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 부임

을사조약에 명시된 대로 공사관이 폐지되고 통감부가 설치된 것은 1906년 2월 1일이다. 임부는 합병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임시 통감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이어 3월 2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함으로써 일제의 ‘통감(統監)정치’가 본격 가동되었다. 이토는 ‘고문(顧問)정치’와 ‘차관(次官)정치’라는 이름으로 외교에서부터 내정의 사소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며 합병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1907년 7월 19일에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7월 24일에는 통감의 권한을 더욱 강화한 ‘한․일신협약’을 체결, ‘차관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7월 31일)하고 일본 군대와 경찰을 확대ㆍ강화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더욱 옭아맸다.

이토는 3년 6개월 동안 합병에 필요한 모든 정지작업을 마치고 1909년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했으나 그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피살당해 오랫동안 꿈꿔온 한일합병을 지켜보지 못하고 저승길로 떠났다.

이토는 우리 민족에는 ‘공적 1호’이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근대 일본의 기틀을 마련한 최고의 정치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젊어서 영국과 독일을 방문해 선진문물을 경험하고 돌아와 1885년 초대 내각 총리에 올라 메이지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1888년에는 헌법초안을 심의하기 위해 설치된 추밀원 의장을 맡았다. 총리를 4번이나 지내면서 메이지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개설하는 등 일본 근대화 곳곳에 그의 손때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이토가 일본 근대화에 끼친 공적은 크고도 넓다. 유연하고 신중한 성격에 타고난 조정력까지 갖춰 정치적으로는 승승장구했지만 한편으로는 사생활이 문란하고 허장성세에 능했다. 일본의 ‘문예춘추’ 2002년 2월호는 그를 역대 총리 가운데 최고의 총리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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