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韓日 청구권 협정> 빛과 그림자 ② 대법원의 ‘사법 자제 원칙’ 외면과 정부의 방관이 日 경제보복 빌미 줘

↑ 대법원 대법정 (출처 대법원)

<한일 청구권 협정> 빛과 그림자 ①  ☞ 클릭

 

by 金知知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국내의 상반된 평가

한일 청구권 협정 결과에 대한 평가는 협정 체결 당시부터 엇갈렸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논리에 치우쳐 식민지 지배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어떤 사죄와 배상도 받지 못한 채 졸속적이고 굴욕적으로 협정을 서둘렀다” “청구권이 정치적으로 타결되는 바람에 개인 청구권에 대한 권리 구제가 미흡했다”는 등의 비판이다. 또한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 수탈액을 돈으로 환산하면 ‘조족지혈’이라고도 비판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의 순기능을 옹호하는 측은 “1951년 9월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한국이 전승국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일본의 침략에 대해 교전국으로서 전쟁 배상을 주장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가 미약한 상태에서 우리의 협상력이 애초부터 한계가 있었고, 일본이 역청구권을 주장하는 등 기고만장해도 어떻게든 경제개발 자금을 확보해야 하는 약소국의 불리한 조건 등을 감안하면 선전했다”고 평가한다.

이런 상반된 평가 속에서도 “명칭이 무엇이든 종잣돈을 받아 포항제철 건설 등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일본 자금이 한국 경제 발전에 결정적 마중물 역할을 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는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1951년 9월 8일)

 

■2005년 이해찬 총리, 문재인 민정수석이 참여한 ‘한일회담 문서공개 민관공동위원회’ 결론은?

노무현 정부는 2005년 1월 17일 한일수교회담 관련 문서 중 일부를 공개했다.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문서 공개 요구를 법원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혼란을 막는다는 차원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와 이용훈 전대법관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 대책 민관공동위원회’를 3월 3일 구성했다.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도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한일 청구권 협정 조인 후 40년 만에 당시 한일회담 과정이 어떠했고 협정에 정말 강제징용자들의 개별 청구권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국내 최고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관련문서 156권, 3만5354쪽 등을 면밀히 살폈다. 검토 결과와 후속 대책은 2005년 8월 26일 발표했다. 1951년부터 1965년 한일협정까지 14년간의 한일 외교기록 3만5354쪽도 같은 날 공개했다.

이해찬 국무총리(왼쪽에서 두 번째)가 2005년 8월 26일 주재한 한일회담 문서공개 민관공동위원회 회의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의 효력 범위와 이에 따른 정부대책 방향을 확정했다.(출처 문화체육관광부)

 

위원회는 “한일 청구권 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해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청구권 협정을 통해 받은 무상 3억 달러는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봐야 하므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고 발표했다.

다만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조선인 원폭피해자 문제 등 일본 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위원회는 “당시 일본에게 받은 3억 달러 무상자금 가운데 개인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불충분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2007년 특별법을 제정, 징용 피해자 7만2631명에게 6184억 원의 위로금과 지원금을 추가로 지급했다.

미국과 독일의 유사한 사례를 기준으로 삼아 사망자 유족에게는 2000만원, 부상자에게는 1000만원씩이다. 항목별로는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피해자 유족 위로금 약 3601억 원 ▲부상장해를 입은 생존자 위로금 약 1022억 원 ▲미수금 유족·생존자 지원금 약 522억 원 ▲생존자 의료지원금 약 1040억 원 등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제징용 문제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최소 14만 명으로 추정되므로 이들이 모두 소송에 나선다면 이론적으로는 수십조를 더 써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위원회 검토 결과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몇 가지 사실들이 바로잡혔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관료에게 “독도를 폭파하자”고 먼저 발언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검토위원으로 참여한 한 대학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자금에 쪼들려 국익을 손상시키는 졸속 협상을 했고, 영토권에 대한 양보가 있었다는 말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상황 전개 : 강제징용 문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청구권 협정), ‘대일 청구 요강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최종 해결’(합의의사록)이라는 문구 때문에 오랫동안 잠잠하던 청구권 협정 내용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1991~1993년 배상을 주장하는 소송을 내고 일제 강점기 때 일본 군수업체에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이 1995년, 1997년 당시 일본 기업을 상대로 개인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제기한 소송은 모두 지방재판소와 고등재판소를 거쳐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 일본 재판부가 든 이유는 4가지였다.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고, 옛 일본 헌법에는 국가배상 의무가 없고, 청구시효가 지나고, 청구권 협정에 따른 권리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그중 결정적 이유는 청구권 협정에 명시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라는 문구에 근거한다. 즉,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한국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여 최종적으로 청구권을 소멸시켰으므로 더 이상 청구권은 없다는 것이다. 피해가 있다면 한국 정부에게 받으라는 것이다.

일본 홋카이도 샤쿠베쓰 탄광 입구에 모여 있는 조선인 징용자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에서 패소하자 한국에서 신일철주금(구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여전히 쟁점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강제징용 피해 배상이 포함됐는지 여부였다. 일본이 제공한 청구권 자금으로 일본 측 배상이 끝났는지, 청구권 협정과는 별개로 개인 청구권이 존재하는지가 중요한 판단 대상이었다. 이에 대해 1·2심 재판부는 “이미 배상 시효가 지났고, 같은 사건을 기각한 일본 판결이 국내에도 효력을 미친다”며 2008~2009년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이 2012년 5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있었다고 해도 불법 식민 지배로 인한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며 사건을 파기환송해 2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청구권 협정이 명목상 재산 청구권을 제외했다고 해도 식민지 불법 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고 판결한 것이다. 당시 주심인 김능환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했으나 한일 관계에 대형 폭탄을 투척한 셈이다.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받아서 2013년 7월 서울고등법원이 “피고 기업은 원고에게 1억원씩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문재인 대통령, “사법절차에 행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3권분립에 어긋난다”며 방관

이렇게되자 우리 정부가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판결을 따르자니 국제적 합의를 깨야 하고, 그렇다고 판결을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됐다. 그동안 역대 정부가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강제징용자 보상은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취해 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오늘을 있게 한 노무현 대통령도 같은 입장이었다. 강제징용 미수금은 청구권 협정 당시 우리가 제기한 대일 청구 요강에 들어 있었고, 일본군 위안부·원폭 피해자·사할린 동포 문제만 불포함됐다는 게 기존 정부 인식이었다.

이후 박근혜 정부의 외교부와 대법원이 재상고심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의견을 교환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것을 두고 사법 농단 적폐로 몰아 양승태 대법원장을 구속했다. 이에 대해 한 현직 부장판사는 “양승태 사법부에서 선고를 지연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 외교적·정책적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을 벌어 준 측면이 없지 않다”며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으로 기소한 검찰과 정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반면 양승태 사법부가 조직 이익을 위해 강제징용 재판을 이용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므로 적절한 발언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조직 이익’이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숙원사업인 상고법원의 도입을 위해 대법원의 징용 관련 판결을 최대한 늦추려 했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재상고심에서 서울고법의 판결을 확정한 것은 문재인 정권 때인 2018년 10월 30일이었다. 대법원은 “청구권 협정은 불법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한 협상이 아니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일본이 협상 과정에서도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피해 배상을 부인했기 때문에 위자료 청구권이 협정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사법절차에 행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3권분립에 어긋난다”며 대법원 판결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어떤 액션플랜도 내놓지 않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사진 위) 등 대법관들이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판결을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대법원 판결에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모든 나라의 사법부에서 지켜지고 있는 오랜 전통인 ‘사법 자제의 원칙’을 우리 대법원이 외면했다는 것이다. 국가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외교 사안에서 사법부가 외교부의 입장을 존중하고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미국 등 상당수 선진국에서 민감한 외교 사안에 대해 ‘사법 자제’가 이뤄지고 있다. 영국은 법원이 외교 문제나 국제법과 관련된 재판을 맡은 경우 외교부에 ‘행정부 확인서’를 보내 입장을 요청하는 게 관행이다. 미국 연방대법원도 국제 조약을 해석할 때 관련 협상과 이행 전 과정을 책임지는 정부의 해석에 큰 비중을 둔다. 2019년 7월 현재 강제징용 관련 소송은 모두 15건이다. 이중 대법원 판결까지 끝난 것은 3건에 37명이고 총 배상금액은 13억 6000만원이다.

 

일본 정부의 ‘중재위 구성’ 요청에 우리 정부 답 주지 않고 있어

대법원 판결에 대해 일본은 “과거 한일 간 협정 조약으로 해결되었고 노무현 정부 때도 개인 보상을 했으므로 한국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데 일본 기업에 대해 재산 압류까지 한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일부 언론에서는 “1965년 협정 맺으면서 일본은 그걸 배상금이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잘못했으니 잘못에 대해 배상한다’ 면서 준 게 아니고 독립 축하금 혹은 경제 협력 자금 이러면서 준 거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피해자 개인이 개별 기업에 배상을 받을 자유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일본은 또한 우리 정부에 중재위 회부를 요청하고 있다. 근거는 청구권 협정 제3조에 ‘협정 해석·실시에 관한 분쟁은 우선 외교상 경로를 통해 해결한다. 그래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 한일 양국에서 각각 1명씩 추천하는 위원과 이들이 합의한 제3국 위원으로 구성된 중재위원회에 결정을 회부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재위를 통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되 한국 정부가 거부하면 ICJ(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한다는 계획이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중재위 구성’ 요청에는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며 답을 주지 않고 있다가 7월 16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중재위든 ICJ든 패배했을 경우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 전개 : 위안부 문제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에서 최대 난제다. 이를 둘러싼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 것은 2015년 12월 28일이다. 한일 양국의 외무장관이 회담을 열어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1991년 8월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 언론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 증언하면서 불거진 한·일 관계 최대 난제가 24년 만에 형식상으로는 타결된 것이다.

1944년 9월에 중국 윈난성 쑹샨에서 촬영된 조선인 위안부들

 

일본 정부가 약속한 것은 ①日 정부 책임 인정 ②아베 총리의 사죄와 반성 ③日 정부 예산 투입 3가지였다. 한국 정부는 일본 측의 약속이 충실히 이행된다는 것을 전제로 세 가지를 약속했다. 이번 합의가 ‘최종적이며 불가역적(不可逆的)인 것’이고 앞으로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더 이상 ‘비난·비판’을 하지 않겠으며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측이 협상 과정에서 강하게 요구했던 것들을 모두 들어준 셈이다.

일본은 당일부터 후속 대책에 착수했다. 기시다 일본 외무장관이 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구두(口頭)로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발표하고 아베 총리는 기시다 외무장관의 입을 빌려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했다. 아베 내각이 ‘군의 관여’라는 표현을 통해 강제성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 것은 분명 진일보한 것이다. 일본 총리가 공식 사과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해 정부 예산으로 10억엔(약 100억원)을 출연하기로 했다. 이것은 일본 정부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연장선이다. 그렇다고 ‘법적 책임’을 공식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즉 일본 정부가 책임을 우회적인 수법으로 인정하면서도 법적 책임은 피해간 것이다. 일본 역대 정권들은 그동안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에서 한발도 물러선 일이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박근혜 정부, 일본에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것’이라고 합의해 비판받아

그러자 우리 사회 안에서 일본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위안부 문제의 ‘되돌릴 수 없는 최종 해결’이라고 못박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다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발과 “만족은 못 하지만 정부 뜻은 따르겠다”는 반응으로 엇갈렸다. 정부 뜻을 따르겠다는 할머니들도 일본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이끌어내지 못한 점은 아쉬워했다. 일본의 반응도 크게 엇갈렸다. 아베 총리를 지지해온 이들은 “일본이 너무 양보했다”고 부글부글 끓었다. 반면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은 아베 총리가 결국 책임을 인정했다고 환영했다.

일본 정부가 내놓은 출연금 10억 엔(약 100억 원)은 2016년 7월 설립한 화해·치유 재단에 투입되었다. 사실 김대중·김영삼 정부 때는 일본이 민간 모금으로 조성한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대다수 피해자는 “일본이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민간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다”고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일본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 일본 정부의 공식 예산에서 위로금이 나와야 한다는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일본은 이를 극력 거부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 예산으로 위안부 재단 출연금이 나온 것은 일본 정부의 전향적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재단 측은 지원금 수령을 희망한 위안부 할머니 34명과 작고한 위안부 할머니 유족 등에게 치유금 명목으로 약 44억원을 현금으로 지급했다. 반면 위안부 할머니 10여 명은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없이 치유금 명목으로 돈을 주는 것에 반대한다”며 거부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비판적인 시민단체들도 “일본에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당시 야당은 “10억엔에 할머니들을 팔아넘겼다” “일본의 더러운 돈을 돌려줘야 한다”고 박근혜 정부를 비난했다.

화해치유재단 사무실 현판

 

일본 정부, “국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발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위안부 합의를 ‘외교 적폐 1순위’로 낙인찍고 이를 검증할 ‘위안부 TF’를 구성했다. 그리고 2107년 12월 ‘위안부 TF’는 “내용상 일부 진전이 있었지만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이는 등 일본 쪽에 일방적으로 기운 합의였다”는 검증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와 안보·경제 부문 등을 분리해 대응하지 못하고 ‘위안부 외교’에 매몰되었다”라고 박근혜 정부를 비판했다. 한·일 관계 악화가 미국의 아·태 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써 미국이 두 나라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우리 정부가 수세적 상황에서 협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정부는 2018년 11월 21일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겠다고 발표했다. 공식적으로는 2019년 7월 해산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이라며 “국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있다. 한 일본인 기자는 “이 정부가 출범하면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며 “합의에 따라 위안부 할머니 중 생존해 있는 분들의 70%가 이미 위로금이나 지원금을 받지 않았나. 생존자의 70%가 받았다는 건 그 합의를 긍정 평가했다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한일 청구권 협정, 개정인가 보완인가 현상 유지인가

한일 청구권 협정은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 배상 문제, 독도 문제를 명확하고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해 오늘날까지 갈등의 씨앗이 됐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한일 협정이 ‘미완의 협정’이라는 비판적 지적이 국교정상화 54주년을 맞은 현 시점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다만 위안부 존재는 협정 당시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1965년의 시점에서 본다면 청구권 자금이 배상금이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입장이 관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배상금이 아님으로 인해 현재 일본 정부도 입장이 곤란해졌다.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이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구권 자금은 배상을 위한 자금이 아니었다.

현재 한·미·일 전문가들은 54년 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이 냉전시대 한·일 양국이 미국의 후견하에 안정과 번영을 이룩할 수 있는 기본틀이 됐다는 점에서 성공적 협정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냉전시대에 급조된 협정이기 때문에 탈냉전 글로벌 시대의 기준으로는 미흡한 점이 많은 만큼 한일기본조약을 업그레이드해 ‘포스트 1965년 체제’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첫째 의견은 한일 청구권 협정 개정론이다. “한일기본조약 2조(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는 한일 역사 갈등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한일 과거청산의 출발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식민지배를 ‘잘못’으로서 명확하게 자리매김하는 새 조약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의견은 협정 보완론이다.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느닷없이 조약을 뒤엎는다는 것은 국제 관행으로 보면 엄청난 일이다. 실제 한일 사이의 역사인식은 한일 청구권 협정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많은 진화를 해왔다. 한국 사회가 아베 담화 등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는 대신 포스트 아베까지 염두에 둔 좀더 긴 시각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의견은 현상 유지다. 일본이 개정이든 보완이든 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현상유지가 불가피하므로 정치외교적인 노력을 통해 해법을 찾자는 의견이다.

일본이 요청한 중재위 구성을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영향력, 일본에 대한 호감도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같다”며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제3국 중재위나 ICJ(국제사법재판소)로 간다고 해도 과거처럼 구제국주의 국가에 유리한 상황만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