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은 존재”라는 춘원 李光洙에 대하여

↑ 이광수와 허영숙. 아이는 첫아들 봉근이다. 1928년 모습

 

BY 김지지

 

춘원 이광수(1892~1950) 문학을 오롯이 모은 정본(定本) 전집이 40년 만에 새로 출간된다고 한다. ‘춘원 연구학회’가 내년 춘원 70주기를 맞아 전 30여 권으로 완간할 ‘춘원 이광수 전집’(태학사)이다. 그중 1차분 3권이 최근 첫선을 보였다. 한국 근대문학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선두로 ‘개척자’와 ‘허생전’이 함께 나왔다. 2017년부터 추진된 새 전집은 소설 25권 외에 시와 수필, 논설을 추가해 완간될 예정이다.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비난의 키워드는 ‘민족 반역자’요 ‘친일파’

이광수(1892~1950)에게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비난의 키워드는 ‘민족 반역자’요 ‘친일파’다. 하지만 문학계 일부에서는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인정하면서도 “다면성을 외면하고 친일파라는 족쇄만 채운다면 우리 문학사에 남겨진 이광수의 족적이 형해조차 없어진다”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그런 상처와도 같다. 조선 현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지만 그의 친일로 조선 정신사에 감출 수 없는 흠집을 만든 사람이 이광수”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광수

 

이광수는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였다. 그러나 10살이던 1902년 8월 부모가 콜레라에 걸려 9일 간격을 두고 세상을 떠나 정규 교육은 고사하고 친척 집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2명의 누이동생 중 한 명도 이듬해 죽어 슬픔이 가중되었다. 이광수는 11살 때 입도한 동학에서 서기로 활동하다가 1905년 서울로 상경했다. 13살의 소년인데도 친일단체 일진회가 세운 강습소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1905년 8월 일진회가 주관한 유학생에 뽑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광수는 일본에서 다이세이중학을 거쳐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입학했다. 재학 중 도쿄에 들른 안창호의 강연에 감동하고 톨스토이와 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으며 서구 문예사조에 심취했다. 1909년 12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에 일본어로 쓴 단편소설 ‘사랑인가’를 발표해 유학생들 사이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사랑인가’는 11살 때 고아가 된 조선인 유학생이 고독과 번민 속에서 사랑을 찾다가 일본인 소년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만족할 만한 애정을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한다는 내용 때문에 오늘날까지 친일문학의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10살 때 부모를 여의 친척 집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 해

이광수는 1910년 3월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그해 4월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7월에는 중매결혼을 했는데 훗날 “경솔한 혼인이었다”고 후회했다. 1911년 1월 105인 사건으로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이 투옥되어 대신 학감으로 근무하다가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사직하고 중국 상해로 떠났다.

1914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단체가 발행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가기 위해 상해를 떠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북만주 등지를 거쳐 바이칼호 주변의 치타에 도착했다. 당시 모스크바행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의 설원과 광막한 흥안령을 넘으면서 느낀 대자연의 신비와 경탄은 후일 소설 ‘유정’에 묘사되었다. 1914년 6월 치타에서 교민들이 발행하는 ‘대한인정교보’지의 주필로 잠시 활동했으나 7월 1차대전 발발로 미국행을 포기하고 9월 오산학교로 돌아와 교편을 다시 잡았다. 그러다가 1915년 9월 와세다대 고등예과 문학과에 편입하고 1917년 3월 와세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이던 1916년 12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이광수는 이미 써두었던 원고를 다듬어 서울로 보냈다. 이것이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된 ‘무정’이다. 6월 14일까지 126회로 연재가 끝난 후 1918년 7월 단행본으로 간행된 ‘무정’은 오늘날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한국 현대문학의 효시’로 꼽힌다. 대부분 순우리말로 쓰이고 여주인공을 ‘she’와 ‘he’의 구별 없이 ‘그’라고 표현한 것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식민지 시대에 신소설의 통속화 경향을 극복하고 근대소설의 서사적 속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가 크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의 첫회가 실린 1917년 1월1일자 매일신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적인 보수주의가 지배하던 때라 “조선 고래의 도덕률을 파괴한다”는 비난이 쇄도하고 여학생들로부터는 “박영채를 너무 불쌍하게 만든다”는 항의가 쏟아졌다. ‘무정’은 당시의 얕은 독서층에도 불구하고 1만 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본에서 허영숙 만나자 첫 부인과 이혼하고 청혼

이광수가 허영숙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무정’이 인기리에 연재되고 덕분에 전국적 유명 인사로 떠오른 1917년 3월이었다. 당시 허영숙은 도쿄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어느 날 이광수가 폐병으로 각혈하다 허영숙의 헌신적인 간호를 받고 위기를 넘기면서 둘 간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도쿄에서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갔으나 허영숙이 1918년 7월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이광수도 곧 귀국해 1918년 9월 첫 부인과 이혼하고 다음 달 허영숙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허영숙의 부모는 이혼 경력에 4살 된 아들까지 있는 이광수와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18년 10월 16일 허영숙이 총독부가 시행한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한 뒤 북경으로 사랑의 도피를 감행, 조선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1차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 14개 원칙에 따라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광수는 1918년 12월 홀로 북경에서 도쿄로 건너가 백관수·김도연·서춘·김철수 등 재일 유학생 등과 함께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했다. 뒤이어 1919년 1월 31일 자신이 기초한 조선청년독립단 선언문을 본국에 전하게 한 뒤 자신은 본인이 영역한 영문 선언문을 해외에 전파하기 위해 2월 5일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도쿄에서는 2월 8일 오후 2시 400여 명의 유학생이 도쿄 YMCA 건물에 모여 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민족개조론’ 집필 전까지의 희망은 실력 양성과 독립 기회 추구

이광수는 1919년 8월 21일 상해에서 창간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초대 사장 겸 주필이 되었다.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도 가입, 안창호와 평생에 걸친 긴밀한 사제적·동지적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상해에서 독립운동 관련 일에 매진하고 있을 때 1921년 2월 허영숙이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파문이 일어났다.

왼쪽부터 윤석중·최남선·이광수·마해송· 김을한

 

임시정부가 “허영숙은 일제 앞잡이”라며 체포령을 내리고 안창호도 이광수의 귀국을 만류했으나 이광수는 1921년 2월 먼저 허영숙을 돌려 보내고 3월 말 홀로 귀국하다가 중국 심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도 재판도 받지 않고 불기소 석방되어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을 짐작케 했다. 소설가 박종화는 일기에서 총독부의 신변 보장을 언질 받은 허영숙의 설득 때문에 이광수가 귀순했다고 썼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해에 당도하기 전부터 이광수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2년을 지냈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국내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국의 민심은 3·1 운동 때와 달리 가라앉아 있었고 임시정부는 미주에서 보내오던 자금이 끊겨 재정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는 독립신문의 운영난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의 극심한 내분으로 1920년 6월과 7월 이동휘와 안창호가 잇달아 상해를 떠난 것도 이광수를 절망하게 했다.

이광수는 1921년 5월 서울에서 병원 개업의사로 일하고 있는 허영숙과 결혼했다. 이광수에 대한 억측과 비난이 빗발치듯 일어나자 이광수는 묵묵히 집안에 들어앉아 병을 치료하며 ‘민족개조론’을 집필했다. 1922년 2월에는 흥사단의 국내 지부격인 수양동맹회(1926.1. 수양동우회로 개칭)를 결성, 궁극적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을 펼쳤다.

 

실력양성론은 우리의 실력이 현저하게 모자란다는 뼈아픈 현실인식에서 출발

‘민족개조론’을 집필하기 전까지 이광수의 희망은 조선인의 실력 양성과 독립의 기회 추구였다. 실력양성론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치기에는 우리의 실력이 현저하게 모자란다는 뼈아픈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광수는 실력이 모자라는데도 무모하게 일본과 맞서 싸우는 것은 지도자들의 편협한 자기 만족이자 경거망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국권을 빼앗긴 민족이 실력을 양성한다고 해서 독립의 기회가 빠른 시일 내에 도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보지 않았다.

‘개벽지에 실린 ‘민족개조론’

 

그는 교육과 식산흥업을 통해 힘을 기르고 있으면 국제 정세가 조선에 호의적일 때 비로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선 자체의 실력은 아직 강대하지 않지만 국제적인 힘에 편승하면 약소한 실력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윌슨의 민족주의에 희망을 걸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해온 이광수에게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종결된 것은 큰 충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독립을 얻으려면 자체 실력을 더욱 배양해야 하는데 그가 보기에 상해 임시정부는 통일적인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러시아와 중국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 사이에서는 실력 양성을 통한 독립운동 준비보다는 당장 일본과 맞서 싸우자는 급진적 독립전쟁론이 우세했다. 이렇듯 상해에서 겪은 임시정부의 극심한 내분과 미국·중국·러시아 등지의 독립운동이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하는 모습에서 심한 환멸을 느꼈다.

 

‘민족개조론’에 드러난 그의 관심은 민족 개조를 통한 실력 양성

이런 상황에서 귀국한 이광수는 외부의 힘을 빌려 실현되길 희망했던 조선의 독립 꿈을 접고 예의 실력양성론으로 귀의했다. 하지만 과거의 실력양성론과는 달랐다. 독립을 준비하는 과거의 실력양성운동이 아니라 민족 개조 과정이 전제되어 있는, 단기적이 아니라 장기적 전망으로서의 실력양성론이었다.

이광수는 3·1 운동도 결국 민족적 역량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독립과 국민국가 쟁취에 실패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민족 개조를 통한 실력 양성이 급선무였다. 그는 어떻게든 민족성을 개조해야만 조선의 독립이 국제적 승인 하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1922년 5월 ‘개벽’지에 발표한 ‘민족개조론’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허위·비사회적 이기심·무신(無信)·겁나(怯懦·비겁)·나타(懶惰·게으름)·사회성 결여 등의 민족성을 개조해야 조선인이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족성 개조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냐”고 자문하면서 “50년, 100년, 200년의 영구한 사업”이라고 답해 쉽게 개조할 수 있는 민족성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했다. 우리 민족의 치부를 생생하고도 남김없이 들춰낸 ‘민족개조론’에 대한 반응은 일파만파로 컸다. 이광수의 집에 칼을 든 청년들이 난입하는가 하면 개벽사의 기물을 파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날에도 193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한 이광수의 친일 행적과 결부지어 ‘민족개조론’을 친일 활동의 배경 논리로 간주해 비판하지만 ‘민족개조론’을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논문이 발표된 1922년경의 이광수는 조선의 패망을 슬퍼하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열망했던 갓 서른의 젊은이였다며 ‘민족개조론’은 우리 민족의 잘못된 점을 반성하고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수와 충정이라는 것이다.

집필 중인 이광수

 

조선인을 일본인화 해야 차별이 사라진다고 생각

‘민족개조론’을 발표한 후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이광수를 사회로 끌어낸 것은 동아일보였다. 이광수는 1923년 5월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1924년 8월 김동인·김소월·김안서·전영택·주요한 등과 함께 ‘영대’ 동인으로 참여했다. 1926년 6월에는 영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34세의 나이에 선과생(다른 학교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으로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좀처럼 낫지 않는 폐병 때문에 네 차례나 휴학을 하다 1930년 1월 제적되었다.

언론인으로는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다가 1927년 9월 사임하고 1933년 8월 고향 어른 방응모가 인수한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사이 ‘마의태자’(1927), ‘단종애사’(1929), ‘이순신’(1931), ‘흙’(1933), ‘유정’(1933) 등의 소설을 연이어 발표하며 ‘대문호’로서의 명성을 이어갔다. 1934년, 이광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정신적 스승 안창호가 일제 감옥에 갇히고 장남이 7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것이다. 장남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허영숙은 이듬해 의학공부를 더 하겠다며 세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광수의 친일 행적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중 생활을 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더욱 노골화되었다. 독립의 희망을 상실한 이광수가 선택한 것은 조선인의 일본화였다. 그는 독립의 가능성이 사실상 무망한 상태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것은 조선인을 차별 상태에 영원히 방치하는 잘못된 태도로 보았다. 그는 조선이 독립을 할 수 없는데도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노예나 2등 국민으로 살며 차별을 받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내선일체를 완벽하게 관철하는 것만이 이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감옥에 수감중일 때 모습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이에 대한 실천의 일환으로 수양동우회 사건 보석 출소자들의 사상전향회의(1938.11)를 소집해 회원 전체 이름으로 전향서를 발표하고 남산의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황궁 요배, 일본 국가 제창, 황군 전몰장병을 위한 묵념에도 거리낌 없이 참가했다.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 결성식(1939.5)의 사회를 맡고 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추대(1939.12)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이광수의 친일 행적은 동료 문인들은 물론 전 조선인에게 실망과 분노, 배신감을 안겨 주었다.

1932년 동료 문인들과 함께한 이광수(맨 왼쪽). 그 오른쪽부터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김동환이다.

 

친일 활동은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다른 조선인에게도 창씨개명을 권유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지원병 참가를 독려했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1941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4년 3월에는 경기 양주군 사릉리로 이사해 살다가 해방을 그곳에서 맞았다.

해방 후에는 친일 활동을 반성하기보다는 저서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통해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며 자신을 변호하고 합리화했다. 가족과 지인이 피신을 권고할 때는 “소가 10필이 와서 끌어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목을 베어 종로 네거리에 매달아 정말 친일파가 없어진다면 나의 할 일은 다한 것”이라며 친일 활동을 정당화했다.

1949년 1월 12일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는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오”라며 자신의 친일이 소신이었음을 자신했다. 그런데도 이광수는 반민특위에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6개월 뒤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6·25 발발 후인 1950년 7월 12일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10월 25일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해 자강도 만포군 고개리 중턱에서 차에 탄 채 숨졌다.

북한에 있는 이광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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