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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의 일본 산책] “오타 줄리아가 유배지 고즈시마(神津島)에만 갇혀 지낸 게 아니다”라는 日 사학자

고즈시마(神津島)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고즈시마(神津島) 주민들은 오타 줄리아가 이 섬에 유배되어 40년간 섬 주민을 상대로 선교하거나 봉사하다가 섬에서 숨진 것을 추념하기 위해 매년 5월 세 번째 주말에 ‘오타 줄리아제’를 연다.

그런데 “오타 줄리아가 고즈시마를 벗어나지 못하고 섬에서만 살다가 생을 마쳤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는 논문을 쓴 젊은 사학자가 있어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구마모토(熊本) 현에 소재한 야쓰시로(八代) 박물관을 찾아갔다. 젊은 사학자는 그곳에 근무하는 도리쓰 료지(鳥津亮二)씨다.

그는 월요일이어서 박물관이 휴관인데도 나를 반갑게 맞으면서 말문을 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대해서 그동안 정확하게 연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2002년 야쓰시로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고니시와 오타 줄리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우도학 연구 제35호>에 수록된 ‘유럽의 사료에 의한 고니시 유키나가·줄리아 오타(아)의 특집호’ 논문이다.

도리스의 논문이 수록된 <우도학 연구 제35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고니시가 처형당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크리스천에 대해서 다소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했었죠. 그런데 1612년 이에야스 측근들의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불신이 폭발, 금교령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크리스천 다이묘 고니시(세례명: 아우쿠스티누스)에 대한 연구를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사는 승리한 자에 의해서 기록되는 것일까. 패장 고니시의 흔적은 일본에서도 오랜 세월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영주로 있었던 우도시(宇土市) 교육위원회에서 도리쓰 료지씨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이 연구 논문은 1588년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고(肥後)국에 입국해서 우도를 거점으로 마시키(益城)·아마쿠사(天草)·야쓰시로(八代)를 다스렸기 때문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그의 활동상황을 정리했습니다. 물론 유럽의 자료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줄리아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에 의해 포로가 되어 히고(肥後)에 온 조선인 포로 중의 한 명입니다. 그 당시 많은 포로 중에서 크리스천으로 생을 마감한 여성이기에 더욱 돋보인 것입니다.”

 

日 사학자가 제시한 근거는 ‘머나먼 까울리(高麗)’ 책

도리쓰씨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연구함과 동시에 오타 줄리아의 생애를 조명해서 논문의 부록으로 실었다. 내가 그의 논문을 나름 열심히 읽었기에 대화가 수월하게 진행됐다.

도리쓰 료지(鳥津亮二) 씨

 

그러나 그에 앞서 그의 반문이 있었다. “이 논문을 어디서 구하셨나요?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 저의 논문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지난 2014년 10월 24일 쓰시마(對馬)에서 극단 와라비좌(座)가 줄리아에 대한 뮤지컬 공연을 했었죠. 그 때 선생의 논문과 저서 ‘소서행장(小西行長)’을 구입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 뮤지컬은 그해 10월 1일 우도에서 첫 공연을 한 후로 오이타(大分)·나가사키(長崎) 등 규슈지역을 순회했었죠.” 그리고 “지금까지 일본에서 많은 책들이 발간되고 뮤지컬 등이 등장했으나, 검증이 안된 부분이 많아서 저는 루이스 데 메디나(Juan G. Ruiz de Medina) 신부의 ‘머나먼 까울리(遙かなる高麗)’ 기록을 근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책은 그 어떤 자료보다도 당시(1566~1784)의 사실이 정확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줄리아의 기록도 팩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역사 전문가의 입장에서 밝힌 것이다.

루이스 데 메디나 신부가 쓴 <머나먼 까울리의> 일본어판 <遙かなる高麗>

 

도리쓰씨는 그가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오타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일본 본토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루이스 메디나 신부의 고백을 제시했다.

<내가 오타 줄리아에 대해서 찾아낸 최후의 기록은 일본발신 1622년 2월 15일(元和 8·1·5)자 프란치스코 파체코 신부의 편지이다. 이 편지의 말미에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추기하고 있다. ‘신앙 때문에 추방된 고려인 오타 줄리아는 지금 오사카에 있다’.>

도리쓰씨는 ‘머나먼 까울리’의 271쪽을 펼치면서 나에게 재차 설명했다. 이 책에는 줄리아에 대한 글 10편이 정확하게 쓰여 있었다.

‘머나먼 까울리’의 원제는 <한국가톨릭 교회 전래의 기원(1566~1784)>이다. 1986년 로마어와 스페인어로 간행돼 대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8년 일본어판이 나왔고 그 이듬해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외국어대 박철 교수가 번역본(서강대출판부)을 냈다. 책의 내용 중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머나먼 까울리>의 원제인 <한국 천주교 전래의 기원> 한글번역본
오타 줄리아의 행방을 알려주는 또 다른 기록들

“하신토 살바네스(H. Salvanez) 신부가 1620년 사람들에게 나가사키 발신으로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그 편지에도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본토에서 생활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리쓰씨는 자신의 논문 91쪽을 펼치면서 ‘줄리아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즈시마에서 나와 나가사키 등에서 활동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고려에서 태어난 줄리아는 로사리오(묵주)를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녀는 성 콘프라디아(Confradia)를 위해 항상 일하고 있었기에 몇 번인가 자신의 집에서 추방되어 이제는 집도 없이 이집 저집 옮겨 다니고 있다.>

성 콘프라디아는 로사리오 기도(묵주를 가지고 묵상하며 하는 기도)를 장려하기 위해 도미니코회 수사들에 의해 창립된 ‘심신회’이다. 이 편지 내용으로 보면 줄리아는 이 단체를 도우면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가를 부르게 한 이유로 봉행소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안효진 씨의 논문 <오타 줄리아의 생애와 영생>에도 나와 있다.

도리쓰씨는 “이후의 줄리아 행방은 프란시스코 파제코(Francisco Pacheco, 1566~1626) 신부의 서간문에 기술돼 있다”고 했다. 파제코 신부는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소속 선교사로 나가사키·오사카·교토에서 포교 활동을 한 인물로 편지를 쓰기 전에 일본 관구장이 됐다. 그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앙을 위해 추방된 고려인 줄리아는 지금 오사카에 있다. 나는 이미 도움을 주었고 할 수 있는 한 그녀를 돕고 있다.>

프란치스코 파제코 신부

 

“줄리아에 대한 기록은 현 단계에서 이것이 마지막 것입니다. 이 기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서 나가사키·오사카 등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리스씨는 줄리아제(祭)을 해마다 열고 있는 고즈시마에서 자신을 심포지엄의 연사로 초청했다고 했다. 내가 질문했다. “저도 과거 고즈시마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포지엄에 참석하셨나요?”

“아니요.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나와 나가사키·오사카 등에서 활동했다고 발언해도 됩니까?’ 라는 한마디에 초청 연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오타 줄리아 그림

 

‘오타 줄리아’ 이름 어원에 대하여

“그동안 줄리아에 대해서 ‘오타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줄리아에 대한 일본 측 자료로 유일한 사료가 있습니다. 일본의 ‘부코우잣키(武功雜記)’입니다. 여기에는 ‘御다아’로 기록돼 있습니다. 메디나 신부의 기록에는 로마자 표기가 ‘Ota’ ‘Vota’였으나 50음의 적용으로 ‘오-다’가 적용된 듯 합니다. 그후 한자로 ‘大田’ 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타의 이름은 이 외에도 ‘조선에서 오타’, ‘얻어온 아이’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도리쓰씨는 ‘줄리아’라는 세례명이 “가장 정확하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오타아일까, 오타일까, 이름일까, 성일까. 확정하고 싶습니다만 어떠한 근거 자료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회의 기록은 일관되게 그녀에 대해 ‘줄리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서 ‘줄리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논문을 읽어보셨겠지만 저 역시 ‘오타아’를 빼고 ‘줄리아’로 통일했습니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업무를 했다.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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