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큰 문제들은 연설과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로써 만 해결되는 것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총리 취임 첫 연설은 ‘철혈(鐵血) 재상’의 등장을 예고했다. ‘연설과 다수결’은 의회주의였고 ‘철과 피’는 산업과 군대였다.
1862년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총리에 취임했을 때 독일은 4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돼 있었다. 자유주의 사상에 반대하고 국가와 군주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비스마르크는 취임 즉시 여론과 의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병력 50만 명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법을 통과시켰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프로이센의 힘을 확대하고 독일에서 주도권을 잡는 일이었다. 군비 확장 덕에 그는 6년 동안 치른 3개 전쟁에서 모두 승리, 덴마크(1864년), 오스트리아(1866년), 프랑스(1870년)를 통일의 희생물로 삼았다.
1871년 1월 18일, 독일제국이 점령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선포돼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추대되고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평소 등한시했던 노동자에게도 관심을 쏟았다. 사회민주당 견제가 1차 목적이었지만 그가 제정한 사회법은 질병보험과 노후보험 등으로 결실을 보아 세계최초의 모범적인 사회보장제도를 탄생시켰다.
비스마르크의 부국강병책도 군주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그를 신뢰한 빌헬름 1세의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888년 3월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그와 26년 동안 호흡을 맞춰왔던 빌헬름 1세가 사망한 것이다. 후임 황제 빌헬름 2세와의 마찰은 결국 비스마르크를 1890년 3월 18일 총리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그리고 8년 뒤 그의 묘비명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公僕)”이라고 씌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