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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⑤] 로마(2) : 바티칸시국, 성베드로 대성당, 바티칸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 라파엘로

by 김지지

 

■바티칸시국(로마교황청), 로마 속의 작은 도시국가

 

바티칸시국(市國)은 교황이 다스리는 가톨릭의 총본산이자 로마 속의 작은 도시국가다. 면적이 경복궁의 1.3배 정도밖에 안되어 단일 국가로는 세계에서 가장 작다. 바티칸이란 지명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라는 라틴어 ‘바테스(Vates)’에서 유래한다. 교황은 19세기까지 로마는 물론 이탈리아 반도 중부까지 교황령으로 삼아 지배했으나 이탈리아 통일왕국이 들어선 후 1870년 강제 합병되어 방대한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그러다가 교황 비오 11세(재위 1922~1939)가 1929년 2월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무솔리니와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는 라테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립국가가 되었다. 통치 지역은 현재 교황청의 영역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그 과정에 대해 본인의 책 ‘20세기 이야기’(답다 출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로마는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됨으로써 이탈리아는 전 국토가 1400년 만에 하나가 되는 감격을 누렸다. 하지만 당시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에게 그날은 치욕의 날이었다.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비난하고 파문했으나 국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1871년 6월 수도를 로마로 옮겨 통치를 강화했다. 이로써 교황은 세속적인 지배권을 상실하고 교회국가도 소멸했다.

교황이 자신의 왕국 없이 오로지 종교적·도덕적 권위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에게 연금 지급, 일신상의 불가침성 및 주권 인정, 모든 영적 기능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했다. 하지만 교황 비오 9세는 로마에 포위된 ‘바티칸의 수인’을 자처하며 이탈리아 정부와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그것은 후임 교황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50여 년이 흘러 1922년 2월 6일 비오 11세가 새 교황에 등극했다. 그는 바티칸의 갑갑함을 토로하며 바티칸이 법적이고 실제적인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정부와 협상할 뜻이 있음을 내비쳤을 때 이탈리아 총리는 1922년 10월 30일 로마에 무혈 입성하고 이튿날 39세 나이로 역대 최연소 총리가 된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당시만 해도 아직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파시즘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자신의 파시즘 실험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러면 이탈리아 내부에 만연한 친교황파와 친국왕파 사이의 분열을 종식해야 했다. 그의 정치적 실험은 분명 사회주의적이고 반교회적이었는데도 그는 교황을 부정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실현이라는 자신의 야심만만한 목표를 이루려면 이탈리아 내부의 화해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교황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먼저 반교회적 법률을 철회했다. 학교, 재판소, 병원 안에 십자가를 달게 하고 밀라노 가톨릭대를 인가했다. 군목 제도를 도입하고 신학생들에게 병역면제의 특혜를 부여했다. 국유화된 교회와 수도원은 돌려주고 교회력도 승인했다. 이러한 조치는 점차 파시즘에 대한 가톨릭 측의 호의적인 공감을 끌어냈다.

이제 교황에게 중요한 것은 1870년 교회국가가 빼앗긴 로마를 어떤 조건으로 다시 찾아오는가였다. 이탈리아 정부가 과거 토지를 불법으로 점유한 데 대해 어떻게 보상을 받고 교황의 독립성을 어떻게 보증받아야 하는지도 관건이었다. 양측은 1926년 여름 첫 회담을 열었다. 협상은 난관을 거듭하면서도 2년 반 동안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다행히 교황청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한 무솔리니 정권과, 세계 가톨릭교회의 상징으로서 신권을 회복해야 할 교황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합의안을 도출할 수 있었다.

협상 결과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국가로 승인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가톨릭 교회가 국가의 유일한 종교임을 인정하고 교황의 절대적 주권과 독립을 보장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로마제국 시대의 장대한 영토 대신 바티칸 궁전, 12개 성당, 베네치아 궁 등이 포함된 0.44㎢ 크기의 바티칸시국을 선택했다. 또한 옛 교회국가의 엄청난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17억 5,000만 리라의 거금을 보상받고 연간 5%의 이자부 채권인 이탈리아 정부 발행의 장기공채 10억 리라를 받았다.

이런 내용을 담은 조약은 1929년 2월 11일 라테란 궁전에서 무솔리니와 교황청 국무장관 피에트로 가스피리 추기경이 서명함으로써 완결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탈리아는 하느님에게 돌아왔고 하느님도 이탈리아에 돌아왔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라테란 협정이 유효 투표의 98.4%라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자 무솔리니는 6월 7일 바티칸을 찾아가 가스피리 추기경과 비준서를 교환했다.

비오 11세는 무솔리니를 가리켜 “아마도 이런 인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그와의 만남을 허락한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파시스트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말은 파시즘의 선전 문구로 왜곡되었다. 결과적으로 교황과 무솔리니의 상호 인정은 외교 무대에서 파시즘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준 셈이 되었다.

교황이 무솔리니의 의중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탈리아 국회의 비준동의과정에서 무솔리니의 본색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교황은 무솔리니가 “우리는 그들(교황)에게 그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영토만을 넘겨주었다”라고 조롱하듯 말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교황 역시 얻은 게 많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비오 11세 말년에 무솔리니의 인종법 제정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지만 교황은 인종법을 반대하면서도 무솔리니와의 관계는 끊지 않았다.>

비오 1세 교황(왼쪽)과 무솔리니

 

현재 바티칸시국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해 13개 건물 그리고 로마 동남쪽 약 120㎞ 지점에 있는 교황의 여름철 관저인 카스텔 간돌포가 영토의 전부다. 인구는 1000명 안팎이며 스위스 출신의 용병 수비대 100여 명이 치안을 담당한다.

현재 바티칸시국에서 대표적인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도서관, 성 베드로광장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들 중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제외한 건물들의 총칭은 바티칸 궁전이다. 궁전은 장중하고 웅장한 1400여 개의 방과 크고 작은 20개의 중정(건물 안이나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교황이 직접 거주하고 집무하는 곳은 사도 궁전(팔라초 아포스톨리코)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역동적이고 화려한 돔이 인상적

 

성 베드로(산 피에트로) 대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관람객들은 거대한 기둥들, 화려한 돌들로 만들어진 벽, 웅장한 천장 등 어마어마한 규모를 보고 놀라게 된다.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며 보게 되는 수백 개의 명품 조각들 앞에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성당 내부는 내가 살아오면서 본 건물 중 가장 웅장했다.

내부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터져나온 감탄사는 “18”이었다. 그것말고는 그 순간 격렬하게 밀려오는 부러움과 무력감을 달리 표현할 표현을 알지 못했다. “18”은 내가 사용하는 감탄사 중 하나다. 성당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길이는 220m, 너비는 150m, 높이는 136.5m나 되었으며 500개의 기둥, 44개의 제단, 450개의 조각, 5개의 문으로 이뤄져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

 

원래 성 베드로 대성당 자리에는 1세기 경 칼리굴라 황제(재위 37~41) 때 건립한 격투기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네로 황제는 이 경기장에서 수많은 기독교인을 죽였다. 67년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3세기 들어 기독교는 특유의 응집력으로 일반 시민은 물론 로마의 전통 귀족과 엘리트층까지 파고들었다. 기독교도의 수는 어느덧 로마 인구의 10%에 육박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313년 밀라노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이러한 대세를 추인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칙령 1년 전, 십자가를 앞세운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승리로 기독교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도 기독교의 협조가 긴요했다.

밀라노 칙령 후 기독교도들은 오랫동안 금지된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자 종교예식을 치를 수 있는 장소가 절실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대대적으로 교회 건설을 지원했다. 그는 베드로가 묻혀있는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베드로성당을 봉헌하기로 했다. 성당은 324년 11월 18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집전으로 축성식이 거행되어 349년 준공되었다. 베드로 성당은 당시 순례자들의 랜드마크이자 숙소로 애용되었다. 역대 교황들은 베드로성당보다 먼저 지어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라테라노 대성당(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거주했다.

두 성당은 5세기 시작된 이민족의 잇따른 침입으로부터 14세기의 아비뇽 유수(1309∼1377) 때까지 계속 황폐해졌다. 그러자 사실상 폐허상태가 된 로마를 재건하려는 교황들의 노력이 145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고전주의의 중심이고 가톨릭의 수도인 로마가 피렌체에 비해 규모도 작고 경제력도 뒤져있다는 사실을 교황들이 깨닫고 로마 재건에 팔을 걷어부친 것이다.

특히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고 교회의 권위를 높이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황폐해진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증개축하기로 결정한 후 설계를 공모했다. 최종적으로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의 설계안이 확정되었다. 말이 증개축이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재위 306~337) 시절에 지어진 교회를 전부 헐고 새로 짓는 대역사였다. 율리오 2세는 바티칸 박물관도 함께 지을 것을 브라만테에게 요청했다.

1506년 공사 시작해 1626년 준공

그런데 이 거대한 성당과 박물관을 함께 신축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재정을 마련한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팔았는데 사실 면죄부는 이미 많은 교황들이 극도의 사치와 유흥으로 바닥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판매하고 있었다.

교황들은 면죄부를 파는데 그치지 않고 성직까지 매매하는 등 심각한 부패를 저질렀다. 사제들은 물론 탁발 수도사들까지 면죄부를 팔고 다니는 꼴불견을 연출했다. 심지어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는 죽은자가 살아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어도 동전이 교회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그 순간 영혼은 지옥에서 빠져 나와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며 죽은 자들에 대한 면죄부까지 팔았다.

천국의 자리를 예약한 돈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에도 쓰였지만 교황들의 사치스러운 생활비에 더 많이 쓰였다. 특히 독일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면죄부를 팔았는데 이는 1517년 독일에서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피는데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악습은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 때 극에 달했다. 그는 성직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이권을 좇는 정치인에 가까웠다. 다만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명문가였던 메디치 가문의 후손답게 인문학과 예술에는 조예가 깊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석이 놓인 것은 율리오 2세 교황 때인 1506년 4월이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무덤 위에 그리스 십자가형의 건축을 시작했으나 율리오 2세 교황이 1513년, 브라만테가 이듬해에 눈을 감아 중단되었다. 결국 새 건물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옛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성전마저 이미 철거되고 없어지자 브라만테에게 “파괴자”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후 신축 공사는 라파엘로와 줄리아노 다 산갈로가 추진한 건축안이 1515~1518년 구체화함으로써 라틴 십자가형의 구도가 등장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라틴 십자가형은 정사각형 모양의 그리스 십자가형과 함께 기독교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십자가형으로 아래쪽이 위쪽에 비해 길쭉한 장축형 모양이다. 그러나 1520년 라파엘로가 사망하자 또다시 공사가 표류했다. 그러다가 바오로 3세(재임 1534~1549년) 때에 이르러 공사가 재차 추진되었다.

그런데 1546년 미켈란젤로가 건축 총책임자로 임명되면서 브라만테의 원안에 많은 수정이 가해졌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 십자가형의 구도를 채택했으나 1564년 공사 도중에 사망하고 다른 건축가들이 뒤를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했다. 1593년 우여곡절 끝에 지붕 공사가 완료되어 카를로 마데르노가 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구상한 그리스 십자가형의 구도를 라틴 십자가형으로 다시 바꾸고 1614년 대성당의 정면을 완공했다.

120년 동안 20명의 교황이 거쳐가고 10여 명의 건축가가 투입된 이 역사적인 사업은 1626년 11월 8일 대대적인 봉헌 예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성당 개축의 기본 계획안은 건축가들이 여러차례 바뀌면서 수정되고 변질되어 잡다한 구조가 되었고 성당은 일체성 없는 건축이 되어버렸다.

 

초기 로마교회 순교자들과 역대 교황들의 묘소를 지하에 안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표하는 것은 역동적이고 화려한 돔(쿠폴라)이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의 중앙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장식은 성당 내부를 환상적인 분위기로 만든다. 성당의 바닥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136.5m로 전 세계 성당 중 가장 높다. 로마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 준공 후 모든 건물을 이 성당보다 더 높게 짓지 못하도록 해 수백 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2012년 완공한 155m의 유로스카이타워가 로마에서 가장 높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쿠폴라(돔)

 

돔의 안쪽 지름은 41.5m로 1세기에 만든 고대 로마의 판테온(43.2m)과 피렌체의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42m)의 돔보다는 조금 작다. 돔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수백개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거나 중간 지점까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다가 다시 계단을 올라야 한다. 중간 지점의 회랑에서 내려다보면 대성당 안이 훤히 보인다. 꼭대기에서는 멀리 티베레 강과 로마 시내가 한눈에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성당 현관에는 5개의 문이 있다. 관람객이 입구로 사용하는 것은 왼쪽에서 네 번째인 ‘성사의 문’이다.

성당에 들어서면 오른쪽 본당 첫째 기도실에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피에타’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후 성모 마리아의 팔에 안겨진 모습의 조각상이다. 죽은 예수의 몸은 축 늘어져 있으나 인체의 골격과 손등의 핏줄들이 정교하다. 미켈란젤로의 많은 조각 중 친필 서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다.

‘피에타'(174×195㎝·1498~1499)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1972년 큰 수난을 겪었다. 한 정신병 환자가 “사탄의 작품”이라며 망치로 십여차례 찍어내려 성모 마리아의 왼팔과 얼굴을 손상시킨 것이다. 성당 측은 바닥에 떨어진 미세한 가루까지 찾아내 정성스럽게 복원했다. 이 사건 후 피에타 앞에는 방탄유리가 가로막고 있다. 성당 지하에는 성 베드로와 초기 로마교회 순교자들의 지하무덤과 역대 교황들의 묘소가 있다.

성당에 들어서면 한 가운데에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중앙 제대가 있고 그 위에 나선형의 네 기둥으로 만들어진 화려하고 거대한 청동작품이 보인다. 교황 우르바노 8세(재위 1623~1644)의 의뢰를 받아 당대 최고 건축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가 만든 높이 30m 높이의 발다키노다. 베르니니는 1633년 6월 29일 성 베드로의 축일에 발다키노를 완성했다.

발다키노는 불단이나 제단 위의 덮개를 뜻하는 불교 용어 ‘천개(天蓋)’와 같은 의미로 순 우리말로는 ‘닫집’이라고 한다.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올리는 제단, 교황의 옥좌 위를 가려주는 지붕을 말한다. 베르니니는 1623년 성 베드로의 지하 무덤 바로 위에 위치한 1층의 제단 주변에 발다키노 작업을 시작해 11년 만인 1634년 완성했다. 부족한 청동의 상당량을 판테온에서 떼 와 세간의 원성을 샀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작 ‘발다키노’. 1633년 완성

 

▲성 베드로 광장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는 바로크 건축의 걸작인 베드로 광장이 펼쳐진다. 길이가 각각 240m, 340m인 광장 입구 도로 위에는 흰색 선이 그려져 있다. 이탈리아와 바티칸시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다. 광장은 교황 알렉산데르 7세(재위 1655~1667) 때인 1655년 베르니니의 지휘로 공사를 시작해 12년이 지난 1667년 완성했다.

광장 양쪽에는 마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거대한 기둥 숲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반달형 회랑(지붕이 있는 긴 복도)이 있다. 회랑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15m 높이의 도리아식 둥근 기둥 284개가 네 줄로 서 있다. 기둥 위에는 140명의 성인과 순교자의 동상이 한 줄로 세워져 있다. 이 회랑과 광장 역시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광장 한 가운데에 40년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높이 25.5m, 무게 320t에 이르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대성당 입구에서 바라본 성 베드로 광장과 오벨리스크

 

■바티칸 박물관, 역대 교황들의 수집 예술품 집합소

 

바티칸박물관 역시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율리오 2세는 1503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동안 모아왔던 로마 시대 조각품들을 선임 교황인 인노첸시오 8세(1484~1492) 때 건립한 벨베데레 궁전 안의 정원으로 옮겨놓았다. 교황은 1506년 발견된 ‘라오콘 군상’도 정원에 설치한 뒤 로마 시민들이 볼 수 있게 그 무렵 성 베드로 대성당의 증개축을 맡고 있는 브라만테에게 박물관 건립을 요청했다.

교황 율리오 2세. 라파엘로 작

 

브라만테는 벨베데레 정원을 둘러싼 건물의 벽을 파서 그 벽감(壁龕) 속에 율리오 1세의 수집품들을 배치하면서 복도를 길게 만들어 다른 건물들과 연결되도록 설계했다. 그때부터 18세기까지 여러 교황들을 거치면서 수집품의 양이 많아지고 종류가 다양해졌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바티칸박물관은 1400개가 넘는 바티칸 궁전의 몇몇 건물이나 방에 역대 교황들이 수집한 예술품들을 전시한 곳이다.

바티칸박물관은 7만 개의 유물·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예술품은 2만 개 정도다. 전시 내용을 보면 박물관이라기보다는 미술관에 더 가깝다. 일반에 공개된 것은 교황 클레멘스 14세(재위 1769~1774) 때인 1773년이다.

박물관 건물은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있다. 1층에는 중세 때부터의 각종 그림과 르네상스기의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놓은 회화전시관, 시스티나 예배당 등이 있고 2층에는 지도의 방, 라파엘로의 방 등이 있다.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 대부분은 주로 위의 장소를 찾지만 이것 말고도 전시관은 많다. 너무 많고 인기가 적어 찾아가지 않을 뿐이다. 그중에는 고대 이탈리아 반도의 주인인 에트루리아인들의 유물을 전시해놓은 에트루스코 전시관, 각종 조각을 복도에 전시해놓은 키아라몬티 전시관, 이집트에서 가져온 박물관 등이 있다.

바티칸박물관과 시스티나 예배당은 사시사철 관광객이 밀려들기 때문에 당일 티케팅하려면 최소 2~3시간의 허비를 각오해야 한다. 인터넷 예매 등으로 미리 표를 확보해야 대기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다. 또하나 불편한 것은 영어 안내판이 없거나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전에 관련 지식을 숙지하지 않고는 예술품의 제목조차 모르고 지나갈 때가 많다. 인파에 밀리다보니 눈과 머리와 가슴으로 담지 않고 자꾸 사진을 찍으며 이동하는 내 모습이 불만스러웠다.

바티칸박물관 입장권

 

▲피냐정원, 솔방울 청동조각, 라오콘 군상

박물관의 입구문을 통과하고 나선형 계단을 걸어 올라가 건물 밖으로 나가면 4m 높이의 솔방울 청동조각이 있는 피냐정원이 나타난다. 솔방울 조각은 교황 비오 4세(재위 1559-1565) 때 제작된 것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있다가 1608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솔방울 조각 뒤 둥근 돔 형태의 내부 벽감은 판테온을 모방해 만들었고 솔방울 조각 양옆의 계단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 솔방울 때문에 ‘솔방울 정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로마에서 소나무는 영광, 승리, 영원성을 상징한다. 길거리 가로수 중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도 높이 치솟아 고고함을 뽐내는 우산소나무(버섯소나무)다.

피냐 정원. 왼쪽이 ‘지구 안의 지구’ 황동상. 멀리 솔방울 청동상이 보인다.

 

피냐정원은 바티칸박물관의 정원 중 가장 크다. 미로처럼 복잡한 박물관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잘 모르겠거나 헷갈려 하는 방문자들에게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다. 직사각형 모양의 정원 둘레 건물 벽감에는 여러 조각 입상이 전시되어 있다. 정원 한가운 데에는 황동으로 만든 ‘지구안의 지구의’가 있다. 1960년 로마올림픽을 기념해 제작된 ‘지구안의 지구의’는 오염되고 멸망하는 지구를 형상화했다. 바티칸박물관 내 유일한 현대 조형물이다.

다음 순서는 바티칸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유물과 예술품들을 감상하는 것인데 피냐정원에서 시작된 가이드의 과도한 설명으로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을 직접 보면서 설명하려면 관광객이 너무 많아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가이드가 피냐정원 한 구석에 걸려있는 1m쯤 되는 크기의 천지창조 그림의 사진 앞에서 장시간 설명하면서 한정된 시간만 허비했다. 디테일은 각자 책을 보거나 인터넷을 통해 이해하면 되는 것을 가이드가 마치 자신의 지식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그림 장면마다 일일이 그것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답답했다. 그런 설명은 기억에 오래 남지도 않는다. 이처럼 융통성없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단체관광은 시간의 절대부족으로 눈으로 보아야지 일일이 말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피냐정원에서 실내로 들어가면 고대 회화관을 거쳐 고대 조각관이기도 한 벨베데레 정원이 나타난다. 8각형의 정원 주변으로 회랑이 구성되어 있는데 회랑의 벽을 판 벽감 속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조각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에는 바다의 신 넵튠 조각상, 기원전 4세기 작품인 벨베데레의 아폴로상, 기원전 1~2세기의 근육질 남성의 토루소(머리·팔·다리를 제외한 가운데 부분만의 조상)인 벨베데레의 토루소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기원전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라오콘 군상’이다. 라오콘은 그리스군이 선물한 목마를 트로이 안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트로이의 사제다. 분노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바다의 뱀 2마리를 보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을 꽁꽁 감아 죽였다. ‘라오콘 군상’에는 뒤틀린 라오콘의 육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과 핏줄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라오콘의 군상

 

1506년 1월 14일, 한 농부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인근의 포도밭에서 ‘라오콘 군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 라오콘의 오른팔은 잘라지고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사라진 팔이 어떤 자세였을까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대부분은 팔이 쭉 펴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다만 미켈란젤로만은 이런 근육의 움직임에는 팔을 쭉 편 자세가 나올 수 없다며 구부리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두들 믿지 않았으나 몇 백년이 지난 1905년 발견된 팔의 원본을 보니 미켈란젤로의 말대로 팔이 구부러져 있었다, 근육만을 보고 구부린 자세라는 것을 확인한 미켈란젤로의 안목에 모두를 놀라워했다.

 

▲라파엘로의 방, 서명의 방

벨베데레 정원을 지나면 황금빛 천장의 ‘지도의 방’이 나온다. 길이가 120m, 폭이 6m 정도 되는 긴 복도여서 엄밀히 말하면 ‘지도의 복도’인 이곳의 좌우 벽에는 세계 각국의 그림지도가 형형색색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탈리아의 동해와 서해 지역도 40개의 사각형으로 분류되어 벽화로 그려져있다. 방의 이름은 여기서 기인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재위 1572~1585) 때 설계하고 완성했다.

‘지도의 방’. 황금색의 복도 천장이 인상적이다.

 

‘지도의 방’을 나오면 ‘시스티나 예배당’과 함께 바티칸박물관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라파엘로의 방’이다. 이 방을 자신이 그린 벽화로 장식한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와 함께 르네상스 예술을 대표하는 3대 거장이다. 당대에 이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우아한 아름다움의 화신’이라는 뜻의 ‘그라치아’로 불렸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조르조 바사리(1511~1574)에 따르면 라파엘로는 재능있고 상냥하며 유쾌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라파엘로 자화상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북동부의 마르케주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궁정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의 기초를 배우던 중 8살 때 어머니가, 11살 때 아버지가 사망해 고아가 되었다. 16살 때인 1499년 중부 지역의 페루자로 가서 초기 르네상스 대가 중 한 명인 피에트로 페루지노(1450~1523)의 공방에서 그림을 배웠다. 17살 때 그림을 주문받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 20대 초부터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담은 성모자상을 많이 그려 ‘성모의 화가’로 불렸다. 대표적인 성모자상은 독일의 드레스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시스티나 성모’(265×196㎝·1514년)다. 교황과 귀부인을 많이 그려 초상화로도 명성을 얻었다. 최고의 초상화로 꼽히는 것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82×67㎝·16세기경)이다.

라파엘로는 25살이던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갔다. 당시 교황은 사실상 폐허 상태인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고 교회의 권위를 높이려는 열망에 가득 차 대규모 건축과 조경사업을 추진했다. 교황은 도나토 브라만테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박물관을 짓게 하고 미켈란젤로에게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를 그리게 했다. 라파엘로에게는 자신이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4개의 방을 벽화로 장식하는 임무를 맡겼다. 당시 4개의 방에는 다른 화가들의 프레스코화가 벽을 덮고 있었으나 교황은 그림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가장 먼저 조성되고 유명한 방이 ‘서명의 방’

오늘날 ‘라파엘로의 방’으로 불리는 4개의 방은 그림이 그려진 순서에 따라 ‘서명의 방’, ‘엘리오도로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 ‘콘스탄티누스의 방’으로 구분된다. 그중 가장 먼저 조성되고 유명한 방이 ‘서명의 방’이다. 라파엘로는 ‘서명의 방’ 네 벽에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제자들과 함께 철학, 신학, 시, 법률을 주제로 한 4점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서명의 방’. 왼쪽 프레스코화가 유명한 ‘아테네 학당’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 철학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이다. ‘아테네 학당’ 제목은 대부분의 그림이 그러하듯 후대에 붙여졌다. 라파엘로는 고대 학자들이 모인 지성의 전당을 상상하며 50여 명의 고대 그리스인들을 그림 속으로 불러왔다. 철학자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헤라클레이토스는 물론이고 수학자인 피타고라스와 에우클레이데스(영어명 유클리드) 등이 그들이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플라톤의 모델로, 미켈란젤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델로, 브라만테는 유클리드의 모델로 등장시켜 동시대 선배 화가들에게 대한 경외와 존경심을 벽화에 담아냈다. 자신의 얼굴은 유클리드 뒤쪽 구석에 그려넣었다. 화면 밖의 관람객을 응시하는 검은색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라파엘로다.

철학에 이어 신학을 주제로 한 ‘성체에 관한 논쟁’ 등까지 그려진 ‘서명의 방’이 1512년 완성되자 교황은 나머지 3개 방의 벽화도 라파엘로에게 맡겼다. 그래서 완성된 방들이 ‘엘리오도로의 방’(1512~1514년) ‘보르고 화재의 방’(1514~1517년), ‘콘스탄티누스의 방’(1517~1524년)이다. 방들마다 벽에는 4개의 벽화가 그려졌다. 교황의 개인 접견실로 사용해온 ‘엘리오도로 방’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들로 채워졌다.

라파엘로가 ‘엘리오도로 방’의 벽화를 한창 그리고 있던 1513년 1월 그를 로마로 불러들인 교황 율리오 2세가 서거하고 레오 10세(재위 1513~1521)가 교황으로 즉위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고있던 브라만테까지 1514년 죽자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했다. 1515년에는 로마의 고대 유물 관리 책임자 겸 바티칸의 예술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때문에 바빠진 라파엘로 대신 제자나 조수가 대부분의 벽화를 그린 ‘보르고 화재의 방’과 ‘콘스탄티누스 방’의 벽화는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방’을 장식하고 있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 그림

 

‘보르고 화재의 방’은 레오 10세에게 영향을 준 두 교황 즉 교황 레오 3세와 레오 4세의 일화들을 표현하고 있다. 레오 4세 교황의 그림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보르고 지역에서 847년 화재가 나자 레오 4세가 구호팀을 보내 축복하는 장면과 사라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오스티아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로마군을 축복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방’ 벽화 중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312년 최대 정적인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밀비우스 다리 전투 그림도 있다.

라파엘로는 행정가로서의 바쁜 일상 속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된 ‘그리스도의 변모’(276×405㎝)는 1518년부터 2년간 그린 초대형 그림이다. 라파엘로는 그림의 대부분을 그렸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1520년 세상을 떠나 마지막 작업은 제자 줄리오 로마노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파엘로는 재능있고 상냥하고 유쾌한 인물

라파엘로의 말년 그림 중에는 현재 로마 국립고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라 포르나리나, 혹은 젊은 여인의 초상화’(60×85㎝·1519년)라는 누드 초상화도 있다. 이 그림 제목 역시 후세 사람이 붙인 것이다. ‘라 포르나리나’는 ‘제빵사의 딸’이라는 뜻으로 라파엘로가 사랑한 그림 속 주인공 마르게리타 루티를 일컫는다. 이 빵집 아가씨에 대한 라파엘로의 사랑이 얼마나 각별했는지는 그의 많은 작품 속에 그녀의 얼굴이 수없이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때로는 성모 마리아로, 때로는 성녀 세실리아로, 때로는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로 등장한다.

‘라 포르나리나, 혹은 젊은 여인의 초상화(’(60×85㎝·1519년, 로마 국립고대미술관 소장)

 

그중 대표적인 그림이 ‘라 포르나리나’다. 라파엘로는 마르게리타를 사랑했으나 교황청의 유력인사인 한 추기경에게서 자신의 조카와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1514년 마지못해 약혼 제의를 받아들였지만 결혼은 3~4년 후에 한다는 단서를 달아 급한대로 정략결혼은 피했다.

라파엘로는 마르게리타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칫 두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런저런 이유로 약혼녀와의 결혼을 미루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추기경의 심기를 마냥 불편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약혼녀가 1520년 초 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약혼녀가 죽기 전, 라파엘로는 마르게리타와의 사랑을 그림으로나마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마르게리타가 오른손으로 왼팔 위쪽에 감겨진 리본을 가리키는 모습을 그렸다. 리본에는 ‘라파엘로 산치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림에서 마르게리타는 왼손에 약혼반지를 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비밀리에 약혼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그림을 거의 완성했을 무렵 얘기치 않은 병에 걸려 1520년 4월 6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라파엘로 장례식이 끝난 후 라파엘로의 작업실에서 이 그림을 처음 발견한 이는 제자였다. 그는 스승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마르게리타의 초상화에서 손가락에 끼워진 약혼반지를 지웠다. 이 초상화가 약혼 기념 초상이라는 사실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2001년 이탈리아 복원전문가들의 X-레이 투시 작업에 의해서였다. 제자의 덧칠 아래 숨죽이고 있던 루비 반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라파엘로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로마의 만신전인 판테온에 묻혔다. 라파엘로의 석관 위 오른쪽에는 1520년 같은해 죽은 공식 약혼녀가 묻혀있다. 마르게리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판테온 옆의 수도원으로 잠적해 수녀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시스티나 예배당

‘라파엘로의 방’은 시스티나 예배당과 연결된다. 예배당은 박물관 입구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방문객 인파를 따라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당에 다다르게 된다. 예배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과도 연결되어 있어서 사실상 한 건물이나 다름없다.

시스티나 예배당은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의 지시로 1475~1482년에 건립되었다. 예배당 이름은 교황의 이름에서 땄다. 예배당이 완공되자 식스토 4세는 양쪽 벽면에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로셀리 등 피렌체와 움브리아의 르네상스 거장들에게 성경을 주제로 한 벽화를 그리게 했다. 그래서 그려진 그림이 ‘모세의 일생’ ‘예수의 일생’ ‘성모 승천’ 등이다.

예배당은 규모가 작고 단순해 보이지만 상징적 의미는 크다. 구약성경에 묘사된 솔로몬의 성전 치수와 똑같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황 유고 시 추기경들이 모여 후임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진행되는 곳도 이곳이다.

길이 40.23m, 폭 13.41m, 높이 30m의 단순한 직사각형에 좌우 상단에 6개의 아치형 창문이 있다. 예배당의 천장과 정면 벽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있다. ‘천지창조’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요청에 따라 1508~1512년, ‘최후의 심판’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바오로 3세의 요청에 따라 1534~1541년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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