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6·25 개전 후 첫 美 지상군 부산 도착

북한의 남침이 미국에 알려져 대책 마련을 위한 첫 국가안보회의가 열린 것은 1950년 6월 25일 오후7시45분(미 워싱턴 시각) 쯤이었다. 안보회의의 주된 관심사는 소련이 전면적인 공격에 앞서 전초전을 일으킨 것인지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전초전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미국은 한국전 개입을 결정했다. 그러면서도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참전을 결정한 미국은 도쿄에 주둔하고 있는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를 전황파악차 한국으로 파견했다. 6월 29일 수원에서 한․미 지휘관들과 회의를 주재하던 맥아더는 그를 일본에서부터 호위해 온 F-15기와 북한군의 야크-9기가 자신의 눈앞에서 공중전을 벌일 정도로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6월 30일 트루먼이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자 맥아더는 먼저 일본에 주둔 중이던 제24사단 21연대를 파견했다.

대대장의 이름을 따 ‘스미스 부대’로 불린 제21연대 제1대대가 군용기에 실려 부산에 도착한 것은 7월 1일 오전8시45분이었다. 최초의 미 지상군 부대였고 본격적인 참전의 시작이었다. 대전을 거쳐 북상한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맞딱뜨린 것은 7월 5일 오산 부근 죽미령 부근이었다. 하지만 첫 전투는 북한군을 과소평가한 탓에 완벽한 패배를 맛봐야 했다. 540여 명의 부대원 중 150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했다. 3년 간의 전쟁기간 중 3만 3870여명이나 되는 미국의 젊은이가 먼 이국 땅에서 이렇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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