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남도 답사 첫 번째 길>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 흔적을 찾아 떠난 전남 강진에서 봄비에 젖은 신록을 만끽했다

↑ 다산초당. 봄비가 적시고 있다.

 

by 김지지

 

전남 강진 땅은 태어나 처음이다. 2019년 4월 28일 오후였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강진 땅으로 진입했을 때 먼저 나를 반겨 맞은 것은 수려한 산세를 뽐내는 월출산이었다. 월출산을 경계로 강진은 동남쪽에, 영암은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월출산 아래 너른 벌판이 온통 노란 색이다. 다가가 보니 만발한 유채꽃이 진노랑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제1회 월출산 유채꽃 축제>였다. 생각지도 않은 유채꽃 군락을 보는 순간 횡재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제주도에서 본 유채꽃밭보다 넓게 보여 장관이었다. 유채꽃밭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폼을 잡고 사진을 찍느라 그날 일정에 차질이 생겼지만 눈이 호사를 누렸으면 된 거 아닌가. 유채꽃 색은 석양으로 생긴 바로 뒤편의 월출산의 그늘과 대비되어 더욱 화려하고 고왔다. 유채꽃밭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강진읍내로 차를 몰았다.

월출산 아래 너른 벌판이 온통 진노랑의 유채꽃이다.

 

강진에서 먼저 찾아간 곳은 ‘영랑생가’

강진 땅에서 정약용을 피할 수는 없다. 정약용의 18년 유배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먼저 영랑의 생가를 찾아갔다. 영랑은 시문학파에 속하는 시인 김윤식의 호다. 영랑생가 입구에 자리잡은 시문학파 기념관에 들어가려 했으나 오후 6시가 지나 문을 닫은 터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대신 바로 옆에 조성한 세계모란공원과 영랑생가를 둘러보았다.

세계모란공원에서는 우리나라 모란은 물론 세계 8개국의 모란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내 생활공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자주색 모란꽃이 곳곳에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실내 원예관으로 꾸며놓은 사계절모란공원에서는 다양한 식물과 꽃들이 만개한 모습으로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모란의 개화 시기는 지역적으로 다소 다르지만 4월 말~5월 중순이다. 꽃망울을 터뜨린 후 화려함을 뽐내다가 질 때까지 대략 20일쯤 걸린다. 색상은 분홍색·자주색·엷은 붉은색·흰색·황색 등 다양하나 우리나라 모란의 주종은 자주색이다. 풍수에서는 “뭇 꽃의 으뜸이자 부귀의 꽃”이라고 해 최고로 여긴다. 건강과 장수도 가져다준다고 해 옛사람들은 모란을 심을 수 없으면 집 안에 한 폭의 모란화를 걸어두었다.

모란공원 곳곳에 영랑의 시를 소개하는 석조 시비(詩碑)가 많으나 디자인 측면에서는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하다. 전국 지자체마다 유적지를 관광상품화 하기위해 거액을 들여 복구하고 있으나 대부분 조악하니 답답할 뿐이다.

다행히 영랑생가는 비교적 세련되게 잘 꾸며져있다. 동산 중턱 양지바른 쪽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터에 본채와 사랑채가 널찍이 자리잡고 있다. 화단에는 모란꽃이 많고 뒷담 쪽으로 대밭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여남은 그루의 동백나무 고목은 그윽한 남도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영랑생가(왼쪽)와 세계모란공원에 놓여 있는 영랑의 조각상

 

영랑 김윤식(1903~1950)은 강진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휘문의숙에 다니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4·4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정지용·이하윤·변영로·신석정 등과 우리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 1934년 3월 시문학지 제3호에 불후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하고 ‘영랑시집’(1935년)과 ‘영랑시선’(1936년)을 출간했다. 1950년 9월 서울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87편의 시를 남겼다.

 

정약용의 유배지에 스토리 입혀 관광상품화한 것은 잘한 일

이제 본격적으로 정약용(1762~1836)의 유배 흔적을 찾아나설 때다. 정약용이 강진에서만 산 기간은 18년(1801~1818)이다. 강진군은 그것에 스토리를 입혀 관광상품화했다. 마땅히 잘한 일이다.

정약용은 경기도 광주 마현(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30대에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수원성을 쌓는 용도로 거중기 등을 발명해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젊은 시절 천주학 책을 읽고 연구했던 게 화근이 되어 시련이 닥쳤다. 집안에는 형님과 매형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많았다. 이런 배경은 결국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약용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되었다.

다산초당에 놓여있는 정약용의 초상화(왼쪽, 출처 강진군청). 오른쪽은 장우성 화백이 1974년 그린 표준영정이다.

 

그는 천주학과의 인연을 끊은 상태였으나 상황이 악화되자 1800년 봄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후원자였던 정조가 그해 6월 승하하면서 정약용은 1801년 2월 경상도 포항의 장기로 유배되었다. 집안도 천주교에 연루되어 풍비박산이 났다.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인 매형 이승훈, 형 정약종, ‘황사영 백서사건’의 당사자인 조카사위 황사영, 2명의 조카가 1801년 같은 해에 참수되었다. 다행히 정약용과 둘째형 정약전은 목숨을 부지해 정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낙담해 하고 있을 때 주막 노파가 골방 하나를 제공해

정약용이 낯설고 물설은 강진에 도착한 것은 1801년 11월 23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라에서 금한 사학(邪學) 죄인이라고 해 정약용과 말도 섞지 않았다. 정약용의 ‘다산신계’에는 “처음 왔을 때는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편안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참한 심정으로 낙담해 하고 있을 때 동문 밖 주막 노파가 골방 하나를 제공했다. 정약용은 1805년 여름까지 4년간 그곳에 기거하던 중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 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한 뒤 1804년 자신의 골방 당호를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라는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고 붙였다. 네 가지는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이다.

정약용이 4년간 기거한 ‘사의재’. 오른쪽 동상은 그에게 거처를 제공한 주모 조각상이다.

 

강진읍내 군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사의재를 찾아간 것은 강진읍에 숙소를 정하고 느지막이 저녁을 해결한 뒤였다. 사의재는 말끔하게 단장된 모습이었다. 강진군이 고증을 거쳐 2007년 초여름 복원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1802년 10월부터 유배지의 첫 제자인 황상을 비롯해 강진읍 6제자를 가르쳤다. 당대 최고 권위의 학당이 유배지에 세워진 것이다. 정약용은 훗날 “강진에 귀양오기를 참 잘 했다. 강진이 내 고향 땅 아니란 말 나는 믿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토로할 만큼 강진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다산초당’에 10여 년간 머물며 저술과 제자 양성에 매달려

정약용은 1805년 겨울부터는 1년 가까이 보은산 고성사 내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머물렀다. 이곳에서도 계속 제자를 가르치고 52편의 시를 쓰고 저술에 몰두했다. 강진 차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보은산방 뒤쪽으로 30분쯤 산길을 올라가면 시야가 탁 트이는 곳이 나온다. 탐진강과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우두봉(牛頭峰·439m)’이다. 정약용은 이 봉우리에 자주 올라가 심신을 달랬다. 때로는 둘째 형 정약전이 귀양가 있던 흑산도 쪽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정약용은 1806년 가을 강진읍 6제자 중 막내인 이학래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2년 가까이 교육과 연구에 정진하며 실학 연구의 토대를 더욱 굳건히 했다. 1808년 봄에는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뒷산인 만덕산(412m) 기슭에 자리잡은 초당으로 옮겨 저술과 제자 양성에 매달렸다. 훗날 ‘다산초당’으로 불리게 될 이 초당에서는 1818년 유배에서 해제될 때까지 10여 년을 머물렀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불후의 명저 ‘목민심서’를 비롯 600여권을 저술했다.

다산초당(출처 강진군청)

 

다산초당로 올라가는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다산초당으로 올라갔다. 만일 다산초당 입구 주차장이 만석이면 아래쪽 다산박물관에 주차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10~20분 더 걸린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주세요’라고 쓰여있는 노란색의 현수막을 고즈넉한 산속에 크게 걸어놓아 산림 경관을 망치고 있다. 문화재를 지키자면서 자연 경관을 망치는 데는 선수인 이런 공무원들의 무지는 언제쯤 끝나려나.

‘소중한 문화재 지켜주세요’ 현수막. 문화재를 지키자면서 자연 경관은 망치고 있다. 공무원들의 이런 무지는 전국 곳곳에서 발견된다.

 

초가집이던 다산초당을 기와집으로 복원하니 유배지 삶 느껴지지 않아

다산초당으로 가려면 소나무 산길을 300m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중간에 수백년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있다. 시인 정호승은 그 모습을 보고 ‘뿌리의 길’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이른바 ‘뿌리의 길’을 조금 지나니 펑퍼짐한 곳에 윤종진의 무덤이 나온다. 그는 정약용이 양성한 18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고 그의 부친은 정약용을 강진읍내에서 다산초당으로 모셔온 분이다. 윤종진은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간 뒤에도 정약용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다산계를 조직해 평생 차를 만들어 보냈다. 이런 인연을 근거로 그의 후손들이 윤종진의 묘를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만들고 이 때문에 다산초당을 찾아온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게 되니 참으로 영특한 후손들이다.

마지막 가파른 길을 오르니 곧 다산초당이 나오고 그 주변에 서암과 동암과 연지(蓮池)가 있다. 다산초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지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초당의 원래 모습은 초가집이었다. 이것이 무너져 폐가가 된 것을 1958년에 기와지붕으로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유배지의 간난한 삶을 상상하는 게 어렵게 되었다.

초당 서편 뒤쪽에는 정약용이 직접 ‘丁石’이라고 쓰고 깊게 새긴 정석바위도 있다. 서암은 18명의 제자들이 기거하던 곳이고 동암은 정약용이 2000여 권의 책과 함께 기거하며 손님을 맞은 곳이다. 목민심서를 완성한 곳도 동암이다.

 

‘다산동암(茶山東菴)’ 현판에서 보듯이 정약용은 명필

‘다산초당(茶山艸堂)’ 현판은 천하명필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菴)’ 현판은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다산동암’ 현판 옆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편액이 있는데 이 글씨는 김정희가 직접 쓴 글이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거나 혹은 사후 그의 제자들이 김정희에게 부탁해서 쓴 글로 보인다.

정약용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茶山東菴)’ 현판. 옆의 ‘보정산방(寶丁山房)’ 편액은 김정희의 글씨다.

 

‘다산동암(茶山東菴)’ 현판에서 보듯이 정약용은 명필이다. 유홍준은 “해서건 초서건 획이 정확하고 붓을 들어올리고 내리면서 강약의 리듬을 잘 맞추어 글씨의 흐름이 겉멋으로 기울거나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다. 멋을 부렸음에도 그 멋이 단아한 규율과 법도에 꼭 들어맞는 한에서만 구사했던 것이니 이것은 보통 경지로는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정약용의 글씨에서는 해맑은 느낌이 마치 천고의 무공해 글씨체 같기도 하고 술에 곯아떨어진 다음날 아침 밥상에 나온 북어국 백반 같기도 하다”고 평했다.

‘연지’에는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소박한 모습의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 있다. 정약용은 원래 있던 작은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했다.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연지(출처 강진군청)

 

동암에서 조금 올라가면 천일각이 나온다. 정약용 유배시에는 천일각 건물은 없었지만 정약용은 그 천일각 자리에 올라 멀리 강진만을 내려다보며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랬을 것이다. 결국 정약전은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1816년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산초당~백련사 길, 호젓하고 멋져

다산초당에서 1.1㎞ 걸어가면 백년사가 나온다. 길은 호젓하고 멋지다. 등산길이라기보다 산책길에 가까운 이 오솔길을 통해 정약용은 서로간에 인간적·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던 백련사 혜장 스님을 만나러 갔다.

그 길을 600m 쯤 가다가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100m 정도 들어가면 ‘바다 위에 뜬 달’이라는 ‘해월루(海月樓)’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강진만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최근에 건립한 것이기 때문에 정약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나 다만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를 수없이 넘나들다가 잠시 쉬었다가 갔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산책길(왼쪽)과 간단한 약도 그림(가운데). 오른쪽은 ‘뿌리의 길’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찾아가는 오전 내내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산의 경사가 급하지는 않아도 비가 내리는 산길이라 걷는다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것은 행운일 수도 있다. 1년에 몇차례 밖에 없는 봄비를 맞으며 호젓한 오솔길을 걷기 때문이다. 4월 전국에서 싱그럽게 펼쳐지는 연초록의 향연도 봄비를 머금으니 또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산초당에서 1.12㎞ 거리의 백년사로 가는 마지막 굽이를 넘으니 3000평 규모의 동백나무 숲이 좌우로 펼쳐진다.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될 만큼 울창하고 풍성하다. 유홍준은 “동백꽃을 구경할 목적만으로도 백련사를 찾아갈 이유가 충분하다”며 “시기는 탐스러운 꽃송이가 목이 부러지듯 쓰러져 나무 밑 풀밭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상기도 피어있는 꽃송이들이 홍채를 잃지 않은 3월 중순께가 좋다”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썼다.

백년사 부근의 동백군락(출처 강진군청)

 

사찰 덕분에 전국의 산림 온전히 보전·유지되고 있어

요즘 드는 생각은 사찰 덕분에 전국의 산림이 온전히 보전·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절 주변 산림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정말 손색이 없다. 백련사 안으로 들어가기 전 정면에 커다란 배롱나무가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4월이라 비록 꽃은 피지 않았지만 마치 뱀이 허물을 벗은 모습처럼 매끈한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 색다른 멋을 연출한다.

배롱나무는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것처럼 보여 ‘나무 백일홍’으로도 불리지만 사실은 7~ 9월까지 작은 꽃들이 연속해서 피고 지는 것이다. 또 어느 정도 성장하면 거친 겉껍질을 벗고 반질반질한 얇은 껍질인 채로 겨울을 난다. 주로 붉은색의 꽃이 피지만 흰꽃이 피는 품종인 흰배롱나무도 있다. 약 5m 정도까지 자라며 나무껍질은 연붉은 갈색으로 매끄럽다. 사찰이나 서원에 배롱나무가 많은 까닭은 스님들과 유생들이 ‘마음의 욕망을 다 벗어버리고 공부에 정진하라’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백년사 입구의 배롱나무

 

백년사에서 1㎞ 쯤 내려가면 다산박물관이다. 박물관 밖에는 야외공원인 ‘정약용 말씀의 숲’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지름 30m의 광장에는 높이 3.8m의 정약용의 동상 주위로 정약용의 말씀을 새긴 석조 명언비 49개가 세워져 있다.

‘말씀의 숲’에는 매화와 새를 그린 ‘매조도’가 커다란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아내가 보내준 치마를 오려 장첩(障帖)을 만들어 1813년 7월 14일 딸을 위해 그림과 글씨를 쓴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편편비조 식아정매) /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有烈其芳 惠然其來·유열기방 혜연기래) /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爰止爰棲 樂爾室家(원지원서 락이실가) /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華之旣榮 有賁其實(화지기영 유분기실)>

매화와 새를 그린 ‘매조도’ 원본(오른쪽)과 돌에 새긴 매조도

 

“강진까지 왔는데 가우도를 지나칠 순 없지”

봄비가 점점 세차졌지만 강진까지 왔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가우도를 찾아갔다. 가우도는 강진만에 자리잡은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다. 가우도로 가려면 강진만 서쪽의 망호선착장에서 망호출렁다리(716m)를 이용하거나 동쪽에서는 저두출렁다리를 이용하면 된다. 실제는 철제 다리여서 출렁거림이 없는데도 이름은 출렁다리다. 그래야 관광객을 더 끌어모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망호출렁다리를 이용해 가우도를 다녀오는데 바람이 워낙에 세차 옷이 온통 젖고말았다.

가우도와 망호출렁다리 (출처 강진군청)

 

가우도에는 둘레길 격인 2.5㎞ 길이의 ‘함께海길’이 있다. 흙길과 데크킬로 조성한 길이어서 한 바퀴 돌아도 좋을 듯 싶다. 강진과 작별하면서 강진군이 선정한 ‘강진 12곳’ 중 둘러본 곳을 세보니 영랑생가, 사의재, 다산초당, 백련사, 가우도 5곳이었다. 나머지 7곳은 다음을 기약하며 진도를 향해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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