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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⑤] 로마(2) : 바티칸시국, 성베드로 대성당, 바티칸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 라파엘로

by 김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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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시국(로마교황청), 로마 속의 작은 도시국가

 

바티칸시국(市國)은 교황이 다스리는 가톨릭의 총본산이자 로마 속의 작은 도시국가다. 면적이 경복궁의 1.3배 정도밖에 안되어 단일 국가로는 세계에서 가장 작다. 바티칸이란 지명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라는 라틴어 ‘바테스(Vates)’에서 유래한다. 교황은 19세기까지 로마는 물론 이탈리아 반도 중부까지 교황령으로 삼아 지배했으나 이탈리아 통일왕국이 들어선 후 1870년 강제 합병되어 방대한 영토를 모두 상실했다. 그러다가 교황 비오 11세(재위 1922~1939)가 1929년 2월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무솔리니와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는 라테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립국가가 되었다. 통치 지역은 현재 교황청의 영역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그 과정에 대해 본인의 책 ‘20세기 이야기’(답다 출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로마는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됨으로써 이탈리아는 전 국토가 1400년 만에 하나가 되는 감격을 누렸다. 하지만 당시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에게 그날은 치욕의 날이었다.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비난하고 파문했으나 국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1871년 6월 수도를 로마로 옮겨 통치를 강화했다. 이로써 교황은 세속적인 지배권을 상실하고 교회국가도 소멸했다.

교황이 자신의 왕국 없이 오로지 종교적·도덕적 권위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에게 연금 지급, 일신상의 불가침성 및 주권 인정, 모든 영적 기능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했다. 하지만 교황 비오 9세는 로마에 포위된 ‘바티칸의 수인’을 자처하며 이탈리아 정부와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그것은 후임 교황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50여 년이 흘러 1922년 2월 6일 비오 11세가 새 교황에 등극했다. 그는 바티칸의 갑갑함을 토로하며 바티칸이 법적이고 실제적인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정부와 협상할 뜻이 있음을 내비쳤을 때 이탈리아 총리는 1922년 10월 30일 로마에 무혈 입성하고 이튿날 39세 나이로 역대 최연소 총리가 된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당시만 해도 아직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파시즘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자신의 파시즘 실험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러러면 이탈리아 내부에 만연한 친교황파와 친국왕파 사이의 분열을 종식해야 했다. 그의 정치적 실험은 분명 사회주의적이고 반교회적이었는데도 그는 교황을 부정하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실현이라는 자신의 야심만만한 목표를 이루려면 이탈리아 내부의 화해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교황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먼저 반교회적 법률을 철회했다. 학교, 재판소, 병원 안에 십자가를 달게 하고 밀라노 가톨릭대를 인가했다. 군목 제도를 도입하고 신학생들에게 병역면제의 특혜를 부여했다. 국유화된 교회와 수도원은 돌려주고 교회력도 승인했다. 이러한 조치는 점차 파시즘에 대한 가톨릭 측의 호의적인 공감을 끌어냈다.

이제 교황에게 중요한 것은 1870년 교회국가가 빼앗긴 로마를 어떤 조건으로 다시 찾아오는가였다. 이탈리아 정부가 과거 토지를 불법으로 점유한 데 대해 어떻게 보상을 받고 교황의 독립성을 어떻게 보증받아야 하는지도 관건이었다. 양측은 1926년 여름 첫 회담을 열었다. 협상은 난관을 거듭하면서도 2년 반 동안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다행히 교황청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한 무솔리니 정권과, 세계 가톨릭교회의 상징으로서 신권을 회복해야 할 교황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합의안을 도출할 수 있었다.

협상 결과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국가로 승인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가톨릭 교회가 국가의 유일한 종교임을 인정하고 교황의 절대적 주권과 독립을 보장했다. 교황 비오 11세는 로마제국 시대의 장대한 영토 대신 바티칸 궁전, 12개 성당, 베네치아 궁 등이 포함된 0.44㎢ 크기의 바티칸시국을 선택했다. 또한 옛 교회국가의 엄청난 재산을 포기하는 대신 17억 5,000만 리라의 거금을 보상받고 연간 5%의 이자부 채권인 이탈리아 정부 발행의 장기공채 10억 리라를 받았다.

이런 내용을 담은 조약은 1929년 2월 11일 라테란 궁전에서 무솔리니와 교황청 국무장관 피에트로 가스피리 추기경이 서명함으로써 완결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탈리아는 하느님에게 돌아왔고 하느님도 이탈리아에 돌아왔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라테란 협정이 유효 투표의 98.4%라는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자 무솔리니는 6월 7일 바티칸을 찾아가 가스피리 추기경과 비준서를 교환했다. 비오 11세는 무솔리니를 가리켜 “아마도 이런 인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그와의 만남을 허락한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파시스트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말은 파시즘의 선전 문구로 왜곡되었다. 결과적으로 교황과 무솔리니의 상호 인정은 외교 무대에서 파시즘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멍석을 깔아준 셈이 되었다.

교황이 무솔리니의 의중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탈리아 국회의 비준동의과정에서 무솔리니의 본색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교황은 무솔리니가 “우리는 그들(교황)에게 그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영토만을 넘겨주었다”라고 조롱하듯 말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교황 역시 얻은 게 많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비오 11세 말년에 무솔리니의 인종법 제정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지만 교황은 인종법을 반대하면서도 무솔리니와의 관계는 끊지 않았다.>

비오 1세 교황(왼쪽)과 무솔리니

 

현재 바티칸시국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비롯해 13개 건물 그리고 로마 동남쪽 약 120㎞ 지점에 있는 교황의 여름철 관저인 카스텔 간돌포가 영토의 전부다. 인구는 1000명 안팎이며 스위스 출신의 용병 수비대 100여 명이 치안을 담당한다. 바티칸시국에서 대표적인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도서관, 성 베드로광장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들 중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제외한 건물들의 총칭은 바티칸 궁전이다. 궁전은 장중하고 웅장한 1400여 개의 방과 크고 작은 20개의 중정(건물 안이나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교황이 직접 거주하고 집무하는 곳은 사도 궁전(팔라초 아포스톨리코)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역동적이고 화려한 돔이 인상적

 

성 베드로(산 피에트로) 대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관람객들은 거대한 기둥들, 화려한 돌들로 만들어진 벽, 웅장한 천장 등 어마어마한 규모를 보고 놀라게 된다.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며 보게 되는 수백 개의 명품 조각들 앞에서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성당 내부는 내가 살아오면서 본 건물 중 가장 웅장했다. 내부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터져나온 감탄사는 “18”이었다. 그것말고는 그 순간 격렬하게 밀려오는 부러움과 무력감을 달리 표현할 표현을 알지 못했다. “18”은 내가 사용하는 감탄사 중 하나다. 성당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길이는 220m, 너비는 150m, 높이는 136.5m나 되었으며 500개의 기둥, 44개의 제단, 450개의 조각, 5개의 문으로 이뤄져 있다.

원래 성 베드로 대성당 자리에는 1세기 경 칼리굴라 황제(재위 37~41) 때 건립한 격투기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네로 황제는 이 경기장에서 수많은 기독교인을 죽였다. 67년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3세기 들어 기독교는 특유의 응집력으로 일반 시민은 물론 로마의 전통 귀족과 엘리트층까지 파고들었다. 기독교도의 수는 어느덧 로마 인구의 10%에 육박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313년 밀라노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이러한 대세를 추인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칙령 1년 전, 십자가를 앞세운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승리로 기독교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도 기독교의 협조가 긴요했다.

밀라노 칙령 후 기독교도들은 오랫동안 금지된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되자 종교예식을 치를 수 있는 장소가 절실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대대적으로 교회 건설을 지원했다. 그는 베드로가 묻혀있는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베드로성당을 봉헌하기로 했다. 성당은 324년 11월 18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집전으로 축성식이 거행되어 349년 준공되었다. 베드로 성당은 당시 순례자들의 랜드마크이자 숙소로 애용되었다. 역대 교황들은 베드로성당보다 먼저 지어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라테라노 대성당(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거주했다.

두 성당은 5세기 시작된 이민족의 잇따른 침입으로부터 14세기의 아비뇽 유수(1309∼1377) 때까지 계속 황폐해졌다. 그러자 사실상 폐허상태가 된 로마를 재건하려는 교황들의 노력이 1450년대 들어 본격화했다. 고전주의의 중심이고 가톨릭의 수도인 로마가 피렌체에 비해 규모도 작고 경제력도 뒤져있다는 사실을 교황들이 깨닫고 로마 재건에 팔을 걷어부친 것이다. 특히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살리고 교회의 권위를 높이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황폐해진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증개축하기로 결정한 후 설계를 공모했다. 최종적으로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의 설계안이 확정되었다. 말이 증개축이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재위 306~337) 시절에 지어진 교회를 전부 헐고 새로 짓는 대역사였다. 율리오 2세는 바티칸 박물관도 함께 지을 것을 브라만테에게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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