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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④] 로마(1) : 포로 로마노, 캄피돌리오 광장,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스페인 광장, 트레비 분수, 판테온 등

by 김지지

 

■로마, 발길 닿는 곳마다 과거 역사가 그대로 살아있는 곳

 

이탈리아는 가는 곳마다 유적지이고 오늘의 유럽을 있게 한 뿌리이다. 그중 으뜸을 꼽으라면 당연히 발길 닿는 곳마다 과거의 역사가 그대로 살아있는 로마이다. 로마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 역사지구’다. 로마시는 단체 관광객이 투어를 하려면 로마인 안내인과 함께 다니는 것을 의무로 해 유적지 관리에 철저하다. 폼페이 관광 때도 로마인 안내인이 참관․안내했는데 일자리 창출과 연결된 관광산업에 도움이 될 듯싶어 우리도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로마는 고대 로마를 꽃피웠던 포로 로마노, 중세 유럽의 중심지로 기능하던 로마 시내 전역,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시국으로 크게 나뉜다. 그중 대표적 유적지를 소개한다.

 

▲팔라티노 언덕, 포로 로마노

로마 시내에는 언덕이 7개 있다. 팔라티노, 카피톨리노(캄피돌리오), 아벤티노, 첼리오, 에스퀼리노, 비미날레, 퀴리날레 언덕이다. 언덕 주변에는 BC(기원전) 753년 로마가 건국될 때부터 현재까지의 방대한 물질적·정신적 유산이 집약되어 있다. 이 7개 언덕을 중심으로 대제국의 역사가 펼쳐졌으니 곧 로마제국의 모태인 셈이다.

로마의 7개 언덕

 

7개 언덕 중 팔라티노와 아벤티노 언덕은 BC 753년 고대 로마를 건설한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이곳의 동굴에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늑대들은 광주리 속에 든 쌍둥이 아이가 테베라 강에 있는 것을 보고 물고 와 자신의 젖을 먹여 키웠다. 한 양치기가 이들을 발견하고 데려다 키우면서 로물루스, 레무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형제는 성장한 후 나라를 건설할 때 늑대가 자신들을 키운 곳에 도읍지를 정하려 했으나 의견이 달랐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을 선호했다.

그런데도 로물루스는 양치기들의 수호여신인 팔레스의 축제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열리는 BC 753년 4월 21일을 로마의 건국일로 잡고 도읍지 이름은 자기 이름을 따서 ‘로마’로 정한 후 언덕 주변에 성곽을 쌓았다. 레무스가 이를 무시하고 경계선을 넘어오자 로물루스는 자신의 영역을 무단으로 침입한 동생을 죽였다. 로물루스는 이렇게 동생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해 권력을 장악했다. 현재 로마시청은 물론 로마시에서 운영하는 모든 공기업은 늑대의 젖을 먹는 두 형제를 상징 마크로 사용하고 있다. 팔라티노 언덕에는 ‘로물루스의 집’이라는 팻말을 붙인 움막터가 있다.

팔라티노 언덕에 올라가면 서구문명의 원류인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장) 유적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포로 로마노의 메인 스트리트인 ‘비아 시크라(신성한 길)’를 사이로 왼편에는 바실리카, 에밀리아, 공회당, 원로원 건물 등 공공기관과 로마인들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이 있고, 오른편에는 궁전과 신전들이 자리잡고 있다. 팔라티노 언덕은 황제와 신들을 모신 궁전이 많아서 오늘날 ‘궁전’을 의미하는 ‘Palace’의 어원이 되었다.

포로 로마나

 

포로 로마노는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소통의 장이었다. 이곳에서 정치인은 야외연설을 하고 법관은 법을 집행했으며 사제는 종교행사를 주관하고 시민들은 쇼핑을 즐겼다. 포로 로마노는 BC 6세기 무렵부터 AD 3세기 말까지 로마의 정치경제 중심지였으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그대로 방치되어 사실상 폐허가 되었다.

 

▲카피톨리노 언덕, 캄피돌리오 광장

7개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은 카피톨리노 언덕이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콜로세움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어 로마제국의 심장이었던 포로 로마노를 가로지른다. 길의 이름은 ‘비아 사크라(Via Sacra)’. 성스러운 길이란 뜻이다. 당시 언덕 위에는 주피터 신전이 있었다. 그리스의 제우스에 해당하는 주피터는 로마에서도 으뜸 신이었다.

또 다른 길은 반대편 베네치아 광장에서 시작된다. 낮고 넓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계단이 끝나는 곳에서 카피톨리노 언덕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캄피돌리오 광장에 들어서게 된다. 광장은 16세기 중반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의 요청을 받고 미켈란젤로가 구상하고 건설했다.

미켈란젤로는 광장을 좌우 한 쌍의 건물과 안쪽 정면 건물 중심으로 정비했다. 세나토리오궁, 콘세르바토리궁, 누오보궁이다. 정면의 세나토리오궁은 현재 로마 시청사로, 좌우의 콘세르바토리궁과 누오보궁은 현재 카피톨리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캄피돌리오 광장

 

박물관 안에는 늑대 젖을 짜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모습을 비롯해 많은 조각들과 청동상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이라는 평을 듣고 있으며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 때인 1471년에 지어져 전리품과 개인 선물들을 소장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2세기 경에 만들어진, 로마의 평화를 이룬 5현제 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의 청동 기마상을 광장의 중앙으로 옮겨놓고 기마상의 대리석 받침대와 ‘코르도나타’라는 계단을 만들었다. 기마상의 원본은 언덕 위에 지어진 카피톨리노 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광장에 있는 것은 복사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

 

광장 입구 양쪽에는 벌거벗은 채 말 옆에 서있는 청년 둘의 석상이 있다. 유피테르 신의 아들이라는 뜻의 디오스쿠리 형제다. 형제는 로마 왕국과 주변의 라틴 부족들 간에 BC 499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나 로마군의 승리를 이끈 뒤 홀연히 사라졌다. 이후 사람들은 이들을 유피테르 신의 아들 디오스쿠리 형제로 믿게 되었다. 미국의 국회의사당이나 정부의 행정 업무를 보는 건물을 지칭할 때 영어로 ‘캐피털(Capitol)’이라고 하는 것은 이 카피톨리노(Capitolino)에서 유래한다.

캄피돌리오 광장은 급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던 2명의 개혁가가 비참하게 살해된 역사를 안고 있다. 한 명은 기원전 133년 살해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이고 다른 한 명은 중세 시대인 1354년 살해된 콜라 디 리엔초다. 그라쿠스는 자영업자의 몰락과 무산대중의 비참한 삶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가 귀족에게 죽임을 당했고 리엔초는 민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장악했으나 결국에는 민중의 손에 죽었다. 모두 캄피돌리오 광장에서였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왼쪽에 있는 작지만 인상적인 동상이 리엔초의 동상이다.

콜라 디 리엔초 동상

 

▲콜로세움

콜로세움은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와 맞닿아 있다. ‘비아 사크라(Via Sacra·성스러운 길)’를 따라 포로 로마노를 통과해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지나면 마치 마법처럼 위용이 드러난다. 거대하면서도 위엄에 가득 차 있다. 아름답고 실용적이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이다. 플라비우스는 콜로세움을 건설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재위 AD 69~79)의 가문 이름이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임 황제인 네로(재위 AD 54~68)의 방화로 폐허가 된 로마를 재건하는데 팔을 걷어부쳤다. 콜로세움도 그중 하나다. 72년 공사를 시작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2층까지 지어진 것을 보고 79년 사망하자 아들 티투스 황제(재위 79~81)가 80년 완성했다. 이후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82년 4층으로 개축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 10만 명의 유대인 포로를 끌고와 콜로세움을 건설하는데 투입했다.

원형극장이 완성되자 시민들은 원래 명칭 대신 콜로세움으로 불렀다. 이는 콜로세움을 세우기 전, 그 앞에 있던 거대한 네로 황제의 동상을 가리키던 형용사 ‘콜로살레’(거대하다)에서 유래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무슨 생각으로 이 엄청난 콜로세움을 지었을까. 바탕에는 전임 황제와는 다른 그의 신분이 깔려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이래 1세기 동안 제위를 계승해 온 전임자들과는 다른 계급의 황제였다. 그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신성한 핏줄을 물려받지 못했다. 전통적인 로마의 엘리트 계층인 원로원 출신도 아니었다. 그저 로마 근교 평범한 기사 집안 출신이었다.

그런데도 전통과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에서, 괜찮은 조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사 계급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원로원과 민중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제위 계승을 인정해준 로마 시민들에게 바치는 감사 선물로 콜로세움을 짓기 시작했다. 아들인 티투스 황제는 콜로세움이 완공됐을 때 100일 동안의 축제로 이를 축하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왼쪽)와 티투스 황제

 

그리스·로마 시대 건축 양식의 집합체

콜로세움은 5만~8만명을 수용하는 4층의 타원형 경기장이다. 당시 로마 인구가 100만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다. 이곳에서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 개봉)로 유명한 검투사 경기와 맹수 시합을 하고 서커스와 연극을 공연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검투사와 노예, 이민족, 이교도들이 죽어나갔다. 그럴수록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로마 시민들은 열광하고 환호했다.

아치 80개가 둘러싸고 있는 외벽의 장축 지름은 187m, 단축 지름은 156m, 둘레는 527m, 높이는 48m이다. 1층은 도리아 양식, 2층은 이오니아 양식, 3층은 코린트 양식으로 각 층마다 양식을 달리해 그리스·로마 시대 건축 양식의 집합체를 이루고 있다. 대단한 건 4층이다. 4층은 관객석이 아니다. 작열하는 남국(南國)의 태양으로부터 관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천막 고정 장치를 지탱하는 벽이다.

콜로세움은 이처럼 관객을 위한 서비스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춘 전대미문의 엔터테인먼트 시설이었다. 검투사와 맹수가 싸우는 경기장 부분은 나무판을 모래로 덮었기 때문에 ‘모래’라는 뜻의 라틴어 ‘아레나’로 불렀다. 지하 공간엔 검투사 대기실과 맹수 우리 등이 있었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마지막 행사가 서기 523년으로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450년 동안 사용된 셈이다. 그러다가 중세 때 일어난 수차례의 지진으로 서서히 파괴되었다. 무너져내린 대리석들은 15세기부터 3세기 동안 다른 건축물의 자재로 사용되어 사실상 채석장으로 전락했다. 이후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자 소와 양을 먹이는 방목장으로 이용되다가 1790년 교황 베네딕트 14세 때 복원을 시작했다.

콜로세움은 유럽과 북아프리카 등지에 건설된 로마 제국의 도시마다 지어졌다.

현재까지 ‘미니 콜로세움’이 발견된 곳은 25개 국가, 230개 이상의 도시에 달한다. 연극을 상영하는 반원형 극장과 전차 경주에 이용하는 전차경기장도 각각 170여곳과 60여곳에서 발견됐다. 북이탈리아 베로나, 남프랑스의 님과 아를의 원형경기장처럼 오늘날에도 음악회, 투우, 연극 등에 사용되는 곳도 있다.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콜로세움 바로 옆에 웅장하게 서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재위 306~337)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해 315년 팔라티노 언덕과 콜로세움 사이에 착공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최대 정적인 막센티우스를 312년 10월 로마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물리친 후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다. 승전 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천사의 십자가 덕에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천사는 마지막 일전을 앞둔 날의 전날 밤 환시에 나타났다. 환시에는 저무는 해의 위쪽 하늘에 빛의 십가가가 걸려 있고 그 십자가에 ‘이 표징으로 승리하리라’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다음날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군기와 방패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전장에 나가 막센티우스 군대를 물리쳤다. 이 전쟁 장면은 현재 바티칸 박물관 내부 라파엘로의 4개 방 가운데 첫 번째 방인 ‘콘스탄티누스의 방’에서 벽화로 볼 수 있다.

이 전투는 기독교를 공인하게 될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개막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십자가가 공공연히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그때까지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십자가형을 받고 처형된 자를 신으로 섬길 수 있느냐”며 모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당한 그리스도의 비참한 모습을 표현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십자고상(十字苦像) 작품은 초기 교회 미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랬던 십자가가 로마군의 표식으로 사용되면서 양지로 나오게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높이 20m, 너비 25m, 폭 7m다. 3개 아치 중 중앙 아치는 높이가 12m, 양옆의 아치는 7m다. 중세에는 콜로세움과 함께 요새로 사용되다가 18세기 들어 복원되었다. 이 개선문 말고도 고대 로마에는 30여 개의 개선문이 세워졌는데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티투스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96) 때 세워졌다. 그는 자신의 형인 티투스 황제와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예루살렘 전투 승전(70년)을 기념해 티투스 사망(81년) 후 개선문을 세웠다. 파리 개선문은 이 티투스 개선문을 원형으로 삼고 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전차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로마 최대·최초의 전차경기장이다. 콜로세움과 가까운 아벤티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 움푹 파인 곳에 있다. ‘대형 경기장’이라는 뜻의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BC 600년 경 에트루리아계의 제5대 로마 왕이 경기와 오락을 위해 건설했던 것을 BC 5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44)가 대대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초기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대전차 경기장

 

로마제국 번영기에는 더욱 확장되어 길이 621m, 폭 118m에 평균 25만 명을 수용했으나 64년 네로 황제 때 일어난 화재로 일부 건물이 소실되었다. 549년 동고트 왕 토틸라가 마지막으로 사용한 후에는 폐허로 변해 지금은 당시의 웅장했던 관중석의 구조물만 일부 남아있고 U자형 구조의 경기장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경기장 자리는 현재 풀밭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베네치아 광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베네치아 광장은 로마의 중심지로 6개의 주요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지명은 과거 베네치아 공화국의 로마 주재 대표부 건물인 베네치아 궁이 이곳에 있어서 붙여졌다. 베네치아 궁은 베네치아 출신의 교황 바오로 2세(재위 1464~1471)가 15세기 중엽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추기경 시절에 지은 것이다. 한동안 교황들의 거처로 사용되다가 1564년 교황 비오 4세(재위 1559~1565)가 베네치아 정부에 기증하면서 그때부터 1797년까지 교황청 주재 베네치아 정부의 사절단이 머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무솔리니는 이곳에서 20여 년간 머물렀고 궁전 발코니에서 2차대전 참전을 선포했다.

베네치아 광장

 

오늘날 베네치아 광장의 랜드 마크는 베네치아 궁이 아니라 웅장한 모습으로 광장을 내려다보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은 1861년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1878년 서거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국가의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1885년 착공하고 통일 50주년인 1911년 6월 4일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건물이 최종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935년이었다. 에마누엘레 2세는 기마 동상으로 제작되어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기념관의 겉모습이 다른 로마의 역사적 유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시민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심지어는 ‘가장 추악한 궁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비난의 초점은 로마제국의 전통에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건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1911년 건립되었기 때문에 천년 도시 로마에서 역사가 되기엔 너무 짧아 건물은 화려하지만 주목은 받지 못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타자기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타자기’로도 불린다.

 

▲스페인 광장, 영화 ‘로마의 휴일’

로마에서 베네치아 광장 다음으로 유명하고 활기찬 곳이 스페인 광장 일대다. 스페인 광장은 오랫동안 로마제국의 변두리이자 야만족으로 취급받던 스페인이 17세기에 주 바티칸시티 스페인대사관을 이곳에 지으면서 생긴 지명이다.

베네치아 정부가 대표부 건물인 베네치아 궁을 로마의 번화가에 세웠던 것과 달리 스페인은 변두리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귀족들의 의상이나 구두·액세서리를 파는 상점들이 주변에 들어서고 1960년대 이탈리아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광장 일대는 이탈리아 패션을 세계로 알리는 거대한 부티크로 자리잡았다.

흔히 파리를 패션의 고장이라고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로마야말로 패션의 본고장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쿠레주, 아르마니, 지방시, 에르메스, 벨트라미 등 세계 패션을 리드하는 명가들이 즐비해 지구촌 곳곳에서 모여든 멋쟁이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옷맵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가난하더라도 결혼식 등 각종 행사에 입고 갈 예복만큼은 최고급을 마련한다. 결혼식에 참석할 때는 남녀노소 모두 최대한 공을 들여 화려하게 치장한다. 결혼식장이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이유다. 우리 일행을 태우고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닌 젊은 버스 운전기사도 멋쟁이였다.

베네치아 광장에서 삼위일체 성당으로 올라가는 137개 계단

 

스페인 광장에는 ‘삼위일체 성당(트리니티 데이 몬티 성당)’으로 올라가는, 1726년 만들어진 137개의 계단이 있다. ‘스페인 계단’으로 불리는 이곳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데이트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영화 개봉 후,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런데 2019년 8월부터는 ‘스페인 계단’에 더 이상 앉을 수 없게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스페인 계단과 주변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관광객이 계단에 앉기만 해도 벌금을 물리는 새 규칙을 로마 경찰이 도입했기 때문이다.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음식을 먹거나 계단 아래 배 모양의 바르카치아 분수에서 물을 마시는 행위 등도 제한된다. 이를 어길 경우 약 160∼400유로(약 21만∼54만원) 사이의 벌금이 부과된다.

‘로마의 휴일’은 2차대전으로 파괴된 로마의 문화유산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53년 그레고리 팩과 신인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주연하고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영화다. 숨막히는 공식 일정에 지쳐 숙소를 탈출한 가상 왕국의 공주 앤(오드리 햅번)과 미국의 로마주재 신문기자 조(그레고리 팩) 사이의 우연한 인연으로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 형식으로 로마의 유적과 유물을 자세히 소개한다. 오드리 헵번은 이 영화 한편으로 1953년 뉴욕 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195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등을 연이어 수상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 ‘로마의 휴일’ 한 장면

 

‘로마의 휴일’에 얽힌 시나리오 작가 돌턴 트럼보 이야기

‘로마의 휴일’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 제임스 돌턴 트럼보(1905~1976)에 관한 이야기다. 트럼보는 1940년대에 잘 나가는 스타 시나리오 작가였다. 공산주의자여서 영화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 시위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2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의 시대가 도래했다. 미국에서는 1947년 비미활동조사위원회가 영화계 인사 수십 명을 청문회에 불러 공산당원인지 여부를 물었다.

훗날 ‘할리우드 텐’으로 불리게 될 10명은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결국 10명은 의회모독죄로 1년간 투옥되었다. 영화계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들과는 앞으로 함께 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럼보는 ‘할리우드 텐’의 핵심 인물이었다.

제임스 돌턴 트럼보

 

1년 뒤 출소한 트럼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작품을 받아주지 않는 주류 영화계의 반공적 분위기였다. 트럼보는 아내와 3명의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필명을 쓰거나 다른 작가의 이름을 빌어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트럼보는 B급 영화 제작사 ‘킹 브러더스’를 찾아가 가명 작업을 제안했다. 영화사는 트럼보의 재주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저가로 일감을 주었다. 다만 작품성 있는 시니리오가 아니라 조악한 SF영화나 막장 드라마를 요구했다. 이름도 당연히 가명을 원했다. 다행히 일감은 많아 트럼보와 가족은 근근이 생활할 수 있었다.

트럼보는 ‘로마의 휴일’ 시나리오를 써놓은 뒤 친구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이안 맥켈런 헌터에게 이름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친구의 이름이 각본자로 올라간 ‘로마의 휴일’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그덕에 이듬해인 1954년 제2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수상자는 이안 맥켈런 헌터였기 때문에 트럼보는 TV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트럼보가 또다시 가슴앓이를 한 것은 1957년이었다. 트럼보의 시나리오로 ‘킹 브러더스’가 제작한 영화 ‘더 브레이브 원’(1956년)이 1957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시상식에서 트럼보라는 이름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이번의 경우는 ‘로마의 휴일’ 때와는 달랐다. ‘더 브레이브 원’이 아카데미 트로피를 받았을 때 영화계에선 이 작품의 진짜 작가가 트럼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날 할리우드 대스타가 트럼보를 찾아왔다. 영화 제작자로 나선 커크 더글러스였다. 그는 자신을 주연배우로 하는 로마 배경 영화 한 편을 준비 중인데 훗날 천재 감독으로 불리게 될 스탠리 큐브릭에게 연출을 맡겼다며 트럼보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완성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영화가 로마시대 노예 반란을 다룬 ‘스파르타쿠스’(1960년)였다.

트럼보에게 이 영화가 각별했던 것은 커크가 각본자 이름에 트럼보 실명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영화계에 알려지자 “트럼보를 해고하지 않으면 당신도 빨갱이로 몰겠다” “재향군인회를 동원해 영화를 보이콧 하겠다”는 등 온갖 협박이 커크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커크는 협박을 조롱하듯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트럼보 실명을 올렸다. 트럼보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대박을 터뜨렸고 이후 영화계는 트럼보와 그의 동료들을 다시 기용하겠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블랙리스트가 조용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트럼보는 1976년 사망했다. 그로부터 17년 후 진행된 19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로마의 휴일’에 각본상이 수여되었다. 죽은 남편 대신 아내가 수상했다.

트럼보는 글을 쓸 때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기 싫어 욕조에서 집필하는 것을 좋아했다. 조각은 콜로라도의 그랜드밸리 중심부에 위치한 그랜드 정션(Grand Junction)에 설치되어 있다.

 

▲트레비 분수, 로마의 수로

트레비 분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분수다. 분수가 많은 로마에서도 ‘분수의 여왕’으로 불린다. 로마의 역대 통치자들은 급증하는 로마인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저마다 수로 건설에 열을 올렸다. 수로가 완성될 때마다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수로의 종착점이나 중요한 지점에 분수를 세웠다. 분수마다 신화 속의 인물과 동물을 조각했다. 수로 길이는 짧게는 16.5㎞에서 길게는 91㎞나 된다. 그중 5개는 재정비작업을 거쳐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트레비는 ‘세 개의 길이 만나는 삼거리’라는 뜻이다. 트레비 분수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BC(기원전) 19년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BC 63~AD 14)의 사위였던 마르쿠스 아그리파 집정관이 승전을 하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군인들이 갈증으로 고통받는 데도 수원지를 찾지 못해 애타고 있을 때 한 처녀가 알려준 곳을 따라가니 샘이 발견되었다. 아그리파는 그 샘물을 로마 시민에게도 공급하기 위해 수로를 만들고 이 샘에서 물을 끌어왔다. 수로의 길이는 20㎞가 넘었다. 처음에는 ‘처녀의 수로’라는 뜻의 라틴어 ‘아쿠아 비르고’라 했다.

트레비 분수. 늘 엄청난 인파로 북적거린다.

 

아그리파는 이 수로를 통해 자신이 판테온 부근에 세운 아그리파 목욕탕과 수영장에 물을 공급했고 이 물을 이용해 로마에 160개나 되는 분수를 만들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트레비 분수다. 스페인광장의 ‘조각배 분수’와 나보나 광장의 ‘강의 분수’도 이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고 있다. 이 수로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방치되었다가 1453년 복구되어 지금까지 물을 공급하고 있다.

현재의 트레비 분수는 역대 교황들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로마 재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1732년 공사를 시작해 교황 클레멘스 13세(재위 1758~1769) 때이던 1762년 완성되었다. 10여 명의 건축가와 조각가가 작업에 참여했다. 분수 중앙에는 바다의 신 넵투누스가 해마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장면이 장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분수대 뒤쪽 벽면 건물은 르네상스식 폴리 궁이다. 그런데 분수의 사전적 의미가 압력으로 좁은 구멍을 통해 물을 위로 세차게 내뿜거나 뿌리도록 만든 설비라는 점에서 트레비 분수는 위에서 아래로 물이 쏟아지므로 정확히 말하면 분수가 아니다.

트레비 분수는 뒤로 돌아서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다시 로마에 올 수 있고, 두 번 던지면 연인과의 사랑이 이루어지며, 세 번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된다는 전설도 있다. 맑은 물이 가득한 분수 밑바닥에는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던진 형형색색의 동전들로 가득하다.

분수에 던져진 동전은 2018년 기준 150만 유로(약 19억원)나 된다. 이 동전은 가톨릭 자선재단인 카리타스가 수거해 노숙자 등을 돕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재정난을 겪는 로마시 의회가 2019년 1월 이 동전을 시 예산에 편입시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로마시 가톨릭 주교회가 로마 시의회를 ‘빈곤층의 적’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판테온 신전

판테온 신전은 트레비 분수에서 도보로 4∼5분 정도 떨어져 있다. 건물 바깥에 일절 장식이 없고 단순하고 그리스 신전과 비슷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막상 신전 내부로 들어서면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속세가 아닌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판테온은 로마 제국의 집정관인 마르쿠스 아그리파(BC 62~12)의 지시로 BC 27~25년 그리스 올림푸스의 모든 신들을 모시기 위한 만신전으로 세워졌다. ‘판(pan)’은 ‘모든’이고, ‘테온(theon)’은 ‘신’이므로 ‘만신전’은 ‘모든 신의 신전’이란 뜻이다. 로마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다신교를 믿었는데 판테온은 그 신들을 모신 신전인 것이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아우구스투스를 대신해 전쟁터를 누볐던 황제의 ‘칼’이었고, 황제의 사위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일찍 남편을 여읜 무남독녀 줄리아를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다(기원전 21년). 그녀는 아직 10대였고, 아그리파는 40대 초반이었다. 이 결혼에서 3명의 아들을 포함한 5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황제는 외손자들을 양자로 삼아 제국을 물려주고자 했다. 건강했던 아그리파와 외손자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황제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판테온 신전, 고대 로마 신전 중 가장 거대하고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판테온은 서기 80년 로마를 힙쓴 대화재로 큰 피해를 당했으나 다행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 때 전면 개축(118~128년)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오현제(五賢帝)’의 세 번째 황제다. 팍스 로마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이때 판테온도 재건했다. 로마를 세계 제국으로 만든 관용의 정신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스스로 건축가를 자처할 정도로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하드리아누스는 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돌만으로 완벽한 원형 돔의 판테온을 만들어냈다. 기초를 든든하게 다지기 위해 깊이 4.5m, 너비 10m의 콘크리트를 지하에 묻고 그 위에 원통 벽을 두께 6.2m로 올렸다. 이 콘크리트 기초 위에 높이 43.2m, 실내 지름 43.2m의 건물을 지었다. 신전의 외곽 입구는 12.5m짜리 기둥 8개가 받치고 있다.

판테온은 고대 로마의 신전 중 가장 거대하고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지금도 예배장소로 사용되는 고전 시대의 유일한 신전이다. 특히 손상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천장의 거대한 돔 때문에 판테온은 전 세계 건축가들의 단골 순례지로 명성이 높다. 돔은 위로 갈수록 가벼운 재료를 사용했다. 그래서 기둥없이 만들어진 돔이지만 오랜 세월을 끄떡 없이 버티고 있다. 돔의 폭(43.2m)은 원통형 벽체의 높이와 정확하게 일치해 건물의 실내 전체는 정육면체 안에 정확히 들어갈 수 있다. 즉 내부 공간에 완벽한 구형을 꼭 끼어 넣을 수 있다.

 

판테온은 ‘만신전(萬神殿)’이다. ‘모든 신을 모시는 신전’이다

판테온 신전은 르네상스 시대에 많은 성당의 모델이 되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설계한 피렌체 두오모의 돔,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의 돔도 판테온을 모델로 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올릴 때 르네상스 교황들은 과거 우상을 숭배하던 판테온 만신전보다 무조건 커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당시의 석축공법으로는 그 이상 높게 지을 수 없어서 결국 판테온보다 1m 이상 짧아진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영국 브리티시박물관,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토마스 제퍼슨 원형 건물, 뉴욕 콜롬비아 대학도서관, 워싱턴디시의 제퍼슨 기념관 등에도 판테온 돔의 모습이 있다.

판테온 신전에는 창문이 없다. 대신 돔 한가운데에 지름 8.92m의 거대한 구멍(오쿨루스)을 뚫어 놓았다. 당시는 구멍을 완전히 덮을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이 정도 규모의 돔에서는 아무리 가벼운 석재와 시멘트를 사용해도 자체 무게 때문에 그대로 주저앉기 때문이다.

열주 사이로 보이는 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두운데 들어가면 돔 꼭대기의 원형 창을 통해 한 줄기 빛이 내려오다 어느 순간 포말처럼 흩어지면 신전 안을 은은하게 비춘다. 신기하게도 기도하기에 딱 적당한 밝기다. 공명(共鳴) 역시 완벽하다. 내부를 가득 메운 여행객들이 아무리 웅성거려도 시끄럽지 않다. 신전 전체가 마치 방음벽처럼 소리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천장 한복판에 뚫린 구멍에서 내려오는 빛은 태양 각도에 따라 벽에 장식되어 있는 신전 7개를 비춘다. 주피터(제우스), 아폴로(아폴론), 비너스(아프로디테) 같은 신이 신전의 주인들이다. 천장 구멍을 통해서 내려오는 빛의 궤적은 하루의 경과와 절기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전기시설이 없던 당시에 넓은 신전 내부를 고루 밝히는 조명시설 역할도 했다. 비가 오면 천장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해 판테온의 바닥은 중앙을 살짝 높게, 가장자리는 낮게 설계하고 바닥 곳곳에 구멍을 뚫어 빗물이 바로 흘러가도록 했다.

만신전으로 지어진 판테온이 ‘순교자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바뀐 것은 609년 교황 보니파시오 4세(608~615)의 칙령에 의해서였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의 신전에서 기독교 성전으로 바뀐 것이다. 그 덕에 판테온은 다른 고대 로마의 건축물과는 달리 채석장으로 전락하지 않고 지금까지 그나마 제대로 잘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렇다고 수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6세기 초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 제대를 장식하는 ‘천개’를 만들 때 판테온에 있는 청동 구조물과 청동 장식물들을 모조리 떼어갔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판테온 입구의 거대한 청동문은 200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판테온 안에는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그의 아들 움베르토 1세 왕의 묘소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천재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의 무덤이다. 이들 말고도 화가인 안니발 카라치, 작곡가 아르칸젤로 코렐리, 건축가 발다사레 페루치 등이 묻혀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과 성 이냐시오 성당

성 이냐시오 성당은 1626~1650년 바로크 스타일로 건축되었다. 외관은 튀지 않고 단정하다. 건축비 때문에 중앙의 돔을 만들지 못해 화가 겸 수도사인 안드레아 포조가 평평한 천장에 실제로 돔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그림을 그려놓았다. 착시 그림의 원조 격인 셈이다. 포조가 그린 돔 그림 옆의 천장화 역시 돔처럼 착시를 유도했다.

성 이냐시오 성당

 

성당의 수호성인은 예수회의 설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이다. 이냐시오는 스페인 북부 로욜라 지역에서 귀족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허영과 사치로 보내다 1517년 군에 입대해 프랑스군과 전투 중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치료를 받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을 기록한 책을 읽고 감화되었다. 곧 지난 인생을 반성하고 책 속의 성인들 삶을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이냐시오는 회심 후 동북쪽으로 450㎞ 가량 떨어진 카탈루냐 주 몬세라트 산의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가서 기사의 상징인 검을 성모조각상에 바치고 순례 지팡이를 들었다. 입고 있던 비싼 옷은 거지에게 주고 감자포대로 짠 두루마리를 입었다. 그리고 1522년 몬세라트 산에서 15㎞ 떨어진 만레사의 한 바위산 작은 동굴로 들어가 1년 동안 극기와 금욕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묵상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 무렵 기독교를 둘러싼 현실은 혼돈 그 자체였다. 수도원의 세속화가 심해졌고 교황직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다. 결국 독일의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 바람을 일으키고 교회 밖에서는 성직자들의 세속적 타락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이런 시기에 이냐시오는 1534년 6명의 제자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하고 1537년 가톨릭 사제품을 받았다. 예수회는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공인받아 정식 교단으로 승격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이 마귀를 몰아내는 것을 묘사한 루벤스의 ‘성 이냐시오의 기적'(1617~1618년)

 

이냐시오는 새로운 유형의 수도생활을 선보였다. 수도사들은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가 이웃들과 함께 생활하고 대중의 말로 얘기하고 지역 풍습을 따랐다. 청빈, 정결, 순명을 서약했으며 현지 문화와 접목되도록 복음을 토착화했다. 격식도 걷어내 수도회를 특징짓는 복장은 물론 수도사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을 없앴다.

이런 이냐시오 영성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가톨릭 입장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파도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은 아메리카 신대륙은 물론 중국과 일본으로도 파견되어 활발히 활동했다. 이냐시오는 1556년 65세로 선종했다. 그로부터 66년 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스페인의 한 작은 동굴에서 작은 샘물처럼 시작된 이냐시오의 영성은 500년 동안 전 세계로 흘러 지난 2013년 마침내 첫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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