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창간 배경은 참담하고 암울한 현실 인식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식인과 문인들은 비관과 절망과 퇴폐의 병적인 분위기로 빠져들었다. 여기에 19세기 말 서구에서 유행한 세기말적 불안 사조까지 뒤늦게 몰려와 가뜩이나 암담하고 우울한 문학청년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허무와 공허에 사로잡힌 현실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건설하고자 했다.
1920년 7월 25일 창간한 문학동인지 ‘폐허’는 그런 의욕의 산물이었다. 폐허 이름은 “옛 것은 멸하고 시대는 변하였다. 내 생명은 폐허로부터 온다”고 한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구에서 따왔다. 창간호(130쪽)에는 김억, 황석우, 염상섭, 오상순, 이광수, 남궁벽, 김일엽, 민태원, 이병도, 나혜석 등 12명이 동인으로 참여했다. 변영로는 2호 동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폐허’를 낸 배경에는 황폐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 싹을 심어서 새 꽃을 피우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으나 이런 취지와 달리 동인들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참담하고 암울한 현실 인식이었다. 동인들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점점 더 감상적이고 병적인 낭만주의의 폐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조차 무의미하게 보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적 투항 의식을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좌절에 빠진 민족을 일으켜 세우려던 애초의 목적은 사라지고 자신과 세계를 저주하는 탄식이 폐허를 뒤덮었다.
작품들에는 세기말적인 데카당스 풍조와 러시아의 근대적 우수문학이 스며들어 감상·허무·우울·퇴폐적인 색채가 농후했다. 생활태도에도 퇴폐적이고 비정상적인 면이 많아 폐허파는 문학적 퇴폐주의와 동의어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폐허는 퇴폐주의, 이상주의, 낭만주의 등 여러 요소가 혼합된 양상을 띠었다. 폐허는 1921년 1월 20일 발행된 2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발간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24년 1월 염상섭의 주도로 ‘폐허이후’를 발간했으나 그것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 호여서 전체적으로는 3개 호에 그쳤다.
폐허는 이렇게 단명으로 끝났으나 발간 후 한국 문단이 비로소 뼈대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위치가 ‘창조’에 못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19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창간된 ‘창조’가 최남선·이광수의 2인 문단 시대를 극복하며 근대 문학 형성의 주역을 맡은 것은 사실이지만, 동인 대부분이 도쿄에 체류 중인 유학생들이어서 ‘서울 문단’에 직접 참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폐허’ ‘장미촌’의 성격은 퇴폐적이고 현실도피적
한국 근대문학 최초의 시 동인지는 ‘장미촌’이다. 황석우와 변영로의 주도로 1921년 5월 24일 창간했다. 박종화, 박영희, 변영로, 오상순, 노자영, 정태신, 신태악, 이훈 등도 동인으로 참여했다. 이들 중 변영로·오상순·황석우는 폐허 동인이었고, 박종화·박영희·노자영 등은 다음 해에 창간될 백조 동인이었다.
‘장미촌’은 1편의 번역시를 포함해 모두 15편의 시가 실린 23쪽의 작은 잡지였으나 낭만주의를 표방해 주목을 끌었다. 폐허와 마찬가지로 퇴폐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성격은 여전했지만 폐허가 사라진 뒤의 황량하고 스산한 빈 자리를 메우려는 듯 제호를 화사하게 지었다.
표지에는 변영로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선언’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제호를 왜 ‘장미촌’이라고 정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우리들은 인간으로서의 참된 고뇌의 촌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곳을 개척하여 우리의 영(靈)의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장미촌의 훈향 높은 신과 인간과의 경하로운 화혼의 향연이 얽히는 촌을 세우려 한다.” 편집인은 황석우, 발행인은 미국인 선교사 필링스를 내세웠다. 외국인이면 허가를 내기도 쉽고 검열을 받지 않거나 간섭받는 일이 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폐허보다 더욱 이상적인 평화와 안식의 낙원을 세우고자 장미촌에 모인 이들은 제대로 향연을 베풀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졌다. 결국 2호를 내지 못해 ‘폐허’와 곧 나오게 될 ‘백조’ 사이에 자리잡은 간이역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다.
‘백조’에는 시와 소설이 함께 실렸으나 대체로 시 분야가 활발
‘장미촌’ 발간 후 새로운 문학지와 사상지를 창간하기로 뜻을 모은 문학청년들이 있었다. 휘문의숙 출신의 홍사용과 박종화, 배재학당 출신의 박영희와 나도향이었다. 그들은 ‘흑조(黑潮)’라는 제목의 사상지에 앞서 ‘백조(白潮)’라는 이름의 문예지를 먼저 발간하기로 했다. 뒤이어 소설 ‘빈처’로 각광을 받은 현진건, 고향인 대구에서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피신해온 이상화, 감상적인 노자영, 인기 화가 안석주가 동인으로 참여했다. 이광수는 2호, 방정환과 김기진은 3호 동인으로 참여했다.
1922년 1월 9일 창간한 ‘백조’의 자금은 홍사용의 6촌형 홍사중과 김덕기가 댔다. 편집인은 홍사용, 발행인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아펜젤러가 맡았다. 화려한 제호와 필진, 143쪽의 외형, 안석주가 그린 여인을 담은 표지화까지 곁들인 창간호는 그 시기에 나온 잡지답지 않게 호화스럽고 낭만적이었다.
‘백조’에는 시와 소설이 함께 실렸으나 대체로 시 분야의 활동이 활발했다. 주요 작품들로는 시 분야에서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3호),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2호), 박종화의 ‘흑방비곡’(2호)과 ‘사의 예찬’(3호), 홍사용의 ‘봄은 가더이다’(2호)와 ‘나는 왕이로소이다’(3호)가 있다. 소설 분야에서는 나도향의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3호), ‘여이발사’(3호), 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3호), 박종화의 ‘목매는 여자’(3호) 등을 들 수 있다.
‘백조’의 문학적 경향을 흔히 낭만주의로 분류하지만 그것은 시 분야에 국한된 것이고 소설에서는 당시 유행하는 자연주의적 성격이 짙었다. 시는 병적이고 퇴폐적인 경향이 짙게 묻어나는 애수, 비탄, 자포자기 등을 주제로 삼은 유미주의와 낭만주의 경향을 보였다. 격월간을 목표로 했으나 발간이 순조롭지 못해 미국인 여성 보이스를 발행인으로 한 2호(1922.5)와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인 페루페로오를 발행인으로 내세운 3호(1923.9)만 내고 종간했다. 사상지 ‘흑조’는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자신의 ‘신문학사조사’(1982)에서 ‘폐허’, ‘장미촌’, ‘백조’로 이어지는 그 시대의 문단 분위기와 지식인들의 정신 상태를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문단에는 퇴폐적인 분위기가 짙은 안개와 같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퇴폐적인 경향은 문단에 한한 것이 아니고, 이 시대의 전 지식계급이 공통으로 걸린 하나의 세기병이었다.… 나태는 그들의 생활습성이요, 자포자기는 그들의 정신적 타성으로 되었다. 그들은 우울을 껌과 같이 씹고 다니는 세기병의 중독자였던 것이다.”
김억은 상징시, 황석우는 관념적, 변영로는 기교적, 홍사용은 전통적
‘폐허’, ‘장미촌’, ‘백조’ 등에서 활동한 주요 문인들의 활동을 살펴본다. 김억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유럽의 근대 문학에 심취해 특히 베를렌과 보들레르의 상징시를 집중 연구했다. 학창 시절부터 영어를 비롯해 일본어, 한문, 에스페란토에 능숙했다. 폐허 창간호에 프랑스 상징주의와 관련해 ‘스핑크스의 고뇌’라는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해 실었다.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체호프 같은 작가도 소개했다. 우리나라 최초 주간지 ‘태서문예신보’에도 많은 번역시를 소개했다.
1920년 폐허에 동인으로 참여했으나 음울하고 퇴폐적인 ‘폐허’의 경향의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채 내부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황석우·염상섭과 함께 폐허에서 나왔다. ‘태서문예신보’에 발표한 시(번역시 포함)들을 모아 1921년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엮어내고 1923년 한국 최초의 근대 시집으로 꼽히는 ‘해파리의 노래’를 펴냈다. 오늘날 한국 상징시의 선구자로 불린다.
황석우의 시는 모호한 은유법, 난해한 상징어, 지나친 주관의 개입 등으로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19년 발표한 ‘조선 시단의 발족점과 자유시’에서 일본 시를 포함한 서구 시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의 한시는 물론 민요체 등을 배격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서구 편향주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폐허 창간호 동인으로 참여했다가 곧바로 폐허에서 손을 떼고 장미촌을 준비했다.
변영로는 영어를 잘해 자신이 중퇴한 중앙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1920년 ‘학지광’을 통해 문단 데뷔하고 1921년 폐허 2호에 상징주의를 제시한 평론과 시를 실었다. 장미촌 참여 후에는 동인지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1923년 시 ‘논개’를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논개에서 보인 빼어난 언어 감각과 상징성으로 많은 이의 찬사를 받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언어에 집착한 기교파라는 지적도 받았다. 1924년 발간한 시집 ‘조선의 마음’은 기교주의적 추상성과 관념성에 치우쳤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홍사용은 휘문고보 시절인 1920년 동창인 박종화·정백과 함께 동인지 ‘급우’를 펴내며 시를 습작했다. 본격적으로 문단 생활을 시작한 것은 백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였다. 백조의 주조인 낭만주의의 흐름을 따르긴 했으나 서구 낭만주의 경향을 무턱대고 좇지는 않았다. 그의 시에는 전통적인 민요조의 향내가 내재해 있었다. 시뿐만 아니라 소설도 쓰고 백조 폐간 이후에는 연극에도 관심을 가져 연극단체 ‘토월회’와 ‘산유화회’ 등에 가담했다. 1930년 전후로는 거의 작품을 쓰지 않고 방랑 생활을 했다.
오상순의 ‘다방문학’, 박종화의 역사소설
오상순은 교회전도사로 일하다가 1920년 ‘폐허’ 창간호에 ‘시대고와 그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어둡고 괴로웠던 그 시대 지식인들의 심정을 그린 ‘시대고와 그 희생’에서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요, 우리 시대는 비통과 번민의 시대”라고 기록했다.
오상순은 계모를 들인 집안 분위기와 자신의 방랑벽 때문에 집도 가족도 없이 전국을 떠돌았다. 이런 그에게 다방은 최소한의 평화이며 정신적 안식처였다. 그래서 ‘다방문학’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작품 경향은 허무의 탐구와 그 초극 의지로 요약된다. ‘개벽’에도 시를 발표했는데 시대에 대한 절망과 자조와 체념 그리고 불교에서 체득한 무소유 탈속주의에 바탕을 둔 것들이다.
박종화는 동인지 ‘문우’에 비평 ‘심볼리즘’을 선보이며 문단에 나왔다. 장미촌과 백조에 죽음의 이미지로 가득 찬 어둡고 음울한 색채의 시들을 내놓아 백조를 대표하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시와 소설을 쓰면서 비평도 했다. 김억의 시를 비평했다가 김억과 치열한 논쟁 벌이고 이광수의 계몽주의·인도주의 문학 세계도 정면으로 비판했다. 비평이 다소 무리인 측면도 있지만 비평이라는 용어의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시대 배경을 감안하면 박종화의 활동은 문학 비평 분야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성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23년 백조 3호에 발표한 단편 역사소설 ‘목매이는 여자’는 박은식·신채호 등의 애국 계몽 역사 소설 이래로 근대 역사소설의 효시로 꼽힌다. 1924년 첫 시집 ‘흑방비곡’을 발간한 것을 비롯해 시집을 3권이나 냈으나 주로 발표한 작품은 역사소설이었다. 역사소설가로 자리를 굳히게 한 것은 1935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금삼의 피’였다. 1981년 80살의 나이로 숨질 때까지 장편소설 18편, 단편 12편을 발표하고 5권의 수필집과 평론집 등을 내 대가다운 면모를 보였다.
해방 후에는 각종 단체·기관의 장으로 활약했다. 서울신문사 사장, 한국문학가협회 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예술원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민족문화추진회 회장 등 각종 문화단체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나도향은 사랑을 즐겨 다뤄, 현진건은 사실주의 작가
나도향은 배재고보를 나와 경성의전에 입학했으나 의학 공부보다 독서, 습작, 신문투고 등 문학에 사로잡혀 지냈다. 1922년 백조에 식민지 현실 속에서 겪는 청년기의 사랑과 시련을 감상적 수법으로 그린 단편 ‘젊은이의 시절’ 등을 발표하며 동인으로 활약했다. 동아일보에는 장편 ‘환희’를 연재해 각광을 받았다. 1923년 9월 백조 3호에 ‘여이발사’, 10월 개벽에 ‘행랑 자식’을 발표하면서 한결 성숙해진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그의 소설은 현실 사회의 갈등 속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즐겨 다루고 솔직하게 성을 묘사해 재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25년 7월 ‘여명’에 발표한 ‘벙어리 삼룡이’, 8월 ‘조선문단’에 발표한 ‘물레방아’, 12월 개벽에 발표한 ‘뽕’이 그것이다. 일본 유학에 나섰다가 결핵에 걸려 1926년 초여름 서울로 돌아왔으나 결국 그해 8월 24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죽음은 동료 문인과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현진건은 1920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그해 11월 개벽 5호에 소설 ‘희생화’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뛰어들었다. 1921년 개벽지 11월호에 ‘빈처’를 발표함으로써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생소하던 때에 사실주의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조에서는 다른 동인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암울한 상황에서 비롯된 좌절감과 패배주의적 정서가 짙게 밴 작품을 발표했다. 작품 경향은 백조 동인의 해체와 함께 ‘파스큘라’를 거쳐 ‘카프’로 넘어가는 1920년대 문학의 지각변동과 궤를 같이 했다.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에 비친 모순된 현실과 극빈층으로 내몰린 일제 강점기 민중의 삶도 작품으로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