던 곳이나 교통이 다소 불편하다. 그렇지만 생선회가 싸고 맛이 있어서 매력적인 어항이다.

“푸른 바다 위 유유히 흐르는 돛단배를 바라보면서 바닷바람에 젖어 상념을 털어버리는 낭만의 바다가 아닙니다. 아마도 오늘 같은 날씨에는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성난 바다일 것입니다.”

 

개야(芥屋)는 생선회가 싸고 맛이 있는 매력적인 어항

일행은 나의 말을 흘려버리고 바다를 향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듯했다. 나는 하카다(博多)역에서 마에바루(前原) 행 기차표를 샀다. 지하철과 연계된 교외선 열차다. 이동 거리는 약 50분 정도. 기차는 도심의 지하를 달리다가 하늘과 산과 집이 보이는 지상으로 올라갔다.

기차는 해안선을 따라 초승달 같은 곡선을 그리며 달렸다. 바다가 보이는 순간 모두들 환호성을 울렸다. 소나무 숲 사이로 아름다운 바다가 길고 넓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온갖 상념이 송두리째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한 느낌도 작용했을 것이다.

마에바루(前原) 역에 내리자 소강 상태였던 비가 퍼붓고 있었다. 역 플랫폼에서 택시 승차장까지 5m의 거리인데도 뛸 수 없는 무시무시한 장대비였다. 그렇다고 해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 없는 일. 용기백배 승차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향해 돌진했다.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흠뻑 젖은 몰골을 쳐다보며 서로가 박장대소했다. 택시 운전기사는 “이 빗속에 보잘 것 없는 어촌에 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독일에서 온 손님, 일명 ‘파리의 여인’이 현해탄을 보고 싶다고 해서 가까운 개야(芥屋)에 가려고 합니다. 아주 소박한 횟집도 있구요.”

고기잡이 배가 정박해 있는 개야어항(芥屋漁港)

 

운전기사는 엊그제 후쿠오카의 야마가사(山笠) 마쓰리(祭)에 참가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후쿠오카 시민들의 축제만이 아니라, 인근 지역민이 동참하는 축제라는 사실도 중요했다. 운전기사는 물에 잠긴 시골길을 어렵게 달리면서도 “요리사의 길을 걷다가 힘에 겨워서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는 말도 하고, “아내와 이혼한지 5년이 됐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빗줄기처럼 거침없이 쏟아냈다.

“일본 여자들이 옛날과 달라 매섭고 차갑습니다. 결국, 도장을 찍고 말았습니다.”

택시는 빗속을 뚫고 해바라기 꽃이 만발한 논길을 지나 어항과 인접해 있는 소박한 횟집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우산을 들고 서서 반갑게 맞이했다.

 

규슈와 쓰시마 사이의 해협인 현해탄(玄海灘)은 ‘검은 바다가 소용돌이 친다’는 뜻

현해탄은 규슈(九州)와 쓰시마(對馬島) 사이의 해협을 말한다. 이 해협은 바다가 얕은 편이나 파도가 거칠고 검기 때문에 현해탄(玄海灘)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규슈 북서부의 바다에 검을 현(玄)을 쓰는 이유는 ‘현무(玄武)가 북쪽, 주작(朱雀)이 남쪽을 가르킨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의견도 있다. 아무튼, 현해탄은 역사적으로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애절한 사연들을 듬뿍 담고 있다.

현해탄과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개야(芥屋), 이키시마(一岐島), 쓰시마(對馬島), 부산

 

“그야말로 검푸른 현해탄은 제국주의 시대에 한·일간의 슬픈 역사를 안고 흘렀다. ‘검은 바다가 소용돌이 친다’는 뜻의 현해탄(玄海灘)이라는 지명 자체가 후쿠오카 앞의 특정 지명을 뜻하는 말이지만 한 세기가 흐르면서 어느 결에 보통 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바다 전문가이자 민속·문화 전문가인 주강현 박사가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라는 책에서 정의한 현해탄의 개념이다. 현해탄의 파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거칠게 출렁대고 있다. 현해탄의 아픈 사연은 임화의 시에도 절절히 배어있다. 다시금 <현해탄>의 일부를 옮겨본다.

“대마도를 지나면/ 한 가닥 수평선밖엔 티끌한 점 안 보인다./ 이곳에 태평양 바다/ 거센 물결과/ 남진해온 대륙의 폭풍이 마주친다./…./ 영원히 현해탄은 우리들의 해협이다./…./ 우리들의 괴로운 역사와 더불어/ 그대들의 불행한 생애와 숨은 이름이/ 커다랗게 기록될 것을 나는 안다.”

입석산(立石山)에서 바라본 현해탄. 오른쪽이 이토시마 반도

 

날씨 좋으면 이키시마(一岐島)도 보여

때마침 비가 멎었다. 그러나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현해탄은 거친 파도를 일으키며 방파제를 세차게 때렸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와 맞먹었다. 평소와 달리 어선들도 방파제 안쪽으로 숨어버렸고, 낚시꾼도 보이질 않았다.

“해안의 돌도 현해탄을 상징하려는 듯 검은 색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이키시마(一岐島)가 보입니다. 이곳 개야(芥屋)가 이키시마(一岐島) → 쓰시마(對馬島) → 부산으로 가는 길목인 셈이죠.”

5대 째 여관 겸 횟집을 하고 있는 우메야(梅屋)의 주인 할머니의 말이다. 비가 멎자 우리 일행은 바닷가로 나가 해변을 걸었다. 가까운 곳에 ‘개야 대문(芥屋大門)’이라는 관광지가 있으나, 날씨가 나빠서 유람선이 출항하지 않는다고 했다. 개야 대문은 거친 파도에 의해 저절로 생성된 높이 64m, 깊이 90m의 자연 동굴이다. 길이가 180m 정도이나 통로가 좁아 10m 밖에 들어갈 수 없는 현무암 동굴이라고 했다.

개야대문(芥屋大門). 180m 길이이나 통로가 좁아 10m 밖에 들어갈 수 없는 현무암 동굴이다.

 

아주 먼 옛날 한반도와 규슈는 육지로 이어졌다는데

부산과 후쿠오카까지의 거리는 200㎞의 거리다. 이곳 현해탄의 파도가 높아 ‘죽음의 바다’라고도 불리지만, 아주 먼 옛날에는 ‘육지로 연결되었다’는 학설도 설득력이 있다. “20만년 전만 해도 동해는 하나의 거대한 호수였다. 두(한국과 일본) 지역에 서식하던 구석기인들은 땅을 밟고 비교적 자유롭게 오가며 살았다.”

“1만∼1만 2000년 전 지구상에 홍적세가 끝나고 충적세가 시작되면서 녹은 빙하로 말미암아 두 지역은 바다를 가운데 두고 분리되었다. 중간에 높게 솟았던 산봉우리들은 잠기지 않고 남아서 오늘날 쓰시마(對馬島)와 이키(一岐)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되었다.”

동국대 윤명철 교수가 쓴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는 책에 담긴 내용이다. 윤 교수는 “충적세의 시작은 현해탄의 탄생을 의미하고, 신석기 문화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바다는 인류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 문화가 발생할 때도 그러했고, 교류를 할 때도, 전쟁을 할 때도, 바다는 항상 우리의 곁에 있었다.”

어려운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의 궤적을 추적하지 않더라도 나는 ‘바다’ 그 자체가 좋았다. 비가 그친 후 안개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연출했고, 파도는 다소 진정이 되는 듯 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바람 거센 현해탄 방파제를 우산을 들고 거니는 여인의 모습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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