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과 김동호 초대 위원장

일약 아시아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각광 받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국제영화제 논의가 탁상공론에 그치고 있던 1990년대 초, 부산에서도 국제영화제가 필요하다고 의기투합한 세 영화인이 있었다. 부산 경성대 이용관 교수, 부산예술문화대 김지석 교수, 영화평론가 전양준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1992년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의 ‘한국영화 특별전’을 둘러본 뒤 그곳의 소박한 영화제 분위기에 감동받아 부산에서도 영화제를 개최하자며 뜻을 모았다.

그리고 1995년 8월 18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전 영화진흥공사 사장 김동호(1937~ )를 만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선장격인 집행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동호도 평소 국제영화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기꺼이 수락했다. 이 ‘플라자 회동’은 부산국제영화제 탄생의 시발점이자 김동호 인생의 행로를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김동호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문화공보부 주사보로 공직에 입문해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8년 4월, 27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영화와는 무관한 그의 등장에 영화계가 낙하산 인사라며 노골적으로 반발한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김동호는 취임 후 영화인들을 만나고 또 만나 친분을 쌓았다. 그러다 보니 영화인들도 그의 진정성과 열정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동호는 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이던 종합촬영소를 1991년 4월 경기 남양주에 착공토록 한 후 1992년 2월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으로 떠났다. 그 후 문화부 차관과 공연윤리위원장을 거쳐 1995년 3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부산영화제의 3인방이 만남을 요청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부산은 영화 개최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세계적인 영화제 대부분이 항구도시에서 개최되듯 부산 역시 우리나라 최대의 항도이고 관광도시였다. 역사적으로도 영화와 인연이 깊었다. 한국 최초로 영화사가 설립되고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나운규, 윤백남의 첫 활동 무대도 부산이었다.

김동호 위원장이 우선 해야 할 일은 영화제에 들어가는 비용을 구하는 일이었다. 김동호는 기업들에 도움을 청하고 영화인을 상대로 모금 행사를 벌였다. 지인들의 후원과 입장료 예상 수입 4억 원을 보탠 총 22억 원으로 첫 영화제를 준비했다. 전 세계 400여 개 영화제에 하나 더 추가된 영화제였으니 외국의 영화감독과 제작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예상된 결과였다. 그러나 ‘영화의 도시’ 부산에는 부산 시민이 있었다. 그들은 영화제 예매가 시작되자 예상을 뒤엎고 영화 관람권을 5만 장이나 구매하는 것으로 영화제의 부산 개최를 환영했다.

 

부산 시민이야말로 영화제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연출자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 9월 13일 저녁 6시 50분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 특설무대에서 6000여 명의 영화 관계자와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되었다. 개막 선언 후 6층 높이의 대형 화면에서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국 마이크 리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이 상영되었다. 단하에서는 김지미, 신성일, 안성기, 장미희, 강수연, 심은하 등 국내외 스타들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9월 21일까지 9일간 계속된 영화제에서는 31개국 169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부산영화제가 추구한 것은 비경쟁영화제였다.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던 도쿄영화제는 경쟁영화제였다. 경쟁영화제는 화려해 보였으나 베를린․칸 영화제와 경쟁이 될 수 없어 경쟁부문 초청작을 모으는 데 한계가 있었다. 세계적인 감독이나 제작자들은 도쿄보다는 베를린이나 칸을 우선했고 이 때문에 도쿄영화제는 차츰 활기를 잃었다. 부산영화제는 이런 점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부산영화제 기간 전국에서 몰려온 영화 관객들은 영화 축제에 한껏 도취했다. 18만 4000여 명의 관객은 부산 거리를 환하게 밝힌 영화제의 진정한 주인공이었고 연출자였다. 첫 영화제는 이런 관객들이 기대 이상의 호응을 보여 대성공을 거뒀다.

부산영화제는 아시아의 신인 감독과 좋은 영화를 발굴해 세계에 소개하는 것과 아시아 영화제작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것 두 가지를 목표로 삼았다. 1997년 제2회 영화제에서는 부산을 찾은 월드스타나 거장 감독의 이름을 부산영화제 광장에 새겨놓기 위해 ‘핸드 프린팅’을 마련했다.

1998년 제3회 영화제에서는 PPP(부산프로모션플랜) 프로젝트를 채택했다. PPP는 제작비를 구하기 어려운 아시아의 역량 있는 감독들이 제작 기획안을 제출하고 이곳에서 투자자를 만나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16편의 영화가 소개된 첫 프로젝트에는 세계 각지의 투자·배급 관계자 290명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뤘다. 이렇게 제작된 영화들이 베니스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받는 등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PPP는 부산영화제의 대표상품이 되었고 아시아 감독이나 제작자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1999년 제4회 영화제 때 설립이 발표된 부산영상위원회가 2000년 본격 활동을 시작하면서 부산은 ‘영화 촬영도시’로 바뀌었다. 영화 ‘리베라메’가 부산영상위원회의 첫 지원을 받게 되자 부산시청 앞 광장은 이 영화를 크랭크인하는 행사장으로 꾸며졌다. 소방관, 소방차는 물론 소방헬기까지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서울의 촬영팀들이 부산으로 몰려오기 시작했고 부산은 ‘촬영하기 좋은 도시’가 되었다.

 

김동호 위원장의 헌신과 리더십도 영화제의 주요 성공 요소

부산영화제는 점차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했다. 2001년 12월 베를린에서 세계 9개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모여 영화제 정상회담을 열었을 때는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를 통틀어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참가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2002년 제7회 영화제 때는 칸, 베니스, 베를린 등 세계 3대 영화제의 신임 집행위원장들이 모두 참석해 부산영화제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었다.

부산영화제는 도쿄영화제와 홍콩영화제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이들을 압도하고 아시아의 대표 영화제로 자리 잡았다. 2005년 미국 ‘타임’지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부산영화제를 꼽을 정도로 부산은 일약 아시아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았고 부산영화제는 아시아 영화 문화를 대표하는 축제의 장으로 부상했다.

2005년 부산영화제는 아시아 각국에 영화 지망생은 많아도 전문 교육기관이 적다는 데 착안해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를 설립하고 2006년에는 영화를 사고파는 시장인 아시아필름마켓을 창설했다. 특정 영화를 세계 최초로 상영할 때 쓰는 ‘월드 프리미어’도 개막 초기에는 별로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73개국 307편이나 소개된 2005년 제10회 영화제 행사에는 월드 프리미어만 61편, 자국 외 첫 공개인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도 28편이나 되었다.

전문가들은 부산영화제의 첫 번째 성공 요인으로 개최 지역이 부산이라는 점을 꼽는다. 부산시와 부산시민의 적극적 지원과 동참이 없었다면 부산영화제가 소규모 ‘지방영화제’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두 번째는 부산영화제가 제1회 때부터 계속 견지해온 정치적 중립이다. 부산영화제에서는 조직위원장인 부산시장의 개막 선언 외에 어떤 정치인도 인사말을 하지 못하는 게 전통이다. 이곳에서는 대통령선거 후보도, 문화부 장관도 그냥 게스트일 뿐이다. 세 번째는 매년 새롭게 발표되는 새로운 프로젝트와 질 높은 프로그램 선정이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부산영화제의 마당발’, ‘아시아 영화계의 대부’로 불리던 김동호 위원장의 헌신과 리더십이다.

김동호는 첫 회부터 한국 영화 중흥의 산파역을 하다가 2010년 제15회 영화제를 마지막으로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났다. 김동호가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선물은 2008년 10월 착공한 부산영화제 전용관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 전용 상영관 ‘영화의 전당’은 2011년 9월 29일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에서 개관했다. 축구장보다 큰 거대한 물결 모양 지붕이 아이스크림 콘 형태의 작은 기둥 하나에 의지해 구름처럼 떠 있는 이 예술적 건물 하나로 ‘영화의 도시’ 부산은 ‘건축의 도시’ 타이틀에도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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