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발간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요 역사

김소월(1902~1934)은 우리나라 역대 시인 중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시인’이요 ‘한국 현대시의 대명사’다. 대표 시인을 꼽는 각종 조사에서 늘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소월에 대해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라고 했고, 김용직은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요 역사”라고 했다. 김소월의 시가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문학평론가 오세영은 전통적인 한의 정서 표상, 여성적 정조의 표현,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의 내포, 민족의식의 형상화를 꼽는다.

본명이 김정식인 김소월은 평북 구성의 외가에서 태어나 백일 후 고향인 평북 정주로 돌아와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유아기를 보냈다. 그러나 2살 때이던 1904년, 부친이 처가 나들이를 하다가 사소한 시비 끝에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에게 집단 폭행를 당하고 그 일로 정신질환을 앓는 폐인이 되면서 소월의 집안 분위기는 늘 어두웠다. 어머니는 지극정성으로 소월을 키웠으나 문맹인 탓에 소월의 탐구욕을 채워주지 못했다.

어머니 대신 소월의 지식욕을 채워준 것은 같은 집에 살던 첫째 숙모 계희영이었다. 숙모가 틈틈이 이야기해준 고대소설과 설화들은 소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문학 세계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훗날 숙모는 소월의 시 ‘접동새’, ‘물마름’ 등이 자신이 들려준 설화를 소재로 해 쓰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월의 생애에 큰 전기가 된 것은 1915년 4월의 오산학교 진학이었다. 소월은 오산학교 교육을 통해 향토 생활에 머물러 있던 시야를 민족과 국가 차원으로 넓히게 되었고 오산학교 교장·교사였던 이승훈과 조만식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일생 동안 스승으로 모시게 될 김억을 만난 덕에 자신의 인간적이고 민족적인 한을 문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김소월은 오산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6년 조부의 강권으로 결혼을 했다. 아내의 외모가 실망스러웠으나 심성이 착하고 도덕적 규범이 엄격해 비교적 무난하게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오산학교 생활은 1919년 3․1 운동 발발 후 일제가 오산학교를 폐교함으로써 졸업을 1년 앞두고 끝이 났다. 김소월은 3년여를 집에서 지내다 1922년 서울의 배재학교 5학년으로 편입해 1923년 졸업했다. 그해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짧은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향했다.

 

시집 ‘진달래꽃’, 문학작품 최초로 근대문화재 지정

김소월은 비사교적이고 비사회적인 성격 탓에 친구나 문우를 거의 사귀지 못했다. 집안에서도 숙모를 제외하곤 대화를 나눌 사람이 거의 없어 외롭고 적막했다. 식민지 지식인의 이상과 꿈이 식민지 현실에 짓밟힌 것도 한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성격과 가정환경이 더 크게 작용했다.

정신이상자 아버지, 세속적인 기대에만 연연하는 문맹 어머니, 시대적 이념을 외면한 채 전통적 규범에만 얽어매려 하는 조부, 원치 않는 결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아내, 기울기 시작한 가산과 궁핍, 무능한 자신에게 떠맡겨진 장손으로서의 책임 등에 내성적 성격까지 더해져 모든 게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김소월이 1924년 처가인 평북 구성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농사일을 돌보며 시를 쓴 것도 이러한 중압감에서 해방되고 싶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김소월이 문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가정환경과 내성적 성격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하고 유난히 이야기를 좋아했던 아이, 풍부한 상상력과 여성처럼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던 아이가 답답한 가정환경에서 벗어나 시에 탐닉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것이다.

김소월을 시로 안내한 사람은 오산학교 스승 김억이었다. ‘창조’지 동인이던 김억은 김소월의 ‘그리워’, ‘낭인의 봄’, ‘야의 우적’, ‘오과의 읍’, ‘춘강’ 등 5편의 시를 추천해 1920년 3월 ‘창조’ 5호에 게재케 함으로써 문단에 데뷔시켰다. 김소월은 같은 해 7월 ‘학생계’에 ‘거친 풀 허트러진 모래동으로’를 발표하고 1년여의 공백기를 보낸 후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1922년은 시작 활동이 만개한 해로, ‘개벽’지 1922년 1월호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등을 발표하고 ‘개벽’지 1922년 7월호에 우리 민족의 애송시 ‘진달래꽃’을 싣는 등 1922년에만 50여 편의 시를 선보였다. 1924년에는 ‘창조’의 후신으로 김동인이 발족한 ‘영대’의 동인이 되어 ‘영대’ 3호에 ‘산유화’ 등을 발표하고 1925년 12월 26일에는 ‘못잊어’, ‘엄마야 누나야’,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 127편의 시가 수록된 자신의 처음이자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매문사에서 발간했다. ‘진달래꽃’은 2011년 2월 근대 문학작품으로는 처음으로 근대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문학과 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을 놓아버리고 술에 기대 세월 보내

김소월은 1926년 들어 사실상 모든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1926년 8월부터 1927년 3월까지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다가 파산하고 마지막 생존 방편으로 고리대금업에 손을 댔으나 이마저도 실패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게 수시로 수모와 모욕을 당했다. 심지어 작품마저 일경에 빼앗기는 일이 벌어지자 문학과 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을 놓아버리고 술에 기대 세월을 보냈다.

김소월의 아내에게서 전해 들었다는 숙모 계희영의 증언에 따르면, 김소월은 1934년 12월 23일 장에 다녀온 뒤 아내와 둘이서 술을 마신 후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던 아내는 새벽 잠결에 김소월이 무엇인가 자신의 입에 넣어 주기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싸늘하게 시체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전언만이 전해질 뿐 사인이나 그 후의 자세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돌지 않은 것은 문중에서 ‘부끄럽고 끔찍하다’며 함구했기 때문이다.

김소월의 돌연사 원인에 대해 학계가 제기한 유력한 추정은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왜 중독성이 강한 아편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김소월이 생전에 심한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었고 고통이 극심해질 때면 통증을 잊고자 아편을 조금씩 복용했다”는 증언이 있어 관절염 때문에 아편을 먹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늘날 김소월의 시는 다양한 노래로 바뀌어 시대를 뛰어넘는 전 국민의 애창곡으로 불리고 있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원제:엄마야 누냐야 강변 살자)를 비롯해 정미조의 ‘개여울’(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홍민의 ‘부모’(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장은숙의 ‘못잊어’(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건아들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활주로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마야의 ‘진달래꽃’(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인순이의 ‘실버들’(‘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고) 등이 모두 김소월의 시로 만들어진 노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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