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영화 ‘국가의 탄생’ 개봉

데이비드 그리피스(1875~1948) 감독의 ‘국가의 탄생’은 20세기 초반에 제작된 영화인데도 스펙타클한 전투장면과 500명이 넘는 엑스트라, 여기에 혁신적인 영화기법과 다이내믹한 편집 등의 요소가 응축된 대형 장편영화로 유명하다.

1915년 3월 3일 뉴욕 리버티 극장 개봉 후, 그리피스는 이 영화 한편으로 일약 ‘미국 영화계의 아버지’라는 최고의 찬사를 들으며 스크린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으로 영화사에 기록되었다. 영화는 개봉과 함께 ‘세계 영화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고, 영화산업이 벤처산업일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시켜 주었다. 당시로서는 거금인 11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갔지만 미 전역에서 불러일으킨 엄청난 반향으로 1500만 달러나 벌어들였기 때문이다.

토머스 딕슨의 역사소설 ‘가문의 사람’을 원작으로 한 ‘국가의 탄생’이 활영을 시작한 것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1914년 7월 4일이었다. 2개월반 남짓 소요된 촬영기간도 당시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전례없는 3개월 간의 편집기간도 영화를 세계영화사상 최초의 3시간짜리 대작영화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연극배우, 영화배우, 시나리오작가, 영화스텝 등의 연출력과, 다양하고 풍부한 그리피스 감독의 경험은 영화를 성공시킨 결정적인 힘이었으며 당대 최고 인기스타였던 릴리언 기쉬와 라울 월시같은 쟁쟁한 캐스팅 역시 흥행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흑인들은 반발했다. 영화가 KKK단을 호의적으로 묘사하고 흑인을 모욕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너무나 명백한 인종주의에 항의하는 ‘전미 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 회원 수천 명이 극장 앞에서 연일 시위를 벌이며 반 그리피스를 외쳤다. 남부 연합군 장교의 후손인 그리피스에게는 ‘역사의식의 빈곤’, ‘가치관의 전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리피스는 한동안 ‘거장’으로 군림했으나 1920년대 중반 토키(무성)영화 시대의 개막과 함께 서서히 빛을 잃고 영화 무대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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