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제하 국내 최대 민족운동단체 ‘신간회’ 결성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힘을 합쳐 공개적으로 일제에 대항한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다. 1927년 2월 15일, 회원 250여 명을 포함 100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YMCA에서 창립식이 열렸다. 신간회의 원래 이름은 ‘새로운 한국’을 의미하는 ‘신한회(新韓會)’였으나 일제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 홍명희가 제안한 ‘신간출고목(新幹出古木)’이라는 말에서 따 ‘신간회(新幹會)’로 지어졌다.

신간회 운동의 총본산은 조선일보였다. 초대 회장도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었고, 51명의 간부·발기인 가운데 신석우·안재홍 등 조선일보 출신이 12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권동진·홍명희 등이 1927년 1월에 모임을 처음 논의한 곳도 조선일보 사옥이었다. 조선일보 간부들은 신간회 간부였고, 조선일보 기자들은 신간회 회원이었다. 신간회 발족 전부터 신간회 강령을 단독 보도하는 등 신간회 보도에 열심이었던 조선일보는 결성 후에는 고정란까지 두어 지회설립과 활동상황을 상세히 보도해 총독부가 조선일보를 신간회 기관지로 생각할 정도였다.

한때 전국 140여 곳에 지회가 설치되고 회원수도 4만 여명에 달할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한국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으나 1929년 12월 민중대회 사건을 겪으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운동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반일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작정하고 12월 13일 민중대회 개최를 계획했으나 계획이 탄로나 대회는 무산되고 조병옥·홍명희 등 44명의 신간회 인사와 수 십명의 근우회 간부가 체포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출발 때부터 민족주의 진영에 비해 열세였던 사회주의 진영도 내분을 부추겼다. 신간회를 계급적 투쟁목표를 선명히 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해소론(解消論)’을 내세우며 전체대회를 요구한 것이다. 1931년 5월 15∼16일, 이틀간 신간회 전체대회가 열렸다. 창립 4년 4개월 만에 처음 열린 대회였다. 민족주의 진영은 ‘해소론’을 비판하고 신간회를 계속 존속시킬 생각으로 대회에 임했고 결과도 낙관했다. 하지만 16일의 투표결과는 찬성 43, 반대3, 기권30으로 해소안이 가결됐다. 일제는 ‘해소는 해체와 같다’며 신간회 활동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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