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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유람기, 알프스 산행기 5-⑤] 멘리헨, 피르스트, 하더쿨름

by 이희용

 

제5부 마지막날까지 벌어진 술판과 숱한 이야기꽃

■셋째날(6월 9일) – “31개국을 가봤는데 스위스가 가장 좋고 이번 여행이 가장 즐거웠어”
그린델발트-라우터브루넨-벵엔-뮈렌-피르스트-그린델발트

 

오늘은 동신항운이 제시한 일정 가운데 두 탕을 뛰는 날입니다. 그린델발트역에서 츠바이뤼치넨역으로 내려간 뒤 열차를 갈아타고 라우터브룬넨역으로 올라갑니다. 라우터브룬넨은 폭포가 많기로 이름난 곳입니다. 여기서 그러취알프까지는 케이블카를 탔다가 그곳에서 다시 산악열차를 타고 뮈렌으로 갑니다. 한적하고 아담한 마을인데 이런 경치는 워낙 많이 봐서 그런지 큰 감흥은 없습니다. 여기서 영화 007 시리즈 ‘여왕폐하대작전’ 촬영지로 유명한 쉴트호른으로 가는 곤돌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닌 패스에는 해당되지 않아 포기하고 빈테레그역까지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 내려왔습니다.

융프라우 주변 지도. 동신항운 사이트에서

 

라우터브룬넨역으로 돌아와 열차를 타고 벵엔으로 향합니다. 무척 마을이 예쁘고 매력적으로 비치는데 숙박비는 우리가 자는 곳보다 비싸 보입니다. 여기서 곤돌라를 타고 멘리헨까지 갑니다. 정상부에는 전망대를 왕관처럼 꾸며놓았습니다. 오르는 길 이름도 로열 워크입니다. 그 옛날에 어떤 왕이 왔다간 모양입니다. 이곳도 전망이 아름답습니다.

상호가 포함된 멤버로 점프샷을 시도한 뒤 내려가 다시 그룬트까지 곤돌라를 타고 갑니다. 이번에 스위스에 와서는 트램을 빼고 각종 교통수단을 골고루 타보는 듯합니다. 비행기, 유람선, 버스, 열차, 곤돌라, 케이블카 등등. VIP 패스 비용이 비싸다 싶었는데 이렇게 알뜰하게 이용한다면 비싼 것도 아닌 듯싶습니다.

멘리헨 로열워크에서 점프

 

아직도 하나 더 남았습니다. 그룬트에서 그린델발트역까지 기차를 타고 간 뒤 그린델발트에서 피르스트로 가는 곤돌라를 탑니다. 피르스트까지 가는 곤돌라는 세 단계로 나뉘어 있습니다. 내려오는 구간마다 각각 집라인 형태의 플라이어, 세발자전거 모양의 마운틴카트, 두발자전거를 닮은 트로티바이크를 각각 즐길 수 있습니다.

곤돌라에서 내리니 중국 장가계의 잔도처럼 아찔한 높이의 벼랑 허리를 따라 만든 클리프 워크가 있습니다.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돌출된 전망대도 있고요. 겁은 나지만 그래도 스위스여서 중국보다는 훨씬 튼튼하게 만들었으리라 믿고 자신 있게 걸음을 내딛습니다. 바흐알프 호수까지 갔다가 오는 트레킹길은 6㎞나 되기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한 한국인 중년 사내를 만났는데 은퇴하고 혼자 유럽을 여행 중이라고 하네요.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안돼 보이기도 합니다.

이제 정형과 플라이어를 타려고 하는 찰나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플라이어 타는 곳의 직원들도 장비를 챙겨 돌아옵니다. 모처럼 스릴을 즐겨 보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습니다. 첫 구간은 곤돌라를 타고 내려와 두 번째 구간에서 마운틴카트를 탑니다. 동력 장치는 없고 핸들과 브레이크만으로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기구입니다. 자칫하다가는 낭떠러지로 미끄러질 수도 있겠습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신나게 질주를 즐깁니다.

세 번째 구간의 트로티바이크는 마운틴워크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아 곤돌라를 타고 내려왔더니 트로티바이크를 타고 막 내려온 한국 젊은이들이 “이거 완전 재미있네”라는 말을 주고받습니다. “마운틴워크보다 재미있어요?”라고 물어보니 “둘다 타봤는데 이게 훨씬 재미나요”라고 말합니다. 살짝 후회가 밀려왔으나 돌이키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다 내려온 뒤에 비가 그쳐 다시 올라가 플라이어를 탈까 생각했다가 기다리는 친구들을 생각해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대장인데 제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안 되겠지요.

멀리 설산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정형
트램 빼고 각종 교통수단 골고루 경험

오늘은 마지막으로 취사를 하는 날입니다. 남은 봉지라면과 컵라면, 햇반 하나, 쌀, 스팸, 통조림, 술안주, 술 등을 모두 처분하는 날입니다. 미리 계산해가며 먹기는 했지만 거의 비슷하게 맞춰 먹었습니다. 남는 통조림은 외국 생활을 하는 상호에게 무상 불하하기로 합니다. 달걀도 반 판을 사와 그 중 절반을 프라이해서 먹었습니다. 주방 한쪽에서는 중국인들이 고기를 썰고 제대로 요리를 해먹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융프라우의 밤을 즐기러 밖에 나갔습니다. 아이거북벽이 바라다보이는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십니다.

방으로 돌아와 둘러앉습니다. 내일 하루가 더 남기는 했지만 열흘간의 여행 일정을 마무리하는 자리입니다. 특히 상호는 한동안 다시 못 보겠지요. 돌아가며 소감을 털어놓습니다. 정말 걱정도 많았는데 대원들이 잘 따라와준 덕분에 대과 없이 원정을 마칠 수 있게 됐습니다. 친구들의 얼굴에도 만족감이 넘쳐흐릅니다. 대원 각자가 알게 모르게 다른 대원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서로 조심하고 참고 배려한 것을 알고도 남지요.

정형이가 내게 “넌 가족과의 관계를 떠나 생각한다면 그 동안의 해외여행 가운데 어디가 가장 좋았니?”라고 묻습니다. “내가 31개국을 가봤는데 스위스가 가장 좋고 이번 여행이 가장 즐거웠어”라고 말하니 정형이가 기뻐합니다. 립서비스가 아니라 정말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술 마시고, 웃고 떠들며, 경치 좋은 산길을 걷고 하는 이런 재미는 쉽게 느낄 수 없지요.

피르스트 클리프 워크

 

옛날 추억담을 되씹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고, 각기 다른 직업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나누며 온갖 분야에 걸쳐 토론한 것도 큰 재미였습니다. 오래 사귄 친구들이지만 이들의 새로운 면모를 본 것도 큰 소득이었습니다. 각서를 쓰지 않았어도 부족한 대장을 잘 따라준 대원들이 눈물 나게 고맙습니다.

사실 이번 여행이 가장 흡족했던 친구는 유일한 흡연자인 정형이었을 겁니다. 어디서나 담배를 쉽게 피울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다른 나라에 가면 눈치도 보이고 불편하고, 특히 주위 사람에게 구박받지 않으려면 부지런하게 움직여 빨리 담배를 피우고 일행과 합류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별로 그럴 일이 없었지요.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가 담배에 이렇게 관대한 걸 보면 우리나라의 금연정책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2년 전부터 담배를 끊고(참고)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흡연자를 괄시하는 건 인권 침해일 뿐 아니라 사실상 공기업이 담배산업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율배반적인 정책이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흡족했던 친구는 유일한 흡연자인 정형

우리가 나눈 대화의 소재 가운데는 설악산 케이블카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조건부로 허가하기로 한 오색지구-끝청 케이블카 설치 계획은 촛불집회로 박근혜 대통령의 힘이 빠진 지난 12월 문화재위원회에서 부결됐지요. 케이블카 찬성론자들은 스위스 예를 들며 산악철도나 케이블카를 건설하면 등산로에 사람이 덜 다니기 때문에 환경 피해가 많지 않다고 말하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원칙대로만 운행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찬성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니 반대한다는 겁니다. 권금성 케이블카는 설악동과 권금성의 두 지점을 연결하는 공중 선분으로만 그쳐 큰 문제가 없습니다. 너무 가팔라 이 구간을 오르내리는 사람도 없고 권금성에서 위로 올라가는 화채능선은 통제구간입니다.

당초 덕유산 곤돌라도 설천봉까지만 가도록 돼 있었고 정상인 향적봉으로 가는 길은 목책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두 사람씩 넘어 다니다가 이제는 아예 향적봉 방향으로 안내 표지판까지 세웠습니다. 곤돌라 업자가 손님을 더 태우기 위해 유도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국립공원은 관리 인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내세울지는 모르지만 묵인이나 방조를 넘어 협조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 때문에 향적봉은 하이힐 신고도 올라오는 돗데기시장이 돼 있고 주변의 식생 파괴가 우려됩니다. 얼음골 케이블카도 다른 능선으로 향하는 길을 목책으로 막아놓았는데도 넘어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립공원이 덕유산 케이블카를 당초 허가 조건대로 되돌려놓는다면 설악산 케이블카도 찬성하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등산객이 끝청에서 내려 대청봉으로 향한 뒤 오색이나 설악동으로 내려갈 겁니다. 아니면 반대로 설악동에서 천불동계곡 거쳐 올라온 사람들이 끝청에서 케이블카 타고 내려가겠지요.

 

 

■넷째날(6월 10일) – 가는 날까지 융프라우 쪽쪽 빨아먹기
그린델발트-인터라켄-하더쿨름-취리히공항

 

마지막 날이 밝았습니다. 상호는 새벽에 숙소를 나서 취리히공항에서 튀니지로 떠났습니다. 모두 주섬주섬 귀국 짐을 꾸립니다. 먹을 걸 다 비우다 보니 선물을 샀는데도 캐리어가 가벼워졌습니다.

열차를 타고 가는 중에 전날 남겨두었다가 아침에 삶은 달걀을 꺼냅니다. 열차칸에서는 역시 삶은 달걀이 제맛이죠. 그런데 달걀이 채 익지 않아 노란 물이 줄줄 흐릅니다. 비닐봉지도 제대로 묶이지 않은 탓인지 동규 가방이 달걀 국물로 젖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난의 화살이 날아와 영수에게 꽂힙니다. “누가 5분만 삶으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란 변명이 힘없이 흘러나옵니다.

인터라켄 동역에 내렸습니다. 마지막 관광지 하더쿨름으로 향합니다. 수직에 가깝게 올라가는 열차 푸니쿨라를 타고 오르는 곳입니다. 푸니쿨라 타기 전에 야생동물원이 있다고 해서 둘러봅니다. 산양 비슷하게 생긴 염소 아이벡스와 설치류 마멋이 보입니다. 푸니쿨라에는 사람이 가득합니다. 하더쿨름은 높이가 고작 1,322m밖에-고작 밖에라니-되지 않지만 인터라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 명소입니다. 이곳에도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이 자리잡고 있더군요. 사실상 마지막인 융프라우 기념 단체 사진을 찍습니다.

마지막 여행지 하더쿨름

 

호기심과 욕심이 많은 저와 정형이는 여기서 트레킹길을 잠시 걷는 중에 다른 대원들은 먼저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갑니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대장을 무시하는군요. 나중에 친구들에게 들으니 태성이가 “융프라우 트레킹 첫날에는 희용이가 나를 데리고 고생시키더니 이제는 정형이를 데리고 고생시키네”라고 했답니다. 사실 태성이는 그날 고생을 한 탓인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탓인지 눈에 띄게 몸을 사리더군요. 술도 거의 안 마시고요. 동규 표현에 따르자면 “배터리가 거의 방전돼 절전 모드에 들어간 것”이랍니다.

식사를 마치고 인터라켄 서역으로 향합니다. 되돌아보니 융프라우 VIP 패스를 정말 알뜰하게 사용했습니다. 패스에 나와 있는 곤돌라, 케이블카, 푸니쿨라 코스 7가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타본 겁니다. 일정이 하루만 적었어도 그 가운데 한두 가지는 포기를 해야 했을 텐데 말이지요. 제가 “융프라우 뽕 뽑기기”라고 표현하니 동규는 “융프라우 쪽쪽 빨아먹기”라고 말하더군요. 규모가 훨씬 작은 설악산에 빗대자면 대청봉에도 오르고, 울산바위도 가고, 비룡폭포 거쳐 토왕성폭포도 보고, 백담사 들러 봉정암도 가고, 오색에서 주전골 거쳐 만경대도 보고 한 식이지요.

일찌감치 취리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비행기에 오릅니다. 가는 길에는 비교적 모여 앉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전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보며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오늘도 바쁘게 움직였더니 피곤이 몰려옵니다. 이제 푹 자야겠습니다.

참! 스위스 떠나기 전에 알려주겠다고 했던 앞뒤로 똑같은 세 글자 단어를 아직 말하지 않았군요. 토마토, 마그마, 기중기, 일요일, 기본기, 아시아, 별똥별, 오디오, 복불복, 다시다 등이랍니다. 앞의 세 가지는 제가 문제를 냈을 때 말했던 것이고, 나머지는 저도 잘 생각나지 않아 나중에 인터넷 뒤져 찾은 겁니다.

 

귀국 – 여행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 되고 가슴 떨릴 때 가야 한다

귀국 5일 뒤인 16일 금요일 저녁. 대학친구가 대학로에서 운영하는 샤부샤부집 비스트로 솟대에 모였습니다. 부천에 사는 갑표와 튀니지에 있는 상호만 빼고 전 일정을 함께한 대원 6명이 다시 뭉친 거지요. 다른 반가운 친구들도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벽에 큼지막한 플래카드가 붙어 있습니다. 스위스 사진 배경 위에 ‘80 알프스 원정 무사귀환, 병덕과 정형 출간, 희용 승진 축하모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그 플래카드인데 어린이용 그림책 ‘려마똥 별 소동’을 출간한 김병덕과 ‘20세기 이야기’ 10권을 완간한 김정형도 함께 축하하고 제가 부국장대우에서 대우 자가 떨어진 것을 기념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돌아가며 소감을 말합니다. 저는 “함께하지 못한 친구들 생각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경치를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라고 너스레를 떱니다. 동규는 “알프스 경치를 보다 보니 ‘인생 뭐 있냐’ 하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더라”라고 털어놓고, 정형이는 “난 책 마무리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다 준비했고 난 몸만 다녀와 미안했다”면서 “친구들의 인품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 여행”이라고 겸손을 떱니다. 잠자리 비운의 아이콘인 태성이는 “여행 갈 때는 꼭 짝수로 가야겠더라”라고 말합니다.

이제 다음 여행을 계획해야겠습니다. 여행은 계획만으로도 즐겁고 설레는 일이지요. 누군가 여행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 되고 가슴 떨릴 때 가야 한다고 했다죠. 계획할 땐 즐거웠다가 막상 가고 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번에는 계획보다 실제가 더 좋았습니다. 일부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크게 낭패한 적은 없고, 사이가 틀어져 다시는 쟤랑 안 가겠다고 하는 친구도 없기 때문에 다음 여행까지도 제가 대장을 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해외 원정을 기대해주십시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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