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韓日 청구권 협정> 빛과 그림자 ① 태평양전쟁 ‘승전국’ 아니어서 감수해야 했던 타협과 봉합이 두고두고 불씨

↑ 일본 총리 관저에서 열린 한일 협정 조인식 (1965년 6월 22일)

 

by 金知知

 

일본 정부가 2019년 7월 4일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 3종(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 레지스트, 불화수소)에 대한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경제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국가에는 우대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아베가 말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이란 우리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문재인 정부의 일방적인 ‘위안부 합의’ 파기다.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한국 정부 스스로 징용자들의 개별 청구권을 포기해놓고 이제와서 합의를 지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합의’ 파기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양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으로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문재인 정부가 국가 간 약속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해산한 것을 말한다.

양국 정부가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과 2015년 합의한 위안부 해결 방안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한일관계가 이토록 악화되었는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한일 청구권 협정 회담 시작은 1951년

1965년 12월 18일 오전 10시 36분,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장관이 서울 중앙청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 비준서를 교환했다. 이로써 한일 간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험난했던 여정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회담을 시작한 이래 14년 1개월 28일,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래 60년 만이었다. 교섭이 타결될 때까지 한국에는 3개 정권이 들어서고 일본에는 내각이 13번 바뀌었다.

한일 청구권 협정을 위해 양국 대표가 처음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이었다. 중재자이자 종용자는 미국이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1950년 한국에서 6·25가 발발하는 등 동아시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소련과 중국을 겨냥한 미국 중심의 반공 블록이 절실한데 그러려면 한일관계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뤄진 것이 1951년 10월 20일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중재하에 도쿄에서 열린 한일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이었다. 그러나 예비회담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의 해안에서 평균 60마일 이내의 자연자원·수산물 등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는 ‘평화선’을 선포함으로써 한일관계 정상화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관보(1952.1.18)에 수록된 ‘평화선’ 그림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으로 회담 공전

제1차 본회담은 1952년 2월 15일 시작했다. 한국은 식민지 피점령국 입장에서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청 8개항’을 제시했다. ①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해간 지금·지은의 반환청구 ②1945.8.9 현재 일본정부가 조선총독부에 지고 있는 채무 변제 청구 ③1945.8.9 이후 한국으로부터 이체 또는 송금된 금품의 반환 요구 ④1945.8.9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 재산의 반환청구 ⑤한국법인 또는 한국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국민에 대한 일본 국채, 공채, 일본 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 청구 ⑥한국인(자연인, 법인)의 일본정부 또는 일본인에 대한 개별적 권리행사에 관한 항목 ⑦전기 제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발생한 법정 과실의 반환 청구 ⑧전기한 제재산과 청구권의 반환 및 결제 등이다. 8개항 모두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에 한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유는 후술한다.

그러자 일본도 한국 재산의 85%에 달하는 구 일본인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하는 ‘역(逆)청구권’을 제시했다. 일본 주장에 따르면 1946년 기준 재산 총액은 52억 달러이고 그중 22억 달러가 남한에 있었는데 미군정이 남한 내 일본인 재산을 몰수한 뒤 1948년에 한국 정부로 넘겨줬기 때문에 그것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결국 회담은 2개월 만에 결렬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해석을 미국에 요청했으나 미국은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이때문에 1953년 4월 15일 시작된 제2차 본회담 역시 ‘역청구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제3차 본회담은 1953년 10월 6일 재개되었으나 일본 측 수석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본은 조선에서 36년간 철도를 만들고 항만을 건설하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고 망발을 일삼아 후속 회담에 대한 기약도 없이 또다시 중단되었다. 일본의 고압적 자세가 단적으로 드러난 구보타 망언으로 한일 간의 대립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승만 정권은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무조건 나포하도록 지시하고 일본으로부터 들어오는 밀수품은 강력하게 단속하라는 등 강경한 대일정책을 구사했다.

제4차 회담은 구보타 망언이 있고 5년이 지난 1958년 4월 15일 재개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제시한 8개 항목은 일본에 의해 대부분 거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담은 휴회와 재개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4·19 혁명이 발목을 잡아 회담이 중단되었다.

일본 정부가 징용자 개인에게 배상하겠다는 것을 우리 정부가 거부하고 징용자 대신 돈을 받기로 한 것은 1960년 10월 25일 재개된 제5차 회담 기간 중이었다. 우리 정부가 이런 입장을 밝힌 것은 5차 회담이 진행 중이던 1961년 5월 10일이었다. 당시는 장면 정권이었다. 당시 우리 대표는 “한국 내에서 징용된 자는 (청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나라가 청구한다. 개인에 대하여는 국내에서 조치하겠다”는 입장을 일본에 전했다. 회담은그로부터 6일 후 일어난 5·16 쿠데타로 또다시 중단되는 등 암초투성이의 연속이었다.

일본 외무성 청사에서 열린 제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1958.10.25). 우측이 한국 측 대표이고 서서 악수하는 사람은 유진오 수석대표다.

 

■박정희 정권, 한일 청구권 협정에 팔 걷어부쳐

박정희 정권이 갓 출범했을 때 한국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고 일본은 한참 달아오른 일본의 ‘신무 경기(神武 景氣)’를 이어갈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따라서 양국 모두 국교 정상화가 필요했으나 관련 조약과 협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동상이몽에 빠져있음을 드러냈다.

한국은 일본이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사죄·반성하는 문안이 협정·조약 안에 들어가기를 강력히 원한 반면 일본은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이 부담하게 될 자금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부터 삐걱거렸다. 한국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성격의 청구권 자금을 주장한 반면 일본은 경제협력 자금임을 고집했다.

문제는 회담이 승전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의 후속 협상 형식으로 진행되다보니 우리의 선택지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강화조약 당시 승전국 지위를 얻지 못해 승전국 자격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아닌 피식민지 자격의 재산 청구권만 인정받았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가 1952년 제1회 회담 때 민사상 재산의 반환, 채권의 상환 등 재산청구권 처리의 범주에서 정리한 ‘대일 8개 항 요구’를 제시했던 것이다. 대신 우리 정부는 배상권을 포기하는 대신 금액을 늘리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꿨다. 명분을 접고 실리를 택한 것이다. 일본은 명목을 ‘경제협력’으로 한다면 금액을 늘릴 의사가 있다고 했다.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회담이 재개된 가운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방미 길에 들른 일본에서 11월 12일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나 한일회담의 조속 타결에 합의했다. 그후 박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일본과 담판을 짓도록 했다.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오른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1961년 11월 12일)

 

일본이 독도 문제를 본격 제기한 것은 김종필 중정부장이 박 의장의 특사로 일본에 갔을 때였다. 일본의 고사카 외무장관은 1962년 2월 22일 김종필을 만난 자리에서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고 한국 측이 응소하길 바란다”고 했다. 김종필은 “하찮은 섬 문제를 일본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며 거부했다.

김종필은 1962년 10월 20일 도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장관을 만나 청구권 자금 관련 탐색전을 펼쳤으나 타결을 보지 못한 채 미국으로 건너가 회담의 진척 상황 등을 미 정부에 설명해주었다. 김종필은 미국에서 다시 박 의장의 긴급 훈령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박 의장은 “▲협정 문안에 일본이 주장하는 ‘독립 축하금’이나 ‘경제협력 자금’이 들어가서는 안되고 ▲반드시 ‘청구권’이라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며 ▲일본이 제공해야 할 자금은 총액이 6억 달러 이상이어야 하고 ▲일본이 독도 문제를 제기할 경우 한일회담의 현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라”고 김종필에게 지시했다.

김종필(왼쪽)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 (1962년 11월 12일). 탁자 위에 메모지가 놓여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

김종필은 오히라를 만난 자리에서 “외교적인 기술이나 흥정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고 청구권 금액에 대해 서로가 양보할 수 있는 최저선을 마지막으로 털어놓자”고 제안했다. 오히라도 “서로가 생각하고 있는 금액을 종이에 적어 동시에 교환하자”고 맞장구쳤다. 그 전까지 양국이 따로 제시한 금액은 7억 달러 대 7000만 달러였다. 두 사람은 메모지를 한 장씩 찢어 그 위에다 서로가 최종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액수와 조건을 써서 교환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두 장의 메모를 기초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의 최종 타협안이 만들어지기까지 총 3시간 30분이 걸렸다. 1962년 11월 12일 오후의 일이었다.

한일회담의 밑그림은 이렇게 대충 그려졌으나 박정희는 메모에 ‘청구권’ 문구가 없는 것을 보고 김종필을 질책했다. 결국 회담은 또다시 지연되었다. 그 사이 1963년 10월 16일 대통령선거가 치러져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종필은 1964년 3월 23일 공화당 의장 신분으로 오히라를 다시 만나 “3월 말까지 어업회담을 종결짓고 4월 초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모든 현안을 일괄 타결한 다음 4월 말까지 조약 초안을 작성하고 5월 초에 한일 청구권 협정에 조인한다”는 일정에 합의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 사본 (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굴욕·구걸 외교”라며 협정 반대 시위 전국으로 번져… 이른바 ‘6·3 사태’

이 사실이 3월 24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학생과 야당이 “제2의 을사조약”, “굴욕·구걸 외교”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수천명의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고 주요 도로에는 “굴욕외교 반대”, “김종필 즉각 소환” 등을 외치는 학생·시민들의 함성으로 넘쳐났다.

전국 대도시에서도 가두시위가 벌어져 대구시경과 전남도경은 북한의 공습이 예상될 때 내리는 황색경보까지 발령했다. 3월 24일 하루 동안 280여 명이 연행되고 학생·경찰 등 250여 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시위 규모로는 1960년의 4·19 후 최대였다. 이날부터 대학가와 거리는 최루탄 연기와 곤봉, 널브러진 돌덩이들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

 

박정희 대통령은 사태 확산을 막기 위해 3월 28일 김종필 의장을 일본에서 소환했다. 3월 30일에는 11개 종합대학 총학생회장들을 청와대로 불러 입장을 밝히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부도 3월 31일 38개 대학 학생대표 57명을 만나 2년 전 비밀리에 작성한 ‘김종필·오히라 메모’ 내용을 알려주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일본 정부는 한일회담을 타결짓기도 전에 외교 관례를 어기고 ‘김·오히라 메모’가 외부로 알려진 것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구속력 있는 문서”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우리 정부도 “문서를 공개한 것이 아니고 내용만 알려준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 6월 3일 1만여 명의 대학생이 경찰과 유혈충돌 벌이자 비상 계엄령 선포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 후 사태를 지켜보겠다며 잠시 뒤로 물러났으나 그것은 더 큰 대결을 위한 숨 고르기였다. 그 사이 박 대통령은 5월 9일 정일권을 총리로 한 내각을 발족시켜 학생들의 도전에 대한 응전 채비를 갖춰나갔다. 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에서 더 나아가 군사쿠데타, 부정부패, 정보정치, 매판독점자본, 외세 의존 등 아픈 곳까지 건드리며 박 대통령을 압박했다. 5월 20일 서울대생들이 문리대 교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를 열고 5월 22일 서울시내 30여 개 대학이 ‘굴욕외교 반대 학생 총연합회’를 발족시켜 본격적인 싸움에 시동을 걸었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1964년 5월 20일)

 

싸움이 정점을 이룬 것은 1만여 명의 대학생이 “박정희 군사정권 퇴진하라”고 구호를 외치며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유혈충돌을 벌인 6월 3일이었다. 시위는 급기야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 길목까지 진출하는 등 과격한 양상을 띠었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주한 미 대사와 미 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러 요담한 후 밤 9시40분쯤 “오후 8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을 서울시 일원에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계엄령에 따라 모든 집회가 금지되고 언론·출판은 사전검열을 받았다. 서울시내 각급 학교는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통행금지 시간은 자정에서 밤 9시로 앞당겨지고 3개 사단 병력이 서울시내에 진주했다. 그날 밤 시위는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진압되었다. 계엄령 선포로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5개월 동안 수세에 몰리던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켰다. 야당과 언론, 학생들을 압박하는 주도권도 손에 쥐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1120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되었으나 그해 말까지 모두 풀려났다. 그 중에는 이명박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을 비롯 최장집,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재오 등도 포함되었다.

계엄 발표 다음날인 6월 4일의 서울 세종로 거리 모습.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김종필은 사태를 촉발한 책임을 지고 당 의장직에서 물러나 6월 18일 두 번째 외유길에 올랐다가 6개월 뒤 돌아왔다. 이때의 반정부 시위를 ‘6·3 사태’라 하고 시위를 주도한 세대를 학생운동사에선 ‘6·3 세대’라고 부른다.

 

■한일 청구권 협정, 회담 시작 14년만에 체결

‘6·3 사태’로 중단된 6차 회담은 1964년 12월 3일 7차 회담으로 재개되어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1965년 1월 일본 측 새 수석대표인 다카스키 신이치가 일본 기자들에게 “일본이 20년쯤 더 조선을 갖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져 협상 자체가 중단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카스키 대표가 발언 자체를 부인해 가까스로 협상이 재개되었지만 청구권의 지불과 변제 방법 등 구체적인 사항에 대한 양국 간의 견해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역사는 밤에 요정에서 이뤄졌다. 이동원 당시 외무부 장관이 1965년 2월 17일 일본 각료로는 처음 방한한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장관과 사흘에 걸친 철야회담 끝에 2월 20일 새벽 청운각에서 가까스로 기본조약에 가조인함으로써 한일 청구권 협정이 가닥을 잡게 되었다. 시나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역사는 밤에 이뤄졌다”고 술회했다.

양측은 1965년 4월 3일 도쿄에서 다시 만나 최종적으로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사항’을 타결지었다. 이 회담에서 김·오히라 메모의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의 총액은 3억 달러로 늘어났다. 무상자금 3억 달러는 당시 1달러당 255원 정도였던 원 달러 환율로 계산하면 765억 원으로 1965년 대한민국 예산 848억 원의 90%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유상자금 2억 달러도 대한민국 예산의 60% 규모였다.

 

조인 당일까지도 독도 문제로 실랑이 벌여

조인식은 1965년 6월 22일 오후 일본 총리 관저에서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날 오전까지도 양국은 독도 영유권 문제로 막판 실랑이를 벌였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외교각서에 기록으로 남겨두자고 했고, 우리 측은 독도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독도의 명칭을 거론하지 않고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에 모호하게 기술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명기하려던 일본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 대사,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장관, 다카스키 신이치 수석대표가 도쿄 일본 총리 관저에서 한일 조약·협정에 조인한 것은 1965년 6월 22일 오후 5시였다. 이로써 13년 8개월을 끌어온 한일회담이 마침표를 찍었다.

조약 및 협정은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핵심적인 5개 조약·협정을 포함해 총 29건이었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전문을 수록한 동아일보 호외 (1965년 6월 23일)

 

조인식이 치러진 6월 22일 한국에서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조인 반대”를 외치고 10개 대학 400여 명이 단식농성을 했다.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수천 명의 전학련 학생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8000여 명의 일본 공산당원이 조약안에 반대하며 항의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협정 체결 다음날인 1965년 6월 23일 특별담화를 통해 “지난 수백 년간 일본은 우리 독립을 말살했고, 우리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우리 재산을 착취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그러나 이 각박한 국제사회에서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해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일본 사람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민복리를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라면서 고뇌의 결단이었음을 강조했다.

이후 1965년 8월 14일 우리 국회의 비준동의안 통과에 이어 일본에서도 11월 12일(중의원), 12월 11일(참의원) 비준안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12월 18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일본 측 대표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무장관 등 한·일 양국 관계자들이 서울 중앙청에서 한일기본조약 비준서를 교환함으로써 한일 간 국교 정상화가 마침내 첫발을 내디뎠다.

1965년 12월 18일 중앙청에서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는 이동원 외무장관(왼쪽)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무장관

 

■논란이 된 주요 조문들

한일 협정 당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어디에도 적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 때문에 한일 협정은 협상 때부터 ‘굴욕 외교’라는 거센 비판을 받더니 급기야 1964년 이른바 ‘6·3 사태’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1967년부터 시작될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고 조속한 협상 타결을 주문하는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조약·협정에 서명했다.

또 하나 논란이 된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청구권 협정 즉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배상’ 문구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금 지급’을 약속한 1조와 ‘청구권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을 명기한 2조 사이에 연관성도 부여하지 않았다. 액면 그대로 보면 일본은 대가 없이 돈을 주고 한국은 대가 없이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다. 자금 제공의 명목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보니 한국 정부는 ‘청구권 자금’ ‘사실상의 배상’으로 해석한 반면, 일본 정부는 ‘경제협력 자금’ 또는 ‘독립 축하금’으로 해석하는 아전인수가 빚어졌다.

이에 대해 당시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에 실무자로 참여했던 오재희 전 주일대사는 “일본이 완강히 거부했고,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조약에 명시하려 했다면 도저히 협상이 성립되지 않았다”면서 당시 현실적 한계를 토로했다.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배상’ 문구 담지 못해

청구권 협정과 함께 논의된 한일기본조약 즉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의 문안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은 병합조약(1910년)과 을사조약(1905년)의 불법․무효 여부였다. 한국은 “병합조약과 을사조약 등은 처음부터 불법·무효이므로 일제의 식민지배 역시 불법이고 무효”라고 주장했으나 일본은 “두 조약 모두 한국 측에서 자발적으로 서명을 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무효가 아니므로 일본에 의한 보호통치(1905~1910년)와 식민지 지배(1910~1945년)는 모두 유효하다”고 맞섰다. 두 조약이 무효라면 한국은 일본에 배상을 요청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배상을 요구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제국주의 본국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던 경우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사본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양국 정부는 팽팽히 맞서다가 묘안을 찾아냈다. 조문 속에 ‘이미(already·もはや)’라는 단어를 넣어 이 단어를 통해 양국 정부가 각각 자국의 입맛대로 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확정된 조문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였다. 언제부터 무효인지 시기를 특정하지 않다보니 한국 정부는 병합조약이 맺어지는 순간부터 무효로, 일본 정부는 일본 제국이 해체되는 1945년부터 무효로 해석했다.

이렇게 각자 다르게 해석하니까 일본은 배상금 대신 ‘독립 축하금’을 준 것이고, 한국은 ‘청구권 자금’이라고 명명하면서 배상금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이미’란 단어를 통해 양국은 영원히 공통의 이해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난 식민지배에 대한 성격 규정이라는 난제를 피해갔다.

 

노무현 정부도 ‘징용 피해자 보상은 청구권 협정에 포함된다’ 결론

청구권 협정 2조도 훗날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제2조 1항에는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했다.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에도 ‘대일 청구 요강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최종 해결됐다’고 명시했다. 즉 합의의사록 2항 (g)에는 청구 범위가 ‘한국의 대일 청구 요강’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승만 정부가 회담 초기 일본에 요구했던 8개항의 ‘대일 청구권 요강’ ⑤항에는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청구권의 변제청구’가 포함되어 있다. 이 문구 때문에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때 발족한 ‘한일회담 문서공개 민관공동위원회’에서도 할 수 없이 ‘징용 피해자 보상은 청구권 협정에 포함됐다’고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일본 정부는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가 이 조항으로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반면 우리 대법원은 ‘개인청구권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판결하고 문재인 정부는 대법원의 판결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또 하나 훗날 논란이 된 것은 불과 3년간 점령당한 필리핀이 일본에서 5억5000만 달러를 받아낸 것에 비하면 우리가 지나치게 적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일협정에 관한 한 국내외 최고 권위자인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필리핀, 베트남 등은 연합국 일원으로서 배상받았으나 한국은 승전국 지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반공 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의 위신을 고려해 전승국 지위를 한때나마 검토했으나 영국이 집요하게 반대했다. 모택동의 중국을 일찍이 승인한 영국은 자유중국(대만)과 한국을 조약 서명국으로 인정하는 걸 반대했다. 미·영의 협의 끝에 중국과 한국이 제외됐다. 결국 한국은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으로 규정되어 협상 출발점부터 배상을 요구할 법적 권리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양국 간 재산 및 청구권을 ‘특별 조정’하는 걸로 되었다.”

 

■대일 청구권 자금 사용

한일 청구권 협정 조인 후 우리나라에서 당장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일본이 약속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청구권 자금이 우리 손에 들어오고 또 그 자금을 집행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숱한 논란을 거쳐야 했다. 청구권 자금은 한일기본조약 발효일인 1965년 12월 18일부터 1975년 12월 17일까지 10년 동안 연차적으로 도입되었다.

자금 운용에 대한 논의는 1965년 11월 27일 정부가 외자 5억 3800만 달러, 내자 738억 원 규모의 청구권 자금 사용방안을 최종 확정·발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정부안은 ▲농수산, 중소기업 및 사회간접자본 등에 중점을 둔다 ▲제2차 5개년 계획과 보조를 같이하여 자금을 사용한다 ▲국내 생산이 가능한 물자는 일절 도입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기본방침 아래 짜였다. 1966년 2월 12일, 국회가 ‘청구권 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제정함으로써 법적인 근거도 마련되었다.

청구권 자금 사용처를 배분하는 과정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개인에 대한 배상과 보상이었다. 한일 청구권 협정 협상 시 일본 측은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되면 일본법에 따라 개인 베이스로 지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돈도 적게 들고 국교 정상화도 빨리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반면 한국 대표단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국내 문제이므로 한국 내에서 알아서 할 것”이라는 입장을 제시했다.

결국 개인 배상은 “일제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일본 정부에 별도로 묻지 않겠다”고 우리 정부가 확약해줌으로써 일본 정부는 한국 피해자 개인에 대한 배상 및 보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개인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받으려면 증거 확보나 법률적 지식면에서 불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 우리 정부의 설명이었지만 실은 정부가 목돈을 쥐려 한 게 더 큰 이유였다. 개인 보상 합의는 오랫동안 개인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없게 한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박정희 정부, 민간 보상 차일피일 미뤄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개인에 대한 보상 의무가 일본에서 우리 정부로 넘겨졌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야 했으나 정부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다가 ‘민간인 보유 대일 청구권 관계 재산에 대한 보상조치법안’을 마련해 1966년 3월 국회에 넘겼다. 민간인이 일본의 금융기관 등에 예치했던 예금이나 일본 정부가 발행한 국채, 지방채, 보증사채 등에 대한 보상을 규정한 법안이었다.

그러나 쌀 1가마가 32원하던 해방 당시의 100원을 20년이나 흘렀는데도 78원으로 보상하고, 징용자와 전사자 등에 대한 보상은 하지 않는 등 내용이 극히 형식적인 것으로 알려지자 보상 대상자들이 “차라리 보상하지 말라”며 크게 반발했다. 결국 법안은 본격적인 검토도 없이 국회 재경위에서만 설왕설래하다 1967년 6월, 6대 국회 폐회와 함께 폐기되었다.

정부가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만 정신이 팔려 골치 아픈 민간 보상은 차일피일 미루자 참다 못한 대상자들이 1968년 3월, 1만1000여 명의 연서로 된 탄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69년 9월 정부가 ‘대일 민간 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안’을 제정해 “대일 민간 청구권의 신고를 받겠다”고 발표함으로써 다시 보상 대상자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이 법률안 역시 경제장관회의에서 4번, 국무회의에서 3번이나 보류된 끝에 1970년 6월에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미 보상 대상자들의 관심은 멀어질 대로 멀어진 뒤였다.

정부는 1971년 3월 ‘신고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공포해 1971년 5월 21일부터 1972년 3월 20일까지 대상자 신고를 받았다. 10개월 동안 신고 접수 결과, 신고건수 14만1803건에 신고금액은 39억465만3549엔이었다. 사망자는 1만852명에 달했다. 이들 중 약 10%는 증명 부실, 미확인, 보상금 수령자격 미비 등으로 보상불가 판정을 받았다.

보상비율을 결정하는 일만 남았으나 이것도 2년 9개월여나 걸렸다. ‘대일 민간 청구권 보상에 관한 법률’은 1974년 9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74년 12월 국회에서 제정되었다. 법안에 따르면 징용 사망자는 1인당 30만 원을 일시에 전액 지불하고, 재산 보상비는 1945년 기준 30배로 하되 30만 원까지는 1975년도에 지불하며 그 이상은 1976년도부터 3년 동안 분할 상환하는 채권으로 주도록 했다.

징용자들의 청구권 신고 접수증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징용자들 보상액 적어 분통 터졌으나 유신 독재 시대여서 하소연하지 못해

정부 발표를 접한 보상 대상자들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심정이었다. 이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나 이미 정해진 정부 방침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보상액은 정부가 일본에서 무상으로 들여온 3억 달러 어치의 자본재와 원자재를 팔아 그중 일부로 충당했다. 무상자금 3억 달러와 유상 자금 2억 달러는 농림수산 부문, 어선 도입 등에도 투입되었지만 원자재 도입, 광공업 육성, 포항제철·소양강다목적댐 건설 등 제조업 건설이나 사회간접자본 등 경제기반 시설 확보에 쓰였다.

개인 보상은 1975년 7월 1일부터 1977년 6월 30일까지 2년간 이뤄줘 총 91억8700만 원이 지급되었다. 이 금액은 무상 3억 달러의 약 9.7%에 해당한다. 금융 피해에 대한 재산보상은 7만4967건에 66억2000만 원(1인당 평균 8만8300원), 징용 사망자 8552명에 대해서는 1인당 30만 원씩 총 25억6000만 원이 지급되었다. 부상자와 생존자에 대한 피해 배상이나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1975년 현재 쌀 1가마에 2만 원 정도였으므로 징용 사망자는 15가마의 쌀을 받은 셈이다. 보상액이 적어 분통이 터졌으나 당시는 유신 독재 시대여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한일 청구권 협정> 빛과 그림자 ②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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