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포항종합제철 준공

1973년 6월 9일 이른 아침부터 박태준 사장과 직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고로(용광로) 아래 출선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날 태양열로 채화한 원화(元火)로 박 사장이 점화로에 불을 지핀지 21시간이 지난 이날 오전 7시반, 이윽고 출선구가 열리면서 밝은 오렌지색 섬광이 몇미터 쯤 치솟는가 싶더니 용암처럼 시뻘건 쇳물이 힘차게 흘러나왔다. 마침내 우리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일관(一貫)제철소 고로에서 쇳물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 4월 착공 이래 3년 3개월간을 기다려온 그 순간, 박 사장과 직원들은 너나없이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사람도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서 바닷바람과 싸우며 전쟁같은 작업을 벌인 지 5년,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방미 때 미국의 제철공장을 둘러보고 제철소를 구상한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면 7년 만이었다.

공사비 만 1215억 원,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의 3배나 되는 엄청난 금액이었고, 단일사업으로는 단군 이래 가장 큰 대역사였다. 준공식은 1개월이 지난 7월 3일 오후2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포항제철은 준공 첫 해에 40여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이후 세계적인 석유 파동과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십 년 연속 흑자 경영이라는 세계 철강업계 초유의 기록을 시현했다. 박태준에 대한 찬사가 전 세계에서 끊이지 않았다. 1968년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조사팀의 일원으로 방한해 당시 한국의 종합제철사업 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냈던 IBRD의 한 조사원은 1988년 방한했을 때 “당시의 우리 판단은 모든 점에서 타당했으나 단 한가지 박태준의 존재를 간과한 것이 유일한 잘못이었다”라고 술회했다.

1978년 8월 일본을 방문한 등소평이 일본의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철과 같은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때 신일본제철 회장이 “중국에는 박태준과 같은 인물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답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세계 철강업계는 한때 박태준을 가리켜 ‘미러클 메이커’라고 지칭하며 포철의 성공 사례를 케이스 스터디로 연구했다. 1991년 11월 일본 미쓰비시 종합연구소의 보고서와 1992년 5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만든 보고서 역시 박태준의 탁월한 리더십을 포철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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