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재즈 황제 루이 암스트롱 사망

재즈(Jazz)의 고향은 미 남부의 뉴올리언즈다. 때문에 재즈에서는 18∼19세기 이 지역 흑인 노예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나온다. 이 곳 태생의 루이 암스트롱에게 뉴올리언즈의 공기는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았다. 재즈는 그에게 운명이었다. 11세 때 소년원 신세를 져야했던 암스트롱은 그 안에서 코넷을 배워 재즈와 첫 인연을 맺었고, 트럼펫을 익혀 연주인생을 열었다. 트럼펫을 배우기 위해 칼로 입술을 찢었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그는 재즈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고 해군기지였던 뉴올리언즈의 홍등가가 폐쇄되면서 암스트롱이 활동하던 뉴올리언즈에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암스트롱을 비롯한 음악가들은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올라가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뉴욕 등지로 흩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남부의 흑인들이 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북부의 여러 도시로 그들의 문화와 함께 거처를 옮긴 것도 재즈의 미국화를 촉진시켰다. 암스트롱은 노래를 부르면서 트럼펫을 연주했다. 때로는 작곡과 영화계를 넘나들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즉흥적으로 농을 건네면 관객들은 그의 몸짓·농짓에 즐거워했다. 흥얼거리는 ‘스켓 창법’을 구사하게 된 것도 음반녹음 중 악보를 떨어뜨려 가사 대신에 흥얼거린데서 시작된 즉흥적인 창법이었다.

암스트롱은 두터운 입술 때문에 붙여진 애칭 ‘사치모'(Satchmo·Satchel mouth)’로 불리며 서서히 ‘재즈 황제’로 군림했다. 1964년 비틀스가 미국에 상륙, 광풍에 가까운 인기를 누렸을 때도 63세 암스트롱의 ‘헬로, 달리(Hello, Dolly)’는 그들의 열기를 밀어내고 빌보트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971년 7월 6일, 75세로 눈을 감았지만 비틀스에 밀리고 전통적인 의미의 재즈가 시들해질 무렵이었던 터라 암스트롱에는 차라리 편안한 죽음이었다. 문화의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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