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43년 만에 가진 고교 1학년 사은회·반창회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미루지 말고 당장 인생을 즐겨라” “아내를 섬겨라”

↑ 다들 올들어 가장 행복해하는 표정이다.

 

by 김지지

 

그해 3월 초에 국가적으로 특별한 일이 없었으니 1976년 3월 2일이었을 게다. 그날은 전국 공통의 고교 1학년 입학일이었다. 중학교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더 넓게 펼쳐질 고등학교 입학식이었으니 필시 신입생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굳어있었을 것이다.

대광고등학교 전경

 

우리도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서울 신설동 소재 대광고 1학년 7반 교실에 모였지만 내 기억 속에 그날의 풍경은 없다. 다만 오전 8시 무렵, 한 중년 사내가 교탁에 손을 얹고 잔뜩 긴장해 있는 우리에게 무언가 얘기를 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계단식 교실 중간 자리에서 내려다본 중년 사내의 외모는 부드러웠고 말투는 조곤조곤했다. 덕분에 우리들의 긴장감도 조금씩 풀렸을 것이다.

중년 사내 이름은 한상국이었다. 최근에 알게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으나 당시는 그가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상국 선생님과 1학년 7반 60명 학생들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선생님은 입학 첫날 이덕재와 홍명렬을 불러 반장과 부반장으로 임명했다. 고교 학력고사 성적순이었다. 막 입학한 학생들의 특성을 알리 없어 당시는 그런 방식으로 1학년 반장을 정했다.

이화여고의 <유관순기념관>과 함께 전국 고교 중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모교 강당에서(1978년). 왼쪽 하단은 40대 중반의 한상국 선생님 모습

 

한겨울 종로 모임은 반창회 겸 사은회의 출발점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올해 초 현직 고교 교사이자 당시 반장인 덕재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1학년 7반 친구 몇 명과 연락이 되니 얼굴이나 보자고. 해서 5명의 친구들이 종로2가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게 2019년 1월 17일 저녁이었다. 권철신, 이재용, 이종훈, 이덕재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었다. 그동안 다른 4명의 친구들은 최소 한 차례 이상 만난 적은 있지만 덕재는 1979년 1월 고교 졸업 후 정확히 40년 만이었다.

얘기꽃을 피우다보니 자연스럽게 한상국 선생님 얘기가 나왔고 곧 선생님을 한번 뵙자는 쪽으로 발전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은 그동안 동창회 등에서 선생님을 한 두 번 뵀지만 동창회를 한 번도 나가지 않은 나는 지난 40년 간 선생님을 뵌 적이 없다. 1차는 종훈이가 그날 와인회사 대표이사로 승진해 기분좋게 한 턱을 내고 2차는 물 관련 사업을 하는 철신이가 물값(맥주값)을 냈다. 우리는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3월 29일 사당동에서 또 한 차례 만났다. 그 자리에는 방현진, 홍명렬, 이종훈, 이덕재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 참석했다. 그러고보니 명렬이와 현진이도 40년 만이었다. 그 자리에서 반창회 일자를 잠정적으로 정한 뒤 선생님을 만나 최종적으로 확정하기로 했다. 그날도 종훈이가 쐈다. 양잿물이 아니라서 좋았다.

 

사은회-반창회 20일 전 88세 선생님을 미리 찾아뵈 회포 풀다

4월 20일 덕재, 명렬과 내가 경기도 서판교에 사시는 선생님 댁 부근의 한정식집에서 선생님을 뵀다. 역시 40년 만이었다. 보통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며 장구한 세월로 생각하는데 이렇게 40년 만의 만남이 연속적으로 이뤄지니 신기하다. 오랜만에 뵌 선생님의 모습은 과장하지 않고 70대 중후반으로 보일 만큼 정정했다. 그런데 88세시란다. 시력도 청력도 언어 구사도 모든게 완벽했다. 걸음걸이도 마치 소풍가듯이 가볍고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드신다. 학교 다닐 때 모습 그대로여서 길거리에서 봬도 바로 알아볼 정도다. 선생님은 98세까지 사신 어머님의 건강 체질을 물려받았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일화를 들려주시는 데 얼마 전 74세인 제자 딸의 연주회에 참석했는데 제자가 지인들에게 선생님을 친구라고 소개하니 다들 믿더라는 것이다.

사은회를 하기 전 4월 20일 선생님을 미리 찾아뵀다.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선생님이 살아오신 지난날을 한꺼번에 들었다. 우리의 현대사 그 자체였다. 선생님이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학습 진도 나가야 하고 시험도 준비해야 해서 학생들에게 인생과 책과 영화 등의 얘기를 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자  현직 교사인 덕재가 “제가 그런 기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도중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폭력과 구타를 일삼는 다른 선생님 얘기가 나오자 선생님도 학생들을 때리셨다고 했다. 그러자 명렬이가 또 하나의 일화를 기억 속에서 꺼낸다. 자신은 12년간 초중고를 다니며 선생님들께 두어번 맞은 걸로 기억되는데 그 중 한 분이 한상국 선생님이었다며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학기 초에 지각하는 아이들이 생겨 선생님이 “앞으로 지각할 경우 체벌하겠다”고 하셨는데 하필이면 좀처럼 지각을 하지 않는 자신이 지각을 했더란다. 결국 선생님이 원칙대로 체벌을 하셨는데 선생님의 표정에서 자신(명렬)을 때린 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이 느껴져 맞는 자신이 오히려 죄송스러웠다고 했다. 그 이후 선생님은 지각생에게 체벌하는 것을 그만두셨는데 그게 더더욱 죄송스러웠다고 했다. 선생님에 대한 내 기억은 하나 뿐이다. 언젠가 “얘들아 성실하게 살아라. 그러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속으로 나는 “성실하게 사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인데 성공을 조건으로 성실하게 살라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 아니냐”고. 그날 한정식 식사비는 명렬이가 냈다.

 

43년 만에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

43년 만의 1학년 7반 반창회 겸 사은회는 2019년 5월 11일 오후 6시 잠실 근처의 한정식 집에서 열렸다. 60명 중 연락이 되는 25명 중 20명이 참석했다. 1학년 7반이 아닌데도 참석한 친구가 있다. 변호사로 활동하는 윤성한이다. 성한의 말에 따르면 한상국 선생님은 한 번도 자신의 담임을 맡은 적이 없으나 3학년 말에 자신이 모 대학 법대에 4년제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게 신경을 써주신 것이 감사해 선생님에 대한 느낌이 각별하다고 했다. 성한이는 대학 4학년 때 사법고시에 패스했다.

친구들이 마치 고교 1학년 때 선생님의 훈시를 듣는 것 같은 표정으로 선생님 말씀을 경청하고 있다.

 

선생님은 종훈이가 서판교 선생님 댁까지 찾아가 모셔왔다. 종훈이는 선생님께 드릴 와인 세트도 개별적으로 준비했다. 보통 반창회나 사은회라고 하면 3학년 때 같은 반원들끼리 하는게 일반적인데 우리는 신기하게도 1학년 반창회다. 그런데도 20명이나 참석했다는 것은 그만큼 선생님의 인품이 워낙에 훌륭하시고 반장인 덕재의 적극적인 연락 덕분이다.

선생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한 번은 우리보다 선배 기수인 제자들의 반창회 겸 사은회에 참석하셔서 지나가는 말로 동해, 남해, 서해를 여행하고 싶다고 했더니 얼마 안 있어 몇 명의 제자가 계획을 추진해 선생님을 모시고 서울~강릉~부산을 다녀왔단다. 다음 해에는 다른 기수 제자가 연락을 해 와 남해도 여행하셨다. 미국에 거주하는 제자들은 선생님을 미국으로 초청해 미국 여행도 시켜드렸다. 올 5월에 세 기수의 제자들이 마련한 사은회 행사가 있다는 것도 그만큼 선생님을 존경하는 제자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우리 반창회도 선생님을 모신다고 하니 1학년 7반이 아닌데도 동참하고 싶다는 친구들의 연락이 많았다.

 

선생님의 인품과 덕재의 노력 덕에 20명이나 참석해

반창회 겸 사은회는 명렬이가 진행을 맡았다. 명렬이는 모 대학병원 전산 업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20명이 돌아가며 각자 살아온 날들과 근황을 짧게 소개했다. 학창 시절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까불이는 여전히 까불이고 샌님은 여전히 샌님 말투다. 왁자지껄 소리가 음식점 전체에 가득하다. 마치 학창 시절 쉬는 시간에 떠드는 소리같다.

“미루지 말고 당장 인생을 즐겨라” “아내를 섬겨라” 당부하시는 한상국 선생님

 

뒤이어 내가 간단히 정리한 선생님의 88년 삶을 소개했다. 1931년 충남 청양군 남양면 용마리 출생, 1950년 5월 대전고 졸업, 그해 6월 초 서울대 상과 입학이다. 그런데 대학 입학 후 한 달도 안되어 6·25전쟁이 터져 선생님은 1주일 동안 걸어 고향으로 피란가셨다. 고향에서는 2개월 동안 낮에는 충남 보령의 성주산으로 올라가 숨어 있고 밤에는 집으로 내려오는 생활을 하시다가 9·28 서울 수복 후 서울로 올라왔다. 1951년 1·4 후퇴 때 또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 전시연합대학을 다니셨다. 대학은 군 생활 중이던 1954년 말 졸업하셨다.

제대 후 첫 교사 부임지는 지금의 경복고인 경복중으로 1958년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5대 공립학교 교사와 변두리 학교 교사를 교환 근무케 하라는 군사혁명 정부의 정책에 따라 서울 왕십리 광희중으로 전근했다. 1965년 학교를 떠나 일반 회사로 전직했으나 직장 생활이 학교생활과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회사 업무가 마치 재산 많은 사람의 재산을 불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학교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선생님으로 호칭하는데 회사에서는 반말 일색이고 학교에서는 월급을 봉투에 넣어 주는데 회사에서는 그냥 현금으로 지급하니 생리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대광고에 자리가 나 40세이던 1971년 대광고로 부임했다. 당시 고3은 24회였고 고1은 26회였다. 대광고가 미션계 학교여서 선생님은 대광고 부임 후 교회에 다니셨다. 1976년 1학년 7반 담임을 맡으셔서 31회와 첫 인연을 맺으셨다. 선생님은 1997년 대광고에서 정년퇴임했다. 66세에 정년을 맞은 것은 호적상 1932년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슬하에 3명의 따님을 두었는데 막내딸이 덕재의 잠실여고 제자였다. 이어서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약소한 선물인데도 선생님이 즐거워 하신다. 우리가 더 즐겁다.

 

“아내에게 맞서지 말고 무조건 져주고 섬기라”

선생님은 1997년 퇴임 후 사모님과 함께 충청남도 태안에서 새로운 삶을 계획하셨으나 정년 이듬해인 1998년 안타깝게도 사모님이 작고하셔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셨다. 사모님이 떠나시면서 선생님께 주신 마지막 선물은 선생님의 금연이었다. 선생님이 사모님의 쾌유를 빌며 기도를 할 때 뭔가 하나님께 약속을 해야 할 것 같아 금연을 약속했는데 신기하게도 다음날부터 담배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셨다. 하나는 미루지 말고 당장의 인생을 즐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에게 맞서지 말고 무조건 져주고 섬기라는 것이다.

식사 후 밖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나니 한 친구가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려 따로 큰절을 한다. 다른 친구들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끊는 피를 주체하지 못해 패싸움을 하다 고3 때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학교를 그만둔 친구였는데 2차 맥주 자리에서 “왜 큰절을 했느냐”고 물으니 “죄송해서 순간 절을 올리게 됐다”고 했다. 키 순서로 번호가 10번 이내인 한 친구는 졸업 후 10번 안에 있는 친구들을 계속 만나왔는데 그중 벌써 2명이 세상을 떠났다고 소식을 전해주었다. 인생무상이 따로 없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택시로 보내드리고 맥주집에서 또다시 왁자지껄한 시간을 보낸 뒤 각자 취향에 따라 당구장으로 노래방으로 소주집으로 뿔뿔히 헤어졌다. 첫 반창회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2차 맥주집에서. 친구가 좋다 맥주가 좋다. 오른쪽 백발은 누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선생님과 사제 관계 말고 또 다른 인연이 있나 싶어 억지로 생각해봤더니 몇 가지가 떠올랐다. 내 아들이 선생님이 처음 교사 생활을 하신 경복고를 졸업했다는 것과 딸이 현재 선생님이 살고 계신 서판교 지역의 공무원이라는 것과 내 아내가 졸업한 종암동의 서울사대부고 자리가 원래는 선생님이 졸업하신 서울 상대 자리였다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인연을 확장하고 싶은 내 심정을 친구들이여 이해해 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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