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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잠시 짬을 내 여행한 시모노세키(下關) 여정

↑ 일본 본토와 규슈 사이의 간몬해협(關門海峽)과 간몬교(關門橋)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시모노세키 위치

 

시모노세키(下關)는 일찍이 서부 일본의 교통 요충지이자 무역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하였던 항구 도시다. 일본은 1905년,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왕래하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항로를 개설하여, 1945년 종전 때까지 대륙을 향한 관문으로 활용했다. 야마구치(山口)현에 해당되는 시모노세키는 해협을 사이에 두고 규슈(九州)의 모지(門司)항과 마주보고 있는 항구로 간몬항(關門港)이라 일컫기도 한다.

시모노세키 시내(출처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1895년 4월.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이처럼 시모노세키는 역사적으로도 사연이 많은 곳이다. 1970년 6월부터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고가는 부관페리호가 주3회로 재취항하고 지금은 1일 1편의 배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드나들며 한국과 일본의 상품은 물론, 얽히고설킨 양국의 문화를 실어 나르고 있다.

시모노세키 슌판로(春帆樓) 안에 있는 청일강화기념관(왼쪽)과 그 안에 복원해 놓은 회담장 모습

 

본토와 규슈를 연결하는 것은 해저터널과 간몬교 

일본 본토와 규슈 사이의 간몬해협(關門海峽)에는 1942년에 해저터널이 개통되어 기차가 달리게 되었고, 1958년에는 국도가 개설되어 자동차가 줄달음치게 되었다. 그후 현수교인 간몬교(關門橋)가 놓여 수많은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다. 길이 1,068m, 폭 26m인 이 다리는 1968년 착공하여 1973년에 개통됨으로써, 간몬 해저터널에 이어 혼슈와 규슈를 잇는 제2의 동맥기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대역사는 시모노세키의 영화를 무너뜨리는 악재가 되기도 했다. 새로 생겨난 해저터널과 교량에 의해 항로를 이용한 대륙 무역의 창구가 대륙과 가까운 규슈의 하카다(博多)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 것이다.

나는 평소 시모노세키에 한 번쯤 가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 후쿠오카(福岡)에 갔을 때 잠시 시간을 내어 깜짝 여행을 했다. 동행자는 차를 직접 몰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오츠보(大坪)씨였다. 그는 등산 가는 사람처럼 가벼운 복장으로 필자를 맞이했고, 음료수와 몇 가지 음식을 준비해 왔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시모노세키까지는 차로 한 시간 쯤 걸린다고 했다. 고속도로 입구의 이정표는 77㎞라고 쓰여 있었다.

간몬해협의 해저터널. 사람들이 지나가는 인도도 있다.

 

일본인 가이드, 현철의 CD 보이며 남대문 시장에서 싸게 샀다고 자랑

산하는 온통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3월 말 이지만 우리의 5월쯤으로 느껴졌다. 푸르름은 보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오츠보씨는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샀다는 CD를 틀었다. 환율 덕분에 싸게 샀다고 좋아했다. 현철의 ‘사랑은 나비인가 봐’, ‘첫사랑 마도로스’ 등의 노래가 달리는 차 소리와 박자를 맞추는 듯 구성지게 흘러 나왔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노래가 ‘아미새’ 였다.

“아름답고 미운 새 아미새 당신 / 남자의 애간장만 태우는 구나 / 아미새 아미새, 아미새가 나를 울린다. / 신기루 사랑인가 / 아미새야 아미새야…”

‘아미새야 아미새야’를 흥얼거리던 오츠보씨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질문이 많은 골치 아픈(?) 아저씨다.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으니 호기심도 많을 수밖에.

“이 노래에 나오는 ‘아미새’는 무슨 뜻입니까?” “아? 네에, 노래 가사에 답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미운 새’를 줄여서 ‘아미’라고 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새(鳥)로 묘사해서 ‘아미새’로 불렀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상상의 새’라고나 할까요? 저의 설명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다시 확인해서 전화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멋진 설명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미새’의 의미를 알게 되어서 머리가 맑습니다. 사실 너무 궁금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현철의 노래는 “한 조각 구름 따라/ 떠도는 달님아…”로 넘어갔다. 하얀 뭉게구름을 따라 고속도로를 달렸다.

기타 규슈의 야하타(八幡)를 지나 후지야마(藤山) 터널을 통과하자, 시모노세키의 안내판이 가까이 다가 왔다. 나는 항구의 경관을 보기 위해서 간몬교(關門橋)를 이용하자고 주문했다. 오츠보씨도 6년 만에 오는 길이라고 했다. 하늘이 내려 앉은 듯 파란 바다 위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분주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자 작은 개천에 늘어선 수양버들이 봄바람에 춤을 추면서 반갑게 손짓했다.

 

시모노세키의 연락선 터미널 너무 조용하다 못해 쓸쓸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단지 한 번 들러 보고 싶었던 시모노세키. 맨 먼저 가고 싶은 곳은 역사의 보따리와 사람들의 애환을 운반하던 연락선 터미널이었다. 시모노세키 역, 해협 꽃 거리 등의 표지판을 따라 한 바퀴 돌자 수족관이 나왔다. 수족관의 이름이 ‘해향관(海響館)’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특이 했다. 2001년에 문을 연 이 수족관은 ‘바다 소리의 관’ 즉 ‘가이쿄우칸(海響館)’이라는 애교스러운 이름을 붙이게 되었단다.

해향관(海響館) 수족관

 

“그날 밤은 역 앞의 조그만 여관에서 노독을 풀고, 이튿날 아침에 아침차로 떠나서 저녁에는 연락선을 타게 되었다. 하관(下關)에 도착하니, 방죽이 터져 나오듯 일시에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시커먼 사람 떼에 섞이어서 나는 연락선 대합실 앞까지 왔다.”

황보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의 소설 만세전(萬歲前)에 나오는 하관(下關), 즉, 시모노세키(下關)의 묘사가 실감 난다. ‘방죽이 터져 나오듯 쏟아져 나오는 사람 떼…’라는 표현이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과장된 묘사라고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면 과히 틀리지 않는 표현이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시모노세키를 이용하여 대륙으로 진출했고, 조선인들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곳을 통해서 일본에 발을 들였으니 말이다. 염상섭도 도쿄 유학시절 이 뱃길을 거쳐서 일본을 드나들었으니, 소설 속의 ‘이인화’가 아닌 자신의 눈으로 ‘사람 떼’를 확인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눈앞에 서있는 터미널은 너무나 조용했다. 부산으로 가는 페리호가 저녁 시간에 출발한다고는 했지만, 터미널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했다. 보따리를 챙기는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후미진 곳에서 도시락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소위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보따리 아줌마’들이다.

“사올 물건도 사갈 물건도 없습니다. 단지 해오던 일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본에 한국 물건이 지천이고, 한국에도 일본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습니까?” 이름을 밝히지 않는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할머니의 답변이다. 이곳만이 아니다. 재래시장도 한산했다. 가게들은 한 집 건너 문을 닫고 있었고, 길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막했다.

여객선 터미널

 

유명한 시모노세키 히레자케를 마시지 못한게 아쉬워

그래도 시모노세키의 자랑거리라면 ‘가라토 시장(唐戶市場)’일 것이다. 낮이기는 했으나, 새벽시장으로 유명한 이곳도 한산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목청을 높이면서 호객 행위를 하는 한 상인은 “요즈음은 새벽시장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면서, 경기가 최악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15년 째 복요리를 팔고 있는 한 아주머니도 “시모노세키가 일본 제일의 복요리 산지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장사가 안 된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렇지만 해안에는 시내 쪽 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5분이면 닿는다’는 모지(門司)를 향하는 부두에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가라토 시장(唐戶市場)

 

나와 오츠보씨는 종이컵 커피를 들고 야마구치 출신 가수 ‘야마모토 죠우지(山本讓二)’의 노래비(碑) 앞에 앉았다. 간몬해협(關門海峽)이라는 노래비였다. 계절은 달랐지만 해협(海峽)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가사였다.

<윙윙거리는 스크류- 간몬 해협/ 나의 심중에 서려있는 바램이 젖는다/ 나와 너 둘이서 ‘히레자케(酒)를 마신다/ 간에 얼어붙을까. 진눈깨비 눈(雪)일까/ 아- 눈(目)을 맞춘다/ 남자끼리 눈(目)이 젖는다.>

노래비(碑) 앞에서 커피를 마시던 오츠보씨가 나와 눈을 맞췄다. 시모노세키의 히레자케(복 지느러미를 태워서 뜨거운 사케에 넣어서 마시는 술)의 맛을 음미하지 못하고, 커피로 대신하는 ‘아쉬움의 신호’였다. 모지항(門司港)을 향한 연락선의 고동 소리가 길게 이어지며 항구의 정적을 깨트렸다.

시모노세키의 히레자케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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