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기타고 세계로

중년 남성 8명의 일본 도호쿠 지방 단풍 여행기 (하)

↑  주니코에서도 가장 신비롭다는 아오이케(靑池)

 

by 김지지

 

■김태희가 몸 담갔다는 노천혼탕에 들어가고 싶었건만 : 뉴토온천단지, 쓰루노유 온천, 다자와 호수, 가쿠노다테 무사마을

 

숲과 어우러져 고풍스럽고 아늑한 쓰루노유 온천 

넷째날(10월 15일) 여행지는 아키타현의 온천마을 뉴토온센쿄(乳頭温泉郷)다. 이곳은 하치만타이 국립공원 내 뉴토산 기슭에서 솟아나는 온천으로 조성된 온천단지로 온천여관은 7개다. 온천단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쓰루노유(鶴の湯) 온천이 있고 다른 6곳은 자동차로 10~20분 거리에 있다.

쓰루노유 온천. 전통미가 살아있고 고풍스럽다.

 

우리가 몸을 담근 곳은 뉴토온센코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쓰루노유(鶴の湯) 온천이다. 날개를 다친 학이 상처를 치료하려고 온천 물에 몸을 담근 모습을 사냥꾼이 보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역사가 320년이나 된다. 굽이굽이 산길을 지나 비포장도로로 들어선 뒤에도 한참을 들어가야 있다. 온천 진입로에서 쓰루노유(鶴の湯) 온천까지의 숲은 가을색이 완연했다. 가까이 가니 일본의 전통 목조건물에 짚으로 지붕을 이은 전통미가 살아 있고 뒤편의 숲과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고풍스럽고 아늑하다.

이곳은 2009년 방송된 KBS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 중 한 곳이다. 김태희와 이병헌의 노천탕 데이트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혼탕으로 이용되는 노천탕을 청소한다고 해 탕 속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로 옆에서 구경만 했다. 생각보다 크지 않고 낮이라 그런지 다소 썰렁해 보였다.

김태희와 이병헌이 데이트 연기를 펼친 쓰루노유 노천온천탕

 

온천탕은 조그만 탈의실을 사이에 두고 시로유(白湯)와 구로유(黑湯)로 나뉜다. 구로유는 10여명 정도, 시로유는 5명 정도가 들어가면 꽉차는 규모다. 욕조도 좁고 노천도 아니어서 아쉽기는 하나 오랜 전통이 느껴진다. 탕에는 젖의 빛깔과 같이 불투명한 유백색의 온수가 탕 밖에서 탕 안으로 계속 흘러들어온다.

다른 6곳의 온천여관은 가니바(蟹場), 마고로쿠(孫六), 구로유(黒湯), 다에노유(妙の湯), 오가마(大釜), 규카무라(休暇村) 온천이다. 근처에 게(蟹)가 많아 이름 붙여진 가니바 온천은 한적한 원생림에 둘러싸인 노천온천이 명물이다. 마고로쿠 온천은 강 옆에 노천탕이 있어 강물 소리를 들으며 노천온천을 즐길 수 있다. 전통미를 자랑하는 구로유 온천은 폭포수 온천이 일품이다. 다에노유 온천은 일본풍의 세련된 스타일로 꾸며져 여성들의 취향에 잘 맞는다. 시간에 따라 온천수의 색이 변한다는 황금색 온천이 특징이다.

온천물로 몸을 씻고 향한 곳은 아키타 현립 자연공원의 일부인 다자와코(田澤湖)다. 최대 수심이 423m로 일본에서는 가장 깊고 세계적으로는 17번째로 수심이 깊다. 표고는 249m에 불과해 호수 밑바닥이 해면 아래 174m까지 내려간다. 신기하게 겨울에도 얼지 않고 물고기도 살지 않는다.

석양 무렵이면 에메랄드 빛으로 물들며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뽐낸다. 차도 별로 다니지 않으니 20㎞ 호수 둘레를 자전거로 돌아보면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다. 다자와코에서 유명한 동상은 다쓰코히메(辰子姬)의 전설이 있는 황금빛 소녀상이다. 다쓰코히메는 호수의 물을 계속 마시면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다는 신의 계시를 받고 계속 물을 마셨지만 결국에는 용이 되어 호수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전설 속 여성이다. 이곳에서도 ‘아이리스’에서 김태희와 이병헌의 포옹 장면이 촬영되었다.

다자와 호수
가쿠노다테 무사마을 ‘도호쿠 지방의 작은 교토(京都)’로 불려

오후 방문지는 아키타현 센보쿠시에 위치한, 17세기 에도시대에 사무라이가 살던 마을을 보존해놓은 가쿠노다테 무사마을(角館武家屋敷)이다. 당시의 건축 양식과 정원이 잘 보존되어 있어 도호쿠 지방의 작은 교토(京都)로 불린다. 이곳은 실제 주거지와 레스토랑, 상점 등이 섞여 있다.

가쿠노다테(角館)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곳이 아오야기케(靑柳家)다. 덩치 큰 고목의 가지가 담장 밖으로까지 늘어져 있어 집안의 오랜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건물과 전시물은 아오야기케 일문이 대를 이어 실제로 사용한 것들이다. 아오야기케 후손들은 1985년까지 실제로 이곳에서 살았다. 여러채의 건물은 무기고, 향토관, 무가도구관 등으로 꾸며져있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도검류, 갑옷투구, 총 등과 에도 시대 무사들의 생활상을 소개하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쿠노다테 무사마을에서도 가장 잘 복원해놓은 아오야기케(靑柳家)의 정문.

 

특히 눈에 띤 것은 가문의 먼 혈연인 서양화가 오다노 나오타케(1750~1780)의 흉상과 해체신서(解體新書) 기념관이다. 기념관에는 오다노가 ‘해체신서’(1774년)의 삽화를 그릴 때 참고했다는 토머스 바르톨린 해부서(1669년)도 전시되어 있다. 오다노를 알려면 먼저 히라가 겐나이(1728∼1779)가 누군지를 알아야 한다. 히라가는 과학, 동식물학, 지질학 등에 걸쳐 폭넓은 지식을 겸비한 일본판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일본의 미술 전문가들은 그가 서양서적에 수록된 그림을 보고 터득한 서양화법이 서구적 사실주의를 향한 중대한 일보를 내디뎠다는 점을 높게 평가한다.

오다노 나오타케 흉상

 

히라가는 자신이 깨우친 서양화법을 재능있는 제자들한테 전수함으로써 일본의 서양화풍 회화가 꽃피우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중 대표적인 제자가 오다노다. 히라가는 1773년 여름 아키타 번주 사타케 쇼잔의 초청을 받아 아키타를 방문했다. 가쿠노다테에서 머물렀는데 자신의 방에 놓여 있던 병풍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림을 그린 23살의 젊은 무사 오다노를 불러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양서적의 삽화를 보여주며 명암법으로 묘사해야 사물의 형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중에는 오다노를 아예 에도(도쿄)로 불러들여 명암법과 원근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오다노 나오타케의 ‘불인지’, 일본 회화사 바꿔놓은 기념비적 작품

오다노는 서양화법에 빠져들어 ‘양풍화가’로 성장하는 한편 자신이 배운 지식을 아키타 번주인 사타게 쇼잔과 같은 번의 무사들에게 전수했다. 이들 아키타의 무사 그룹에 의해 이뤄진 서양화풍의 회화를 ‘아키타난가’(秋田蘭畵)라고 한다. 에도 시대에 네덜란드의 한자식 이름 화란(和蘭)의 뒷글자를 따서 난가쿠(蘭學)라고 한 것처럼 그림을 난가(蘭畵)라고 부른 것이다. 특히 사타케 쇼잔은 ‘화법강령’, ‘화도이해’라는 서양화 이론서까지 집필해 서양화풍 회화가 계승 발전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오다노의 그림 중에는 일본의 회화사를 바꿔놓은 것이 있다. 1770년대에 그린 ‘불인지’(不忍池·시노바즈노이케)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불인지는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 위치한 연꽃 가득한 연못이다. 이 그림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림 속 앞쪽 화분은 크게, 뒤쪽 불인지의 모습은 작고 흐릿하게 처리함으로써 명암법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화분 뒤에서는 그림자가 길게 연못 쪽으로 다리를 뻗고 있어 늦은 오후 무렵의 풍경임을 암시하고 있다. 원근법을 확실히 소화하지 못해 앞의 화분과 뒤의 연못이 다소 어색한 모자이크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런 명암법과 그림자는 종전의 일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 회화사를 바꿔놓은 오다노의 ‘불인지'(1770년대). 아키타 현립 근대미술관 소장

 

에도시대(1603-1867)에도 서양화에 흥미를 느낀 화가들이 많았으나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쳐 서양인에게서 직접 배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론서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저 나가사키를 통해 유입된 서양 서적 속의 삽화를 보며 주먹구구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장애물은 또 있었다. 서양인은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통합체로 바라본 데 반해 일본인들은 자연을 단편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전체보다는 부분에 집착했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서양화처럼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통합된 공간을 그린다는 것은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점에서 오다노의 ‘불인지’ 그림은 당시로서는 문화적 기형아였다. 오다노의 그림이 또다시 진가를 발휘한 것은 ‘해체신서’에 수록된 해부도를 그린 것이다.

 

‘해체신서’ 발간, 일본 근대 의학의 여명 밝힌 쾌거

해체신서 발간의 산파는 한의사였던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였다. 그는 평소 신체 해부가 궁금했다. 물론 당시 일본에도 해부서는 있었다. 야마와키 도요라는 의사가 1754년 의사로는 처음으로 막부의 허가를 받아 교토의 형장에서 처형된 사형수 해부에 참관해 그때 관찰한 것을 기록·정리해 1759년 발간한 ‘장지(藏志)’라는 해부서다. 이 책은 일부 오류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오장육부설은 사실과 다르고, 서양의 해부서가 실제 인체와 부합한다’는 점을 일본 최초로 지적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스기타가 네덜란드어로 간행된 ‘타펠 아나토미아’라는 의학서적을 접한 것은 1771년 초였다. 이 책은 독일 의사 요한 아담 쿨무스가 1722년 간행한 ‘해부도표’를 네덜란드어로 번역·출간(1734년)한 것이다. 스기타는 동료 한의사인 마에노 료타쿠, 나카가와 준안과 함께 책 내용이 궁금했으나 3명 모두 네덜란드어를 알지 못했다. 안다고 해야 알파벳과 단어 몇 개를 아는 초보수준이었다. 심지어 책에 나오는 로마숫자는 물론, 1,2,3 같은 아라비아 숫자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외국어사전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그림만 보고 인체를 연구하고 있을 때 50대 여성 사형수의 인체를 해부하는 자리에 참관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해부서 ‘타펠 아나토미아’와 해부 모습을 꼼꼼히 비교했다. 그리고 해부서에 실린 인체도와 실제 인체 내부 모습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 책의 정확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 사람은 그동안 인체의 정확한 내부 구조를 몰랐던 사실을 반성하며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하기로 작정한 뒤 본격적으로 네덜란드어를 공부하면서 번역에 착수했다. 의학용어들은 일본어로 새로 조어했다. 신경, 연골, 동맥같은 말들이 그때 나왔다. 해부도는 오다노 나오타케가 그렸다. 그렇게 4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일본 역사상 첫 서양 책 번역이자 ‘일본 근대 의학의 여명을 밝힌 쾌거’라 평가받는 ‘해체신서’가 번역·간행되었다.

스기타가 번역하고 오다노가 삽화를 그려 출간된 ‘해체신서’

 

그러나 책이 나오자마자 한방 의사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그들이 근거 없는 악평까지 쏟아내자 스기타는 해체신서 출판을 옹호하기 위해 ‘광의지언(狂醫之言)’이라는 문답집를 냈다. 해체신서는 이후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배우는 ‘난학’의 효시가 되었다. 이후 스기타는 의사 일을 하면서 난학을 가르치는 사숙인 난학주쿠를 열어 후계자를 양성했다. 이곳 난학주쿠 출신 젊은이들은 막부 말기와 메이지유신 시대에 걸쳐 일본을 변화시키는 주요 역할을 했다. 스기타는 말년에 난학이 어떻게 처음 시작되어 어떤 경로로 확산․발전했는지를 담은 ‘난학사시(蘭學事始)’라는 회고록도 펴냈다.

 

기리탄포와 흡연에 대하여

그날 저녁은 아키타의 유명 음식인 기리탄포로 해결했다. 기리탄포는 쌀로 밥을 지어 으깬 후 반죽으로 길게 모양을 잡아 아키타 삼나무에 꽂아 구운 음식을 말한다. 여기에 미소를 발라 구워 먹기도 하고 닭고기와 채소 등을 냄비에 넣은 나베(전골) 요리로 즐기기도 하는데 재료와 모양을 보면 언뜻 가래떡이 연상되지만 맛과 질감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아키타는 한자어가 가을논을 뜻하는 ‘추전(秋田)’일 정도로 쌀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지역의 별미라고 해서 호기심을 갖고 먹긴 했지만 뇌가 이 맛을 기억하려면 몇 번은 먹어야 할 것 같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반주를 겸한 저녁. 매일 이런 날이었으면…

 

식사 후 이자케에 들러 사케와 맥주를 마셨는데 탁자마다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이자케 안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 담배를 피웠다. 순간 시내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잘 눈에 띄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편의점 앞에만 재떨이가 있을 뿐 길거리에는 재떨이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실내에서는 흡연이 가능하고 밖에서는 정해진 지역이 아니면 피지 말라는 것인데 희용이가 일본의 이런 시스템이 더 합리적이라고 의견을 피력한다. 즉 이자케 손님들은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알고 들어온 것이므로 문제가 없지만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 애꿎은 행인이 연기를 맡는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유일하게 담배를 피우는 나에게 “이자케 실내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으니 좋겠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실내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이런 생각을 몰라서이겠지만 저녁 숙소가 1인실일 때는 희용이 일부러 호텔 측에 얘기해서 내 방을 흡연이 가능한 곳으로 배정하기도 했다. 호텔 측에 룸을 바꿔달라고 했으나 방이 없다고 해 할 수없이 잠을 청했지만 그 퀴퀴한 냄새가 정말 싫었다.

 

■일본 최초의 세계자연유산 답구나 : 센슈공원, 구보타성, 시라카미 산지, 주니코 자연휴양림

 

구보타성, 메이지 유신 후 공원으로 꾸며 

다섯째날(10월 16일) 오전에 찾아간 곳은 아키타 시내에 있는 센슈공원(千秋公園)이다. 아키타 영주 사다케 요시노부(佐竹義宣)가 1604년에 쌓은 구보타(久保田)성을 메이지 유신 후 공원으로 꾸며 1896년 일반에 개방한 곳이다.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큼지막한 동상이 보인다. 구보타 번(아키타 현의 옛 행정명)의 12대이자 마지막 번주인 사타케 요시타카(佐竹義堯, 1825~1884))의 동상이다.

그는 요동치는 막부 말 정국의 변화 속에서 번의 악화된 재정을 정비하고 쇄신을 꾀하는 등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인물이다. 보신(戊辰)전쟁 때는 신정부군을 지지해 성이 파괴되는 것을 면했다. 보신전쟁은 1868~1869년 왕정복고로 수립된 메이지 정부와 옛 막부 세력이 벌인 내전이다.

구보타 번의 초대 번주는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 1570~1633)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1602년 구보타로 영지를 옮긴 후 기존의 미나토 성이 평성이고 방위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1603년 미나토 성의 남동쪽에 있는 신메이야마(神明山)에 새로운 성을 축성했다. 1604년 구보타 성이 준공된 후에는 구보타 번의 번청으로 삼았다. 그런데 망루 겸 지휘부로 쓰이는 천수각(天守閣·덴슈카쿠)이 있는 일본의 유명 고성(古城)과 달리 구보타 성에는 천수각과 석벽이 없다. 에도 막부가 성이라고 해서 모든 성마다 천수각을 만들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신 천수각처럼 생긴 망루가 있는데 오스미야구라(御隅櫓)라고 부른다. 구보타 성내에는 8 개의 망루가 있다. 그중 본성 북쪽 높은 대지에 지어진 망루가 오스미야구라다. 망루와 무기고 역할을 했다. 이곳에 들어가면 사다케 가문 가계도와 역대 영주들의 이력들을 전시해놓고 있다. 부대 행렬도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았다. 전망실에서는 시내를 볼 수 있어 센슈공원의 상징으로 사랑받고 있다.

구보타성에는 천수각이 없고 망루만 있지만 천수각과 흡사하다.

 

구보타 성내에는 요지로라는 여우의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요지로이나리 신사(與次郎稲荷 神社)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구보타 성을 지은 사타케 요시노부 앞에 어느 날 한 마리의 여우가 나타났다. “영주님이 성을 지어서 살 곳이 없어져 버렸으니 다른 살 곳을 주세요.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영주님께 도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라는 여우의 말에 요시노부는 다원 근처에 집을 주고 ‘다원 지킴이 요지로’라고 불렀다. 여우 요지로는 파발꾼으로 아키타와 에도를 불과 6일 만에 다녀오는 활약을 했지만 일을 빼앗긴 파발꾼들의 함정에 걸려 죽고 말았다. 요시노부가 요지로의 억울한 죽음을 불쌍히 여겨 그 영을 모신 것이 요지로이나리 신사다.

구보타 번은 1871년(메이지 4년) 8월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廃藩置県) 정책에 따라 아키타 현으로 개칭되었다. 폐번치현은 지방 통치를 담당했던 번을 폐지하고, 지방 통치 기관을 중앙 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으로 일원화한 행정 개혁이다. 공원은 1984년 15대인 사타케 요시나가의 유지에 의해 아키타 시에 기증되었고 아키타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며 센슈코엔(千秋公園)이라 이름붙여졌다. 센슈공원을 빠져나와 아키타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의 재래시장에 들렀다. 깔끔한 시장에서 오후에 들르게 될 산속에서 먹을 도시락을 샀는데 가성비가 훌륭했다. 저렴(4500원)한 데다 양과 질에서도 좋았다.

 

주니코 자연휴양림, 호수 규모 작지만 산책길은 으뜸

오후에 찾아간 곳은 시라카미(白神) 산지에 있는 주니코(十二湖) 자연휴양림이다. 시라카미 산지는 아모모리현 남서부와 아키타현 북서부에 걸쳐 있는데 시라카미다케(白神岳, 1235m)가 주봉이다. 산행은 능선길로 정상에 오른 뒤 계곡길로 하산하는 원점회귀형 코스가 일반적이다. 정상부 일부는 1993년 일본 최초로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천혜의 너도밤나무 원시림은 미아자키 하야오 감독의 만화영화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주니코의 한 호수

 

주니코는 33개의 산중호수 가운데 상대적으로 멋지고 아기자기한 12곳의 호수를 통칭한 명칭이다. 재팬 캐니언이라는 산 위에 오르면 12개 호수가 잘 보인다고 해서 주니코로 불렀다. 경북 청송의 주왕산 주산지가 12곳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호수 규모는 작지만 경관은 멋지다. 무엇보다 산책길이 으뜸이다. 12개 호수를 산책하는데 2시간이면 족하다. 주니코는 식물성플랑크톤의 영향을 받아 물빛이 대부분 녹색이다. 색깔도 빛의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 매혹적이다.

우리는 상류 호수 다섯 곳을 둘러보았다. 주차장과 기념품가게가 있는 입구에서 출발해 1.8㎞를 걷는 원점회귀 코스다. 아오이케(靑池), 게토바노이케(鶏頭場の池), 와키쓰바노이케(沸壺の池), 오치쿠라노이케(落口の池), 가마이케(がま池)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호수는 ‘아오이케(靑池)’다. 마치 잉크를 풀어놓은 듯 짙은 코발트색인 게 신비롭기까지 하다. 왜 이런 색깔을 띠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라고 한다. 주니코 홍보 사진에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다. 단풍이 덜 물들긴 했지만 숲속 풍경은 아름다웠다. 낙엽이 수북히 쌓인 길을 밟는 느낌도 좋다.

마지막 코스는 아오모리의 히로사키(弘前)다. 다만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해 아키타에서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히로사키로 북상한 뒤 그곳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오전에 히로사키를 둘러보기로 했다. 북상하는 해안도로 왼쪽으로는 서쪽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JR철도 ‘고노센(五能線)’이 다닌다. 고노센의 전체 길이는 147㎞로 일본인들도 한 번은 꼭 타고 싶어하는 유명 철도노선이다. 우리로 치면 동해 바다를 끼고 달리는 영동선 망상역~옥계역 구간이나 정동진역~안인역 구간을 닮았다.

주니코를 떠나 조금만 북상하면 바닷가 쪽에 유명한 후로후시(不老不死) 온천이 있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혼욕을 하는 노천온천이기 때문이다. 노천탕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앉아 있으면 시선이 수평선과 일치해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분이다. 당연히 석양 무렵이 압권이다. 히로사키에 숙소를 정한 뒤 일본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일본식 정식 요리인 가이세키(會席)를 선택했다. 2개의 사각 나무쟁반에 밥과 국, 회 몇 점과 요리, 채소 등이 담겨 나온다.

 

■역사적 가치와 수려한 경관 겸비한 곳 : 히로사키 공원, 히로사키성, 벚꽃축제

 

히로사키 성의 특징은 2중 해자와 천수각

여섯째날(10월 17일) 오후 출국에 앞서 오전에 히로사키 공원을 둘러봤다. 그곳이 유서깊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오래된 벚꽃나무였다. 다른 아름드리 나무들도 하늘 높은줄 모르고 쭉쭉 뻗어있다. 히로사키 공원의 핵심 건물인 히로사키 성은 아오모리 현 서쪽 쓰가루 지방의 통일을 이룬 쓰가루 다메노부가 1603년 계획하고 2대 번주 노부히라가 1610~1611년 완성했다. 준공 당시의 성 이름은 다카오카 성이었으나 1628년 히로사키 성으로 개칭했다. 히로사키 성은 메이지유신으로 번(藩)을 폐하고 현(縣)을 설치할 때까지 260년간 쓰가루 번정(藩政)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1895년 히로사키 공원으로 개장하고 1952년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히로사키성 해자

 

히로사키 성의 특징은 성을 2중으로 둘러싼 해자와 천수각이다. 천수각은 2대 번주 노부히라에 의해 1611년 5층으로 축성되었으나 1627년 낙뢰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천수각은 1810~1811년 9대 번주가 3층으로 개축한 것이다. 에도 시대에 재건되어 현존하는 천수각으로는 도호쿠 지방 유일의 것이다. 오늘날에는 일본 7대 성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높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천수각, 5개 성문, 3개 성루 등이 당시 모습과 규모가 그대로 보존된 것은 일본에서도 드물다.

현재 천수각은 원래 자리에서 70m 정도 이동한 곳에 있다. 1983년 지진 이후 혼마루(본채) 밑의 돌담이 붕괴될 우려가 있다는 진단에 따라 2015년 천수각의 밑둥을 잘라 높이 14.4m 무게 400t의 건물을 통째로 옮겼다. 건축물을 해체하지 않고 지레와 굴림대 등을 이용해 수평으로 옮기는 공법으로 두 달 반에 걸쳐 이동시켰다는데, 당시 일본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2025년쯤 원래 자리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천수각에 들어서면 돌담을 자르고 건물을 이동시키는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을 볼 수 있다. 리프트로 건물을 살짝 들어올린 뒤 바닥에 굴림대를 넣고 조금씩 끄는 방식이다. 2012년 방영된 KBS 2TV 드라마 ‘착한 남자’가 이 일대에서 촬영되었다. 주인공 송중기와 문채원이 히로사키 성 해자 다리에서 키스신을 찍었다.

히로사키성 천수각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벚나무, 히로사키 공원에 있어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시민들의 벚나무 기증이 활발히 이루어져 봄이 되면 왕벚나무, 수양벚나무 등 약 2600그루의 벚나무가 해자와 성벽을 배경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마치 성을 호위라도 하듯이 하늘로 솟거나 흐드러진 모습이 기세등등하다. 그덕에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벚꽃 축제가 열려 매년 250만여명이 다녀간다. 우리로 치면 진해군항제다. 나가노현 다카도조시 공원의 벚꽃, 나라현의 요시노야마와 더불어 일본 3대 명소로 꼽힌다.

히로사키의 벚나무는 100년을 훌쩍 넘긴 벚나무가 400그루나 있다. 그중에는 1882년쯤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벚나무도 있다. 140살이나 되었는데도 봄이 되면 여전히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공원에서는 봄의 벚꽃 축제 말고도 가을에는 히로사키성 국화-단풍 축제, 겨울에는 히로사키성 눈등롱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

히로사키성의 아름드리 벚나무들

 

공원 가장자리를 따라 걷다 보면 색다른 경관을 마주한 전망대가 나타난다. ‘쓰가루의 후지산’으로 불리는 이와키산(1625m)의 거대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와키산은 먼발치에 서 있으면서도 지척에 닿을 듯하고 히로사키 시내 어디서나 보인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운전한 거리는 1100㎞나 된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인데도 무탈하게 운전했음에 안도한다. 일본으로 갈 때는 갈 때는 인천에서 아오모리로 직항했지만 귀국 때는 아오모리를 출발해 하네다 공항을 거쳐 김포공항으로 귀국했다. 내년 일정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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