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서대문형무소 1호 순국 사형수’는 애국지사 허위(許蔿)… 이낙연 국무총리 키르기스스탄에서 유족 만나 경의 표해

↑ 허위 선생의 초상(왼쪽)과 흉상

 

by 金知知

 

키르기스스탄을 공식방문 중인 이낙연 국무총리가 7월 18일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였던 애국지사 허위(許蔿) 선생의 후손들을 만났다. 허위 선생은 1908년 의병투쟁으로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한 독립운동의 선구자다. 정부는 허위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독립 유공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서울시는 1966년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 구간을 왕산로로 제정했다. 허위 선생의 형제와 많은 후손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항일 무장투쟁을 하다 희생됐다. 남은 일가들은 불행하게도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해방된 조국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허위는 구한말 의병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이에 반발하며 시작된 대한제국 군인들의 저항을 계기로 전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의병투쟁이 봇물처럼 터졌다.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장 중 특히 이름을 떨친 의병장으로는 강원도의 이인영·민긍호, 경기도의 허위, 충청도의 이강년, 경상도의 신돌석, 호남의 기삼연·전해산(전수용) 등이 있다. 의병들은 비록 빈약한 화승총으로 무장했지만 게릴라전을 펼치며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영국 종군기자 존 멕켄지가 1907년 경기도 양평 인근에서 촬영한 구한말 의병 사진

 

특히 허위(1854~1908)는 의병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경북 선산 태생인 허위는 1895년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분개했다. 1896년 3월 경북 김천 읍내에서 수백 명의 장정이 항일 의병의 기치를 내걸 때 참모장을 맡았다. 허위 부대는 경북 김천과 성주에서 의병을 모집한 뒤 대구로 진격했으나 관군에게 패해 충북 진천으로 이동해 때를 기다렸다.

그때 “충정은 알겠으나 자중하라”는 고종의 밀지가 내려왔다. 허위는 의진을 해산한 후 낙향해 학문에 정진했다. 그러다가 1899년 고종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서리 재판장(대법원장 서리), 의정부 참관, 비서원승 등을 지내며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1905년 1월에는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이 의병 대열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배일 통문과 격문을 전국에 살포했다가 4개월간 구금되었다.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던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다시 고향을 떠나 전국을 돌며 지사들과 시국을 논했다. 곽종석, 유인석, 민긍호, 이인영, 이강년 등이 그들이었다. 허위는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연천과 철원 등 주로 경기 북부 지역에서 활동했다.

 

전국 의병들과 ‘서울진공작전’ 벌였으나 화력과 병력 부족으로 실패

그 무렵 강원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벌이던 이인영(1868~1909)과 뜻이 맞아 1907년 11월 서울로 진격하자는 통문을 전국의 의병 부대에 돌렸다. 강원도의 민긍호, 충청도의 이강년 등 전국의 의병장들이 호응했다. 그 결과 1907년 12월 의병 연합부대인 ‘13도 창의대진소’가 경기도 양주에서 결성되었다.

서울진공작전 모형(출처 독립기념관)

 

이인영이 총대장, 허위가 군사장에 추대되고 관동군(강원) 창의대장 민긍호, 호서군(충청) 이강년, 호남군(전라) 문태수, 교남군(경상) 박정빈, 진동군(황해) 권의회, 관서군(평안) 방인관, 관북군(함경) 정봉준이 지역별 대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초 발표된 교남군 창의대장은 신돌석이었으나 신돌석이 자신의 근거지에서 계속 전투를 벌여 박정빈으로 교체되었다. 연합부대 규모가 총 1만여 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는 모이기로 예정된 병력의 총합인 것으로 보인다.

연합 의병부대의 목표는 ‘서울 진공’이었다. 연합부대는 1908년 1월 이인영과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봉대를 앞세워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했다. 선봉대는 망우리 일대의 군사 요충지를 선점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과 병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구나 본대는 도착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강년 부대는 양주 왕방산에서 일본군에 묶여 있었고 민긍호 부대는 진군 중이었다. 결국 선봉대는 후퇴를 결정했다.

그 무렵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이 작고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인영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뒷일을 군사장 허위에게 일임한 채 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 결국 1차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이인영은 1909년 6월 충북 영동군 황간에서 체포되어 9월 20일 서울에서 순국했다.

창작 오페라 ‘왕산 허위’ 포스터 (2010년 11월 5일)

 

서울의 ‘왕산로’(동대문~청량리)에서 ‘왕산’은 허위의 호 

허위는 제1차 서울 진공작전이 무산된 후에도 제2차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4월 전국의 창의대장과 연명으로 13도 의병 연합부대의 재의거 격문을 전국에 띄워 이에 호응하는 의병들과 연합군을 재편성했다. 그리고 경기도의 창신리, 불광리, 뚝섬, 동작나루에서 서울 진공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도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 밀려 1908년 6월 다시 서울 외곽으로 철수했다. 그러던 중 은신처가 발각되어 1908년 6월 체포되었고 그 해 9월 27일(양력 10월 21) 서대문형무소에서 형무소 개소 후 첫 사형수로 순국했다.

당시 허위를 신문한 일본인 소장은 허위를 가리켜 “조선의 국사(國士)”라 추앙하고 안중근은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며 구국의 본보기로 삼았다. 허위가 제1차 서울 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66년 서울시가 공식 명칭으로 지정한 도로명이 허위의 호를 딴 ‘왕산로’(동대문~청량리)다.

왕산허위선생기념관 (경북 구미)

 

허위 집안만큼 일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예도 드물다. 허위의 형 허혁은 1912년 한인 자치단체 조직으로 만주에서 결성된 ‘부민단’의 초대 총장을 지냈고 조카 허형식은 만주 동북항일연군 참모장이었다. 허위의 조카딸 허길은 퇴계의 진성 이씨 집안에 시집가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아들들을 독립지사로 길러냈다.

친손자인 허진은 독립군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 벌판을 누비다 광복 후 북한으로 갔다. 그러나 러시아 모스크바로 유학을 갔다가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을 보고 김일성 비판 운동을 시작했다. 북한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자 반김일성 운동이었다. 1957년 주소련 북한대사관에 잡힌 그가 2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한 사건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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