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에 피선… 사후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불려

골다 메이어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태어나 8살 때인 1906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키부츠(집단농장) 참가를 조건으로 결혼할 만큼 열렬한 시오니스트였다. 1921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마파이당(노동당 전신)에 입당, 두각을 나타내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48년 독립 후에는 소련 주재 이스라엘 초대 대사(1948년), 크네셋(의회) 의원(1949년), 노동부장관(1949년), 외무부장관(1956년) 등을 역임하며 신생국가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뿌리내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1950년 벤 구리온 총리가 각료들에게 히브리 성을 갖도록 권유했을 때는 그해 죽은 남편 메이어슨과 비슷한 이름 가운데 ‘밝게 비춘다’는 뜻의 ‘메이어’를 선택했다.

1969년 총리 레비 에슈콜이 사망하자 노동당중앙위의 지명을 받아 3월 7일 총리에 선출되었다. 주변 아랍제국과 상시 전쟁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의 총리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생존을 좌우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중압감을 느꼈고 우려는 곧 현실로 다가왔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공격으로 제4차 중동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대교의 대 속죄일인 욤 키푸르 때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욤 키푸르 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에서 2500여 명의 이스라엘군이 전사하고 엄청난 군비가 소모되었다. 그래도 전세를 역전시켜 16일 만에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럼에도 아랍연합군의 기습 공격, 이스라엘군의 초기 대처 능력 부족, 엄청난 인명과 군비 손실 등은 국가 전체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군과 비밀정보부의 정보 수집능력이 의심받았고 이스라엘군의 난공불락 신화가 산산이 부서졌다. 이때의 충격은 이스라엘의 대·내외 정치에 중대한 변화를 몰고왔다. 결국 메이어는 전쟁실패 책임을 지고 1974년 4월 8일 총리에서 물러났다. 4년 뒤 8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를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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