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연세대생 이한열, 교내에서 시위 벌이다가 최루탄 맞고 사망

1987년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해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고문을 받다 숨지고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발표가 이어지면서 전국이 들끓었다. 이런 와중에 5월 18일 터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조작됐다’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는 5공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일거에 표출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5월 27일 야당과 재야세력이 총결집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면서 “4·13호헌조치 무효” “직선제 관철” “박종철군 사건 진상규명” 등 국민들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운동본부가 주관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은 교내에서 열린 ‘6·10 대회를 위한 연세인 총 결의대회’를 마치고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오후 5시쯤 최루탄을 쏘며 달려드는 경찰에 쫓겨 학교 안쪽으로 달리다 SY44 최루탄에 직격으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다.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예측불허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마침내 다가온 6월 10일.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외침이 전국에 메아리쳤다. 이날 하루동안 시위현장에서 연행된 사람 수만 3831명에 달했다. 화염병과 투석으로 21곳의 공공시설이 부숴졌고 수백명의 경찰과 시민들이 다쳤다. 날이 갈수록 시위는 격렬해지고 참여 계층도 다양해졌다. 화이트컬러인 ‘넥타이 부대’까지 시위에 가담하면서 시위는 ‘6월 항쟁’으로 폭발했다. ‘6·10대회’를 계기로 분출된 민주화요구 시위는 전국에서 100여 만 명이 참가하고 3400여 명이 연행된 ‘6·26 평화대행진’에서 정점을 이뤘다. 결국 5공 정권이 ‘6·29 선언’으로 항복함으로써 이 땅에는 비로소 참된 민주주의가 만개했다. 그러나 이한열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새 세상을 보지 못하고 7월 5일 눈을 감았다. 7월 9일 100만 명의 시민들이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이한열군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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