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안창남, 우리 땅 하늘에서 한국인 최초 비행에 성공

우리나라에 비행기가 등장한 건 서울 용산의 조선군 연병장에서 일본인 군인이 공개비행 행사를 펼친 1913년이다. 1917년에는 미국의 민간 비행사 아트 스미스가 수만 인파가 보는 앞에서 멋진 곡예비행을 펼쳤다. 당시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구경하던 사람 중엔 휘문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 학생이던 열일곱 소년 안창남(1900~1930)도 있었다. 안창남은 비행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자동차 운전 기술을 익히고 도쿄 비행기제작소와 오쿠리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기 조종술을 배웠다.

안창남의 이름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월간지 ‘개벽’ 1920년 12월호에 그의 비행 체험기가 실리면서였다. 이후 1921년 5월 제1회 민간비행사 시험에 공동 1등으로 합격하고, 1922년 도쿄-오사카 왕복 우편비행 대회에 참가해 우수상을 차지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일약 ‘민족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후 사람들의 관심은 그가 언제 고국의 하늘을 날 것인가에 모아졌다. 고국방문비행은 1922년 10월 동아일보가 사고(社告)로 그의 고국방문비행을 알리고, 11월 박영효를 위원장으로 하는 안창남 고국방문 비행후원회가 발족하면서 성사됐다.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은 서울 여의도 상공에서 한국인 최초로 역사적인 비행을 시도했다. 날씨가 추워 발전기가 작동하지 않는 악조건 속에서도 안창남은 이틀 전 15분간 시험비행을 가진 터라 자신이 있었다. 안창남은 찬바람이 쌩쌩 부는 허허벌판에서 5만여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1인승 단발쌍엽기 ‘금강호’를 타고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륙했다. 그의 비행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오르자 사람들이 환호하고 열광했다.

비행기는 하늘 높이 날아오른 뒤 남산을 돌아 남대문과 창덕궁, 서대문 독립문 상공을 거쳐 다시 여의도에 착륙했다. 이후 “떴다 안창남. 보아라 엄복동”은 당대의 유행어가 됐다. 엄복동(1892~1951)은 자전거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를 타는 기술을 익혀 1913년과 1923년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 출전해 수많은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한 영웅 같은 인물이었다.

안창남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1924년 자신의 재능인 비행 기술을 민족의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1924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산시성에서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약하며 항일독립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고 항일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0년 4월 2일 산시성에서 비행 훈련을 하던 중 추락, 3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년 전 서울에서 화려한 비행을 하고 홀연히 사라진 뒤 드문드문 근황은 들려왔지만 갑자기 날아든 그의 부음에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잘 죽는다! 잘 간다! 사람값 하는 사람은 다 가누나!”라며 탄식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안창남은 오랫동안 ‘한국인 최초 비행사’로 알려졌으나 이 사실에 수정이 가해진 것은 1992년 우리 공군이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비행사 6명(한장호, 이용선, 이초, 오림하, 장병훈, 이용근)이 안창남보다 1년 정도 먼저 비행사가 된 인물들”이라고 공식 인정하면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 6명을 교관으로 초빙해 1920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임정 한인비행학교’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는 1919년 중국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훗날 중국 군벌 항공대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왈보(1886~1928)이다. 그러나 이 땅의 하늘을 최초로 비행하고 이를 지켜본 한국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준 안창남이야말로 ‘진정한’ 최초 비행사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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