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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 정도는 알고 떠나자③] 이탈리아 역사

by 김지지

 

■역사를 알아야 이탈리아가 보인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탈리아 주재 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탈리아 면적은 30만여 ㎢다. 남북을 합한 한반도 면적(22만㎢)의 1.36배 쯤 된다. 인구는 6,200만명(2016년 기준) 정도이고 이 가운데 약 98%가 가톨릭을 믿는다. 언어는 라틴어를 뿌리로 하는 이탈리아어인데 철자대로 발음해 읽기가 비교적 쉬운 편이다. 행정 구역은 3단계로 나뉜다. 주(regione·레조네), 현(provincia·프로빈차), 기초지자체(comune·코무네) 순이다. 주는 20개이고 코무네는 800개가 넘는다. 주는 로마 주변의 라치오, 나폴리를 주도로 하는 캄파냐, 시칠리아, 사르데냐, 움브리아, 토스카나, 베네토, 롬바르디아, 피에몬테 등이다. 코무네는 중세 이후 이탈리아에 번성한 자치공동체를 말한다. 수도 로마도 시골의 소읍도 모두 코무네다.

코무네 마다 가족사랑, 마을사랑, 뿌리사랑의 본능이 시대를 초월한다. 어디를 가도 나름의 창건 설화나 공동체 형성의 역사적 연고가 있고 공동체 마다 수호성인이 있다. 대부분의 마을 중심엔 성(聖)과 속(俗)을 대표하는 대성당(두오모)과 행정관청이 있다. 두 건물이 마주보는 사이 공간인 광장에는 대개 근사한 분수가 하나씩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탈리아에는 수백~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재가 즐비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유럽 지역 세계문화유산의 40%가 이탈리아에 있다. 역사적 중요성을 공인받은 장소만 10만여 곳을 헤아린다. 이탈리아를 아는 것은 유럽 역사의 원류를 이해하는 실마리이고 유럽 문화의 요체에 접근하는 지름길이다.

가톨릭의 본산답게 성당이 9만5000여 개, 수도원이 1500여 개나 된다. 평야는 전 국토의 약 20%에 불과해 국토면적에 비해 협소한 편이다. 나머지는 산지와 구릉이다. 가장 큰 평야는 서울 면적의 90배나 되는 포 평원(55,000㎢)이고 캄파니아 평야(1,900㎢) 등 중소규모의 평야가 분산되어 있다. 북으로는 알프스산맥이 병풍처럼 쳐있고 반도의 남북으로는 아펜니노 산맥이 뻗어있다.

 

로물루스·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고대 로마 창건

이탈리아에는 BC(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고대 로마를 창건했다는 건국신화가 전해온다. 신화에 따르면 형제는 로마를 관류하는 테베레 강에 버려졌다가 늑대의 도움을 받아 구조되었다. 성장한 뒤 작은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 로마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로마는 왕정(BC 753~BC 509), 공화정(BC 509~BC 29), 제정(BC 29~AD 476)을 거치며 부침을 반복한다.

루벤스 작 ‘로물루스와 레무스’(1616년),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 소장.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아난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목동에 의해 발견되는 장면. 쌍둥이를 낳게 한 군신 마스르와 엄마 레아 실비아의 모습도 보인다.

 

인근 도시국가들을 합병하며 세력을 키운 초기 로마왕정 때의 왕은 초대왕인 로물루스를 포함한 7명이었다. 로마가 건국되기 수백년 전부터 이탈리아 중부에는 에트루리아, 사비니, 피체니, 팔리쉬, 불쉬 등 여러 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중 대부족인 에트루리아는 고대 로마보다 500년이나 앞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살았다. 이들은 ‘라틴족의 땅’을 뜻하는 라치오(수도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해안 지역과 토스카나 일대 그리고 움브리아와 로마냐 일부(볼로냐, 라벤나 등)까지 아우르는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꽃피웠다.

이중 대부족인 에트루리아는 고대 로마보다 500년이나 앞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살았다. 이들은 ‘라틴족의 땅’을 뜻하는 라치오(수도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해안 지역과 토스카나 일대 그리고 움브리아와 로마냐 일부(볼로냐, 라벤나 등)까지 아우르는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꽃피웠다.

 

에트루리아계, 독자 문명 꽃피웠으나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어

그런데 에트루리아인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원래부터 이탈리아 반도에 살았던 부족이라는 설과 지중해를 건너온 부족이라는 설로 나뉜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들이 트로이 전쟁(BC 1193~1183) 즈음 소아시아를 떠나온 리디아 왕국 사람들이라고 한 반면 역시 그리스 역사가인 디오니시오스는 이탈리아 원주민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뚜렷하게 밝혀진 건 없다.

뿌리가 무엇이든 에트루리아인들은 BC(기원전) 10세기, 이탈리아 중북부와 해안을 끼고 있는 광활한 땅에 새로운 문명을 탄생시켰다. 이들은 BC 8~6세기 경 왕정을 유지하다가 12개 도시국가의 연맹체를 구성, 그리스를 비롯해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과 교류하며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와 문자를 발전시켰다.

유골함.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탄 망자 앞에 2명의 호른 연주자와 2명의 경호원, 관을 운구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행렬이 보인다. 망자의 마지막 여정과 개선 행진을 이중적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출처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신들의 성격도 그리스의 신들과 거의 유사하다. 다만 이름만은 에트루리아 고유어로 불러 그리스·로마와는 달랐다. 그리스어 제우스(신들의 왕)는 ‘티니아’ 혹은 ‘틴’이라 하고, 그리스어 헤라(신들의 여신)는 ‘우니’, 그리스어 아프로디테(미의 여신)는 ‘투란’이라 칭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 왕국이 들어서기 전의 고대 로마도 100년간 지배해 로마를 거대 도시로 성장시켰다. 로마의 간선도로인 ‘거룩한 길(Via Sacra)’은 물론 수로시설과 광장 건설도 이때 시작되었고 로마 문자 역시 그리스 문자에서 온 에트루리아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전성기 때는 이탈리아 북부와 코르시카 섬까지 지배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가리켜 ‘티르세노이’ 혹은 ‘티레노’이라 부르고 로마인들은 ‘투스키’ 혹은 ‘에트루스키’라고 불렀다. 이 말은 오늘날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D.H. 로렌스는 1차대전 이후 현대 서구문명의 병폐에 염증을 느끼고 대안을 찾기 위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다 1927년 4월 이탈리아 중부 해안에 산재한 에트루리아의 여러 유적지를 답사한 후 에트루리아야말로 이상적인 사회이고 이를 멸망시킨 로마가 서구 문명의 병폐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물이 ‘에트루리아 유적 기행기’(1932년)다. 에트루리아 연구 결과와 문명적 통찰력을 제공한 이 기행기는 오늘날까지도 에트루리아 연구자들에게 여전히 자극을 주는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올림포스 12신’ 명칭 표기 비교 (출처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된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전)

 

에트루리아계는 라틴계를 중심으로 한 로마가 건국되었어도 로마 왕정을 이끈 전설적인 7명의 왕 중에서 4명의 왕을 차지할 정도로 한동안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로마의 라틴계는 BC 6세기 초 에트루리아인을 몰아낸 뒤 BC 509년 귀족 세력들이 왕을 폐지하고 평민과 주권을 나누어 정치를 하는 공화정을 시작했다. 사비니족 역시 1명의 로마 왕을 배출했으나 BC 460년경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처럼 로마가 중부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떨치고 있을 때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에는 그리스인들이 대거 이주해 식민도시를 형성했다. 그 규모가 그리스 본토의 인구를 능가해 그 일대를 ‘마그나 그라이키아’(대 그리스)라고 불렀다.

 

기원전 27년 제정(帝政) 시작된 후 200년 간 ‘팍스 로마나’ 구가

로마 공화정은 BC 3세기 무렵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뒤 바다 건너 주변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그중 대표적인 전쟁이 포에니 전쟁(BC 264~149년)이다.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세 차례 결전을 벌인 포에니 전쟁의 승리 후 지중해를 지배했다. BC 60년경에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권력을 분점하면서 공화정은 퇴조하고 세 사람이 국가를 지배하는 제1차 삼두정치가 등장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프랑스 일대)을 정복하고 세력을 키워 권력을 장악했으나 그의 독재를 우려한 반대파에 의해 BC 44년 살해되었다. 그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세 사람이 권력 투쟁을 벌인 제2차 삼두정치가 등장했다.

이때 승자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BC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존엄한 사람’이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받고 황제로 추대됨으로써 공화정은 사라지고 제정이 시작되었다. 역사가들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를 통치한 시기부터 AD(기원후) 180년까지의 200여 년을 로마의 평화 시대 즉 ‘팍스 로마나’라고 부른다.

그 시기, 황제 피살과 내전 등의 정치적 혼란을 겪거나 칼리굴라와 네로 같은 폭군 황제도 있었으나 AD 96년부터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피우스, 아우렐리우스 등 5명의 황제가 집권하면서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구가했다. 5명 황제 중 네르바는 로마를 통치한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가 로마에 기여한 공은 매우 크다. 황제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과 내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유능한 사람을 양자로 맞아들인 뒤 일찌감치 후계자로 선포하는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네르바 이후 4명이 이런 방식으로 황제가 되었는데 이들 5명이 현명한 다섯 황제 즉 ‘오현제(五賢帝)’이다.

5현제 시기 로마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오현제 중 마지막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61년 황제가 되었다. 그는 이민족과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로마를 통치했는데도 전쟁터 막사에서 틈틈이 글을 써 그 유명한 철학책 ‘명상록’을 남겼다. 5현제 시대에는 로마가 정치적으로 안정을 이루고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문화도 각지로 파급되어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누렸다. 팍스 로마나 시절, 북부 유럽 일부를 제외한 모든 유럽이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 캄피돌리오 광장에 있다.

 

로마는 정복 지역에 상당 부분 자치를 허용했다. 오늘날 유럽 주요 국가의 대도시인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이 이때 형성되었다. 영토가 유럽과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군인들의 이동을 돕기 위한 도로도 건설되었다. 그 길을 따라 로마 문명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퍼졌다.

팍스 로마나를 쇠락의 길로 끌고 간 황제는 공교롭게도 아우렐리우스였다. 그가 말년에 네르바 황제 때 만들어진 황제 계승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아들 코모두스에게 자리를 물려준 게 원인이었다. 코모두스는 나랏돈을 제 것인 양 펑펑 쓰고 그것도 모자라 부자들에게서 강제로 재산을 빼앗다가 192년 살해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은 정치 혼란, 사회 기강 이완, 경제력 약화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서로마 제국이 천년 제국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476년

5현제 시대 후 약 50년 간 18명의 황제가 쿠데타로 집권했다가 암살로 사라지는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기가 이어졌다. 여기에 외부 민족의 침략이 몰락을 가속화했다.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국경선을 뚫고 남하해 로마를 약탈하고, 동쪽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쳐들어왔다.

그 무렵 로마는 물론 서양사 전체 판을 바꿔놓을 혁명적 대변화가 시작되었다. 주역은 기독교였다. 로마에서 기독교는 초기 200여 년 동안 모진 박해를 받다가 어머니 헬레나의 신앙에 감화받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에 의해 공인을 받고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때인 380년 국교로 선포되었다.

그에 앞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서 딴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 그후 로마 제국은 395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큰아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동로마를, 작은아들에게 로마 중심의 서로마를 통치하도록 유언을 남김으로써 로마 제국은 둘로 분리되었다.

사실상 빈껍데기만 남은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함으로써 천년 제국에 종지부를 찍었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기독교와 헬레니즘 문화를 바탕으로 번영을 이어갔다. 서로마 몰락 후 훈족과 동고트족이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특히 롬바르드족은 568년부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지배자가 되는 774년까지 200년 이상 이탈리아에 군림했다. 8세기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의 지배도 받았으나 일시적일 뿐 불안정한 혼란기는 계속되었다.

지속되던 정치적 진공상태는 827년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건너온 이슬람교도가 이탈리아 남부를, 962년 신성로마제국이 북부를 통치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후 이탈리아는 북부의 게르만 문명권, 중부의 비잔틴 문명권, 남부의 다민족 문명권(아랍민족, 라틴족, 그리스인)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던 중 11~12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황제와 교황 간의 세력 다툼이 격화되었고 그 공백을 틈타 지방 영주가 통치하는 수백 개의 도시국가가 출현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등의 도시국가가 산업, 상업, 금융의 중심지로 대두되어 세력을 확장했다.

 

르네상스 발흥하고 학문과 문화예술 화려하게 꽃피워

교황과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13~14세기는 상대적 침체기였다. 이 기간 로마는 역대 교황들이 자의반 타의반 프랑스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아(아비뇽의 유수·1309~1377) 중심 권력의 부재 상태가 길어졌다. 1350년대에는 로마의 귀족들에 맞서 민중봉기를 일으킨 콜라 디 리엔초의 난에 따른 무정부 상태까지 겹쳐 공백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로마 토박이 유력 가문인 콜론나 가 출신 교황 마르티누스 5세(재위 1417~1431)가 이탈리아로 돌아와 2년간 피렌체에 머문 후 1420년 로마로 귀향하면서 안정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로마로 사람이 모여들어 물산이 일어나고 세수가 늘어났다.

로마를 포함한 도시국가 중 몇몇 국가가 병립하는 양상을 보인 것은 르네상스 기운이 무르익은 15세기 중엽이었다. 오늘날까지 대도시로 남아 있는 로마(교황령), 나폴리(왕국), 베네치아(공화국), 피렌체(공화국), 밀라노(공국)는 ‘르네상스의 5패(五覇)’로 불렸다. 이들 도시국가에서는 물질문명의 발달, 지리상의 발견, 무역 독점 등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1453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세력을 키워 지중해로 진출하고 다른 유럽 국가들까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발흥하고 학문과 문화예술이 화려하게 꽃피웠다. 하지만 결국에는 신흥 열강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주요 도시국가들은 16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신흥 열강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 와중에도 사보이 왕국만은 세력을 키워 이탈리아 통일의 기틀을 닦아나갔다. 사보이 왕국은 11세기에 지금은 이탈리아와 접해 있는 프랑스령 사부아에서 백작으로 서임된 움베르토 비안카마노가 시조다. 이후 이탈리아 쪽으로 세력을 뻗쳐 토리노를 주도로 하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피에몬테까지 영역을 확대해 1416년 사보이 공국을 세웠다. 18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서쪽의 사르데냐 섬을 얻어 국명을 사르데냐 왕국으로 바꾸고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1666~1732)가 초대 사르데냐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등을 거치며 국제사회에서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은 후 서서히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분열된 도시국가 19세기 말 하나로 통일돼

그러던 중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에서 발화한 자유와 평등사상이 전파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자유 민주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곧 혁명운동이 시작되어 무장봉기가 일어났으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무력 간섭으로 번번이 좌절되었다. 다행히 사르데냐 왕국만은 꿋꿋하게 버텨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탈리아 전역이 하나가 된 것은 사르데냐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20~1878) 때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훗날 ‘이탈리아 통일의 3걸’로 불린 주세페 마치니, 콘테 디 카보우르, 주세페 가리발디의 활약도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마치니는 1831년 청년 이탈리아당을 결성한 뒤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살리자는 ‘리소르지멘토(부흥) 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서 성공하지는 못했다.

9개로 찢겨진 소국들을 통합하는 과제는 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카보우르에게 맡겨졌다. 카보우르는 열강의 대립을 이용한 외교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중·북부의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 등 소국들을 합병했다. 여기에 1860년 1000여 명의 ‘붉은 셔츠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한 가리발디가 점령지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납함으로써 이탈리아의 통일을 가속화시켰다. 샤르데냐 왕국은 교황령 중 로마냐와 움브리아 등도 프랑스로부터 빼앗았다.

북동부는 여전히 오스트리아가 점령하고 있고 로마는 교황이 지배했지만 샤르데냐 왕국은 대체로 통일을 이뤘다고 보고 1861년 3월 17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했다. 그 무렵 교황의 세속적인 지배권이 미치는 교황령은 사실상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다. 교황이 거주하는 로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완전한 통일을 위해 두 차례 로마를 침공했으나 프랑스군에 가로막혀 실패했다. 그러던 중 1870년 프로이센(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는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군이 대독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로마에서 철수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그 틈을 타 로마로 진군했다. 당시 로마에는 국제 지원병과 용병으로 구성된 교황군이 있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정규군을 당해내진 못했다. 결국 로마는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동·서 로마로 분열된 후 1400년만에 전 국토가 하나 되는 감격을 누렸다.

이탈리아 주요 도시 지도

 

그후 세월이 흘러 베니토 무솔리니가 1922년 10월 30일 로마에 무혈 입성하고 이튿날 39세 나이로 역대 최연소 총리가 됨으로써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시켰다. 무솔리니는 독일과 추축동맹을 맺어 2차 대전을 일으켰다가 1943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고 1944년 항독 빨치산에 의해 살해되었다. 2차대전 후 이탈리아는 1948년 1월 1일 공화국 헌법을 공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내와 떠난 첫 유럽 여행

 

50대 여성과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1990년 결혼 후 29년째 같은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한숙희다. 둘만의 유럽 여행은 처음이다. 생각해보니 결혼 후 그와 12일 이상을 떨어져 산 적이 없다. 그나마 열흘 이상은 한 번뿐이고 일주일 이상은 서너 차례에 불과하다. 모두 나의 해외여행이나 출장으로 인한 떨어짐이다. 아내에게 “친구들과 어디 멀리 여행을 다녀오라”고 그렇게 누누이 권했어도 4일을 넘은 적이 없다. 이번 여행은 결혼 후 가진 우리 둘만의 여행 중 가장 길다.

비행기가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내리고 있다.

 

유럽 여행은 크게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스위스-오스트리아-독일, 아일랜드-스코틀랜드, 발칸반도, 동유럽, 북유럽, 러시아로 나뉜다. 숙희씨와 머리를 맞댄 끝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행선지를 압축했다. 두 나라를 비교하니 이탈리아는 유럽 문화의 원형인 고대와 르네상스기의 역사와 문화가, 스페인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근현대 건축물이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스페인은 과거 이슬람 문화의 진수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결국 어디를 먼저 갈 것인가 순서의 문제였는데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이탈리아를 추천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이탈리아 여행은 시급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두 차례, 스위스와 독일은 한 차례 다녀왔지만 아직 이탈리아 땅을 밟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를 가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나로 하여금 역사에 관심을 갖게 하고 결국에는 1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20세기 이야기’(답다 출판)를 2017년 완간하게 한 계기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02년 12월부터 ‘역사속의 오늘’을 조선일보에 1년, 그후 주간조선에 2년 연재하게된 것도 ‘로마인 이야기’ 덕이다. 그 무렵 한 포털사이트에 회원가입한 이메일 ID가 ‘gorome’인 것도 ‘로마에 가고싶다’는 내 염원을 반영한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뿐아니라 베네치아와 피렌체에 대해서도 관련 책을 여러권 냈다. 물론 나는 그 책 모두 읽었다.

20세기 이야기

 

사실 나는 2003년 이탈리아를 방문하려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당시 출장차 방문한 런던과 파리를 1주일간 둘러보고 귀국 길에 개인 휴가를 내서 이탈리아를 몇박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직장 상사가 장시간 자리를 비운다며 허락하지 않아 바로 귀국해야했다. 그 무렵 나는 유럽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때라 아쉬움이 컸다. 결국 그 갈증을 푸는데 15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다음 결정할 일은 개인 여행이냐 패키지 여행이냐였다. 분명한 것은 패키지 여행이 개인의 자유로운 경험과 시행착오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감흥도 떨어져 누구나 꺼려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패키지 여행을 선택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유여행이 불러올 시행착오와 불편함이 중년의 우리들을 몹시 신경쓰이게 하고 다른 하나는 주마간산인 탓에 여행의 깊이와 질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하고 한정된 일정에 여러곳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번 이탈리아 여행도 현지에서 7일 동안 10여개 도시를 돌아다녔는데 아쉬운 점이 일부 있긴 해도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일정은 2018년 4월 24일 출국하고 5월 2일 귀국하는 것으로 짜였다. 이탈리아에서 7박, 오고가는 비행기에서 2박하는 총 7박 9일의 일정이다. 2018년 4월 24일 오전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하니 JTBC의 ‘뭉쳐야 뜬다’가 촬영 중이었다. 요즘 TV는 해외여행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대세다. 지상파든 종편이든 케이블이든 해외에서 촬영하는 프로그램을 한 두개쯤 방영한다. 제작진까지 포함하면 적지 않은 비용이 들테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방송 규모가 그 정도의 제작비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커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듯 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니 내 오른쪽 창가 쪽에 이탈리아 사람으로 보이는 대머리 청년이 홀로 앉아 있었다. 자유롭게 대화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다소 불편했지만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편리했다. 이탈리아 현지에 도착해보니 대머리는 이탈리아 남자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대머리 마네킹을 쇼윈도에 내건 상점도 보였다.

로마의 레오나르도공항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가 30여 명의 우리 일행을 안내한 곳은 공항에서 30분 떨어진 ‘ARDEATINA PARK HOTEL’이었다. 시계는 밤 9시 반을 가리켰다. 이 호텔에서 앞으로 3일간 머물 예정이어서 호텔 시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우리 방의 화장실 세면대는 물이 잘 안빠지고 샤워실 부스는 일본처럼 너무 작아 몸을 돌리는 것조차 불편했다. 다행히 첫날밤은 피곤했던 터라 시차적응에 고생하지 않고 비교적 숙면했다.

가이드가 전해준 방문 코스를 우리나라 지명에 대입해보니 대충 이랬다. 로마(인천) → 폼페이·소렌토·나폴리(전북 군산) → 로마 → 라스페치아·친퀘테레(평북 철산) → 밀라노(평북 북쪽의 한 도시) → 베로나(평북 장진) → 베니스(함북 청진) → 피렌체(평양) → 피사(평남 남포) → 페루자(강원 철원) → 아씨시(강원 화천) → 오르비에토(경기 포천) → 로마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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