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유엔 안보리, 한국전 참전 결의

1950년 6월 24일 밤10시 30분(한국 시각 25일 오전 7시 30분), 장면 주미 대사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남침했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전화였다. 무초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린지 1시간이 지난 뒤였다. 장면은 곧바로 미 국무부로 달려가 딘 러스크 극동담당 차관보를 만나 한국 사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기로 하고 미국의 지원문제에 관해 협의했다. 애치슨 국무장관도 토요일이라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시 남침 사실을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 발발 7시간 만이었다. 국무부 유엔담당도 취침중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화로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25일 오후 2시, 유엔 안보리가 긴급소집됐다. 전례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였다. 연설 기회를 얻은 장면 대사는 “유엔 승인을 얻은 대한민국은 북한군의 불법공격을 받고 있다. 국제평화·안보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라며 지원을 호소했다. 곧이어 안보리가 “북한군은 전쟁을 중지하고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라” “유엔 회원국은 북한에 일체의 원조를 하지말라”는 미국의 결의안을 9대0으로 통과시켰다.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날 저녁 7시 45분,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여부를 결정하게 될 미국의 첫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한결같이 믿었다. 우선 북한의 남침이 미국의 봉쇄선상에서 소련의 전면적인 공격의 전초전인지를 판단하는 일이 급선무였던 미국은 소련의 의중을 조사했고 그 결과 전면전을 위한 전초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한국전 개입을 결정했다.

트루먼은 27일 낮 해군과 공군을 한국에 파병한다고 발표했다. 25일의 유엔 안보리 결의에도 북한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27일 474차 유엔 안보리가 재차 소집됐다. 밤 11시30분,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7대1로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 승인했다. 그리고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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