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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국립공원] 꼬박 20시간 걸린 설악산 공룡능선 첫 등정… 무릎은 힘들다는데 눈과 마음은 행복하다 하네

↑ 공룡능선에서 바라본 봉우리들.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대청-중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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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일


아뿔싸! 초반부터 길을 잘못들어 금강암으로 올라가다니

경기도 수지 동천역에서 50대 중반의 여동생을 만나 둘이서 설악산을 향해 출발한 것은 2018년 10월 7일 밤 12시였다. 그런데 설악산이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다. 과거 젊은 시절에는 서울에서 설악산 설악동으로 가려면 강릉, 양양, 속초 시내를 거쳐 자가용으로 최소 5시간은 걸렸다. 그렇게 멀었던 설악산이 경기 수지에서 2시간 밖에 걸리지 않다니 놀랍기만 하다. 내가 발길을 끊은 동안 서울에서 설악산까지는 엄청난 지리적 변화가 있었다. 서울~춘천 고속도로에 이어 강원도 양양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었다. 북양양IC에서 설악동 소공원은 불과 20분 거리에 불과했다. 역시 대한민국은 10년이면 상전벽해가 되는 변화무쌍한 곳이다.

설악동 주차장에 새벽 2시 반 도착한 후 차에서 컵라면을 먹고 새벽 3시에 공룡능선 대장정을 시작했다. 의지할 거라고는 헤드랜턴 뿐이다. 기대에 부풀었던 터라 초반의 비선대까지는 가뿐하다. 설악산 입구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내 기억으로 과거에는 등산로 입구에서 신흥사까지는 별도의 길로 들어가서 경내를 관람했다. 그러나 이제는 매표소에서 바로 신흥사 경내로 들어가 등산로로 진입한다.

비선대 대피소 앞에서 복장을 정비하고 등산스틱을 꺼내 들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섰다. 평일에 새벽인데도 등산객들이 많아 산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탐방로 안내도에는 최고난도 탐방로로 표시되어 있으니 바짝 조심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깎아 지른 바위 절벽에 매달린 철사다리를 걸어 올라갔다. 사다리 밑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몸은 무시무시한 절벽을 올라간다. 밤이기에 망정이지 대낮 같으면 다리가 후들거렸을 그 곳을 용감하게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니 굴이 나타났는데 굴 속은 조그만 암자에 불상이 있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아뿔사! 길을 잘못 들어 금강암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럼에도 44년 전 엄청 고생을 하며 처음 금강굴에 올랐던 때와 비교하면 가볍게 금강굴에 오른 것에 자위했다. 헛웃음을 지으며 되돌아 내려오는데 다른 팀도 이 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에게 잘못된 길이라고 알려주고 같이 내려가다가 건너편 랜턴 불빛이 점점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 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삼거리에서 불과 200m 거리인데도 가파른 길이어서 에너지 소모가 많았다. 그렇게 40분을 흘려보냈다.

 

맑은 가을날에 절정의 단풍을 뽐내는 공룡능선을 보는 것은 행운

1차 목표지는 3.1㎞ 거리에 있느 마등령삼거리다. 그러나 산길 3㎞는 엄청난 에너지를 빼앗아 간다. 마등령삼거리는 멀고 멀었다. 산은 어느 산이나 첫 구간이 가장 힘들다. 몸이 워밍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힘을 쓰기 때문이다. 오늘도 예외 없이 첫 번째 고지 마등령삼거리는 쉽게 모습을 내주지 않는다. 몸이 풀리지 않은 탓도 있지만 실제로도 매우 가파르다. 도중에 날이 밝는다. 등성이에 올라서니 멀리 속초 앞바다가 보였다. 드디어 해 뜨기 전 붉고 푸른색이 섞인 여명이 바다 위를 두루며 멋을 내고 있었다. 다음 등성이에 오르면 일출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다시 마등령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조금 올라가다 보니 해가 이미 솟아 햇빛이 밝게 비쳤다. 일출 순간이 구름이 가린 것인지 우리가 다음 등성이에 오르기 전 해가 떠서 보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밝은 해가 설악산의 위용을 찬란하게 드러낸다.

마침내 전망대에 도착하니 저 멀리 공룡능선의 암봉들이 전모를 나란히 드러낸다. 마치 등뼈 위에 뾰족뾰족 솟아오른 상어 지느러미처럼 멋진 봉우리들이 일렬로 한가족처럼 늘어서 있다. 게다가 절정의 단풍이 악세사리처럼 능선 곳곳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침 해가 봉우리 암벽에 부딪치며 찬란한 빛을 반사했다. 마침 그곳에서 능선을 감상하고 있던 한 여성이 우리가 초행길이라는 소리를 듣고 우리가 참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을 건넨다.이렇게 맑은 날에 절정의 단풍으로 물든 공룡능선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란다. 그러면서 안개가 끼거나, 날이 흐리거나, 비가 와서 능선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 할 때가 더 많다고 한다.

그가 공룡능선 봉우리들을 하나씩 알려 준다. 공룡능선은 마등령부터 희운각대피소 앞 무너미고개까지의 능선을 통칭하는 것이라며 올라가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봉우리가 나한봉, 그 다음이 큰새봉, 1275봉이고 그 앞 평평한 봉우리가 1275봉 안부 그리고 가장 마지막 봉우리가 신선대라고 친절하게 알려 준다. 그러면서 본인도 마등령에만 올라서면 저 능선들을 차례로 오르내리며 천하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 본인은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설악산 풍경을 가장 좋아한다며 안전 산행을 기원해 주고 씩씩하게 앞서 나갔다. 우리도 발길을 재촉한 끝에 기진맥진해서야 마등령삼거리에 도착했다.

 

공룡능선을 걷는 것은 봉우리 건반을 ‘도레미솔라시도’로 연주하는 것

이제부터 공룡의 등에 삐죽삐죽 솟은 암봉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감상할 차례다. 뾰족뾰족 솟아오른 능선을 무당이 작두타듯 무아지경으로 밟으며 우리는 희열에 가득 찼다. 거대한 바위 봉우리들이 형형색색의 단풍 치마를 두르고 황홀한 자태로 우리를 맞는다. 우리의 땀과 수고를 보상하고도 충분히 남을 아름다운 작품들이 우리의 눈과 발 아래에 도열해 있다. 가는 방향으로 능선 좌측 풍경은 외설악이고, 우측 풍경은 내설악이다. 외설악은 속초 소속이고, 내설악은 인제 소속이다. 내설악 쪽으로는 용아장성의 군무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용의 이빨이 춤을 추는 듯하다. 용아장성에서 좀 더 멀리 눈길을 주니 또 하나의 거대한 능선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청, 중청, 소청, 귀때기청봉이 병풍을 두른 듯 설악산을 감싸고 있다. 반대편 외설악 쪽에서는 웅장한 울산바위와 동해바다가 시야를 끌어당긴다. 어느 쪽을 보아도 장관이다.

멀리 왼쪽부터 대청, 중청, 서북능선, 귀때기청봉

 

공룡능선에는 봉우리 이름들이 없다. 그래서 나 같은 초짜는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봉우리 이름을 알지 못해 불편했다. 가끔씩 다른 등산객에게 봉우리 이름을 물어 귀동냥을 할 뿐이다. 때때로 칼등 같은 공룡의 뼈대를 밟고 오르내릴 때 좌로도 절벽 우로도 절벽이어서 아찔한 공포를 느끼면서 앞만 보고 걸어야했다. 길을 오직 외길, 공룡의 등지느러미 선으로만 이어져 있다. 다른 길은 없다. 봉우리가 높다고 둘러 갈 길도 없다. 오르락 내리락 등뼈 같은 봉우리를 타고 오르내릴 뿐이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웅장한 외모에 끌려 힘든 줄도 모르고 감탄하며 걸었다. 그러나 기분은 한껏 치솟는데, 몸뚱이는 가라앉는다. 체감하는 다리 무게는 천근에서 만근으로 바쁘게 늘어나고 있다. 공룡능선의 진짜 아름다움은 공룡의 등줄에 일렬로 늘어선 봉우리들에 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봉우리가 키 순서대로 줄을 섰다. 공룡능선을 걷는 것은 이 봉우리 건반을 연주하는 것이다. 먼저 도 봉우리 그 다음엔 레 봉우리 그 다음엔 미 봉우리 순으로 밟아 올라가는 것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봉우리들

 

한 봉우리를 올라서서 건너 산 줄기에 늘어선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그 줄기의 봉우리는 미파솔 솔시레 봉우리다. 설악산 봉우리는 그 자체로 오선지 위에 놓인 콩나물 대가리다. 암봉들이 줄을 서서 시각적 화음을 보여주고 들려준다. 차례로 줄을 선 암봉들은 음악을 들려주고, 여기저기 흩어져 서 있는 암봉들은 조형물을 전시하는 듯하다. 금강산은 일만 이천 봉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설악산은 그 봉우리를 세어 본 사람이 없는가 보다. 내 안목으로는 설악 봉우리도 일만 봉우리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공룡능선의 마지막 봉우리 신선대가 마침내 저 멀리 보인다. 신선대는 다른 봉우리들과 다르게 바위만 솟아 있다. 그 사이 사이에 풀도 나무도 자라지 않는다. 다른 봉우리들은 모두 식물과 공존하는데 신선대는 왜 나무가 자라지 못할까. 신선이 사는 너무나 신성한 봉우리라서 감히 다른 생물이 범접하지 못한 탓일까. 신선대 정상 부근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우리도 저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제 봉우리들을 올라 볼만큼 올랐으니 그냥 돌아서 내려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공룡 등줄기에는 우회로가 없다. 칼날 같은 바위능선을 따라 계속 올라가야 한다. 하산길은 정상을 밟아야 있다. 칼날 양옆은 서슬 퍼런 절벽이다. 땀을 닦고 다리를 추슬러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한다. 뚜벅뚜벅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다. 오르기 전에 바라볼 땐 엄청나 보이던 높이와 거리도 막상 올라가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시조가 생각난다.

신선대

 

정상의 환희는 넓은 시야로 멀리까지 조망하는 즐거움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항상 1.5m 눈높이에 익숙한 사람의 눈에는 웅장하고 신비롭다. 산 아래 계곡 골짜기에 피어난 풀과 나무들이 뽐내는 절정의 단풍이 빚어낸 천만 가지 모양과 색조의 조화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의 아름다움이다. 신선대는 공룡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다. 이제까지 걸어왔던 여러 봉우리들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구도의 시각을 제공한다. 인터넷에도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가장 많다.

지금 이 순간 공룡능선의 황홀한 광경은 지구상의 최고 풍경 중 하나이다. 돌들이 절묘하게 포개져서 웅장한 봉우리를 이루고, 봉우리가 이어져서 거대한 산 능선을 이룬다. 이런 대자연에 압도당하다가 산길 곳곳에 다소곳이 피어 있는 작은 들풀과 들꽃의 섬세함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무리지어 청홍적상을 차려입은 단풍나무 잎에도 눈이 번쩍 뜨인다. 같은 단풍나무라도 단풍잎의 색깔이 모두 다르다. 빨간색도 노란색도 수십 가지다. 각각의 나무가 자기만의 특색을 뽐내고 있다. 각기 다른 수십 가지 색이 침엽수의 녹색과 어울리면서 울긋불긋 수채화로, 볼륨 있는 유화로 변신한다. 색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햇빛의 강약과 방향은 같은 색이라도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 낸다. 같은 종자의 나무라도 각자가 서 있는 환경을 극복하며 자기만의 특출한 무늬를 빚어낸다. 고산의 척박한 환경과 싸우면서 비틀고 뒤틀리며 소리 없이 자신을 스스로 창조한다.

 

돌계단 덕분에 공룡능선을 밟아보지만 그래도 무릎이  아프니 돌이 야속하구나

설악산은 돌이다. 누구나 돌로 빚어진 봉우리를 구경하러 설악산에 간다. 어느 돌도 서로 닮지 않았다. 돌들은 서로 포개고 감싸 안고 올라서고 받쳐주며 수많은 형상을 조형해낸다. 어떤 섬세한 손길로도 어떤 웅장한 설계로도 이렇게 멋진 조형미를 창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만이 오랜 세월에 걸친 지각운동을 통해 이처럼 장엄한 조형물을 창조할 수 있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들은 이토록 장엄한 창조물을 흉내 낼 수 없다. 무한 시간만이 이 작업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들은 그저 그 세월의 힘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감동할 뿐이다. 공룡능선의 돌들이 그렇게 나를 압도하고 있다.

봉우리 이름은 몰라도 제각각 멋진 단풍 뽐내는 그들

 

곳곳에 터잡고 있는 바위들도 저마다 모습이 다르다. 돌부처를 닮은 것도 있고 사람 얼굴 모습도 있고 사자나 코끼리를 닮은 것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자연의 창조물은 기억이나 상상력과 기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이란 말 그대로 그냥 스스로 그렇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 존재 그 자체이다. 바위 틈새로 모래가 날아오고 바위가 깎여 내려가면 흙이 생기고 그곳에 씨앗이 날아오면 식물이 자란다. 그러면 생물인 식물과 무생물인 돌이 어우러져 시시각각 새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게다가 계절과 기후가 변동하며 붉고 노란 단풍 옷, 하얀 눈으로 뒤덮힌 옷, 짙은 녹색의 옷을 입히기도 하고 시시각각 채색과 농담을 바꿔간다.

공룡능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돌로 계단과 길을 만들어 놓았다. 제멋대로 놓여진 돌 같아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단하다. 등산 중 어느 돌을 밟아도 돌이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잘 만들어 놓았다. 전문 산악인이 아니라도 이 돌계단만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능선을 따라갈 수 있다. 국립공원관리소에서 조성했겠지만 안전하게 잘 만들었다. 비스듬한 등산로에 놓여있는 돌이든 불안정하게 놓인 것 같은 돌이든 함부로 움직여서 나의 발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믿고 딛고 가면 된다. 이러한 돌길 작업이 되어 있지 않다면 나 같은 초보자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산길이다.

내 젊은 시절 설악산은 그저 계곡을 타고 최정상 대청봉을 올라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설악산 깊이 간직된 보물들을 누구나 힘을 내서 올라가면 감상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울산바위와 동해바다

 

설악산은 돌을 밟으러 가는 것이다. 흙길은 없다. 걷다 보면 가끔 10m 안팎의 흙길이 나타난다. 무릎이 아프니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갑다. 그러나 몇 걸음 걸으면 다시 돌이다. 돌계단 덕분에 내가 공룡능선을 밟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돌이 야속하다. 무릎이 점점 아파온다. 평소에 지지 않던 배낭 무게까지 견디며 단단한 돌에 체중을 얹으니 애꿎은 무릎 뼈만 고생을 한다. 젊은 시절처럼 통통 튀어도 탄력 있는 무릎 연골을 지녔다면 바위 등산은 훨씬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온 신경을 무릎 통증 완화에 두고 설설 기며 산행을 하는 나이가 되었다. 젊어서는 무릎이 몸을 보호해주지만 나이 들어서는 몸이 무릎을 보호해야 한다.

비선대에서 시작해서 다시 비선대로 돌아갈 때까지 나의 무릎은 돌들의 경도를 완충시켜 줄 수 있는 스프링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에는 무릎 통증으로 남들 3시간 하산길을 우리는 6시간을 절룩거리며 내려와야 했다. 다시는 이 산을 못 찾을 것이라고 한탄하며 내려왔다. 돌이 징하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공룡능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은 의지가 샘솟는다.

 

천불동계곡 하산길에 천불이 났네

평소에도 운동을 잘 하지 않는 우리의 걸음은 더디다. 무리한 계획이었나 온갖 상념이 몰려온다. 뒷사람들에게 계속 추월을 허락한다. 오늘 안에 내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러나 퇴로가 없으니 돌아가나 앞으로 가나 마찬가지 험로다. 오직 전진 뿐이다.

내설악의 단풍

 

드디어 공룡 등뼈를 모두 보듬은 후 마침내 희운각 삼거리에 도착했다. 과거 대청봉을 오르내릴 때 익숙했던 천불동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계속 질척이던 우리를 보며 먼저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이 걱정을 해준다. 올라갈 때는 크게 몰랐던 관절들이 돌길을 내려가는 길에서는 마침내 신음을 냈다. 걸을 수가 없다. 다리로 걷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끌고 내려가야 한다. 양폭을 지나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헤드렌턴을 켜서 발 앞을 비춘다. 천불동계곡은 며칠 전에 내린 비로 물 소리가 우렁찼다. 계곡에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와 광경은 일품이었다. 어스름 속에서도 시원하고 웅장했다. 빨간 단풍나무는 칠흙같은 밤에도 환상적이었다. 우리가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사진 한 장 찍을 시간 조차 아깝다. 오늘 밤 안에 이 길을 내려가야 한다.

천불동계곡이 자신의 멋진 자태를 보고가라며 살랑살랑 손짓을 해도 모른 체 하며 다리를 끌고 내려갔다. 오른발 왼발, 오른발 왼발 보행이 정상이지만 우리는 둘 다 오른발 다시 오른발 오른발, 때로는 왼발 다시 왼발 왼발, 이런 식의 걸음이다. 천불동계곡의 멋진 풍경과 폭포들이 어서 등 뒤로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발등만 쳐다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은 여전히 질척거린다. 창피하게도 남들 서너 시간 거리를 6시간이 넘게 걸려서 설악동 소공원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설악산은 보자기였다. 이제까지 나는 보자기로 싸여진 보따리만 보고 설악산이라고 생각했다. 이 보따리는 공룡능선에서만 풀어볼 수 있다. 오늘 나는 설악산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보자기 안에는 공룡능선, 용아장성, 화채능선, 서북능선 등 엄청난 보물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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