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러시아혁명과 제정 러시아 붕괴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농민 정부’ 탄생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의 문턱에서, 러시아의 차르(황제)가 맞딱뜨린 것은 혁명의 소용돌이였다. 노동자들의 잇따른 파업으로 차르의 권위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사이 혁명 세력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정국을 뿌리째 흔들었다. 혁명적 분위기는 1904년 초에도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으로 맹목적 애국주의가 노동자·농민에게까지 확산하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참혹한 패배와 극심한 경제난은 절대왕정의 무능과 부패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이로 인해 러시아에 또다시 혁명의 한파가 휘몰아쳤다.

1905년 1월 22일(러시아력 1월 9일) 일요일 아침, 10만여 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차르의 동궁(겨울궁전) 앞으로 몰려갔다. 1개월 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관차 공장에서 파업을 벌인 일부 노동자의 해고가 발단이었다. 시위대의 선두에는 게오르기 가폰 신부가 있었고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 정당인 사회민주당 선동가들이 대열 곳곳에서 시위대를 격려했다. 가폰은 러시아정교 신부이면서도 공장 노동자 모임을 조직해온 온건파 노동운동가였다.

가폰은 차르(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손에 들고 행진을 이끌었다. “존경하는 아버지 차르”로 시작하는 공손과 애원조의 청원서에는 보통선거에 의한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1일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을 보장해달라는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시위대는 무장을 하지 않았고 질서를 지켰다. 다수는 성상을 들고 찬송가와 러시아 국가를 불렀으며 앞 열 시위대는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했다.

시위대가 동궁 앞에 다다랐을 즈음, 군대가 시위대를 가로막고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불응하고 계속 전진하면서 동궁 앞은 이내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무차별 총격과 잔혹한 칼부림으로 한겨울 광장에 쌓인 흰 눈 위에는 붉은 피가 선연했다. 각종 발표를 종합하면 그 자리에서 150~500명이 죽고 200~3,000명이 다쳤다. 가폰은 해외로 망명했다가 1906년 봄 귀국했으나 차르 경찰과 손을 잡은 것이 밝혀져 사회혁명당원에게 살해되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 소식은 빠르게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믿어왔던 차르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전국의 노동자와 농민은 파업과 봉기로 저항했다. 철도와 통신이 마비되고 전국의 경제생활이 혼란으로 치닫는 등 국가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는 가운데 5월 1일의 메이데이에는 전국 200여 개 도시의 노동자들이 동시 파업을 벌였다.

6월 27일(러시아력 6월 14일)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포템킨호 수병들까지 흑해 북쪽 오데사항 앞에서 선상 반란을 일으키면서 차르 체제의 종말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들은 러시아 최초로 대표자 회의를 뜻하는 ‘소비에트’를 구성했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도 소비에트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한겨울 광장에 쌓인 흰 눈 위에 붉은 피 선연

서유럽으로 망명해 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피의 일요일’ 사건 소식을 듣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은 1905년 9월이었다. 하지만 파업과 봉기를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은 레닌이 아니라 레온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발빠르게 귀국해 민중을 선동하고 효과적인 전술을 제시했다. 봉기는 총파업이 전국으로 확대된 10월에 절정을 이뤘다.

상황이 급변하자 지식인, 전문 직업인, 자유주의적 기업가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입헌주의자들도 파업을 지지했다. 파업 참가자들의 주장과 요구는 다양했다. 첫째는 선거에 의한 제헌의회 소집과 자유화였고 둘째는 토지 분배를 뼈대로 하는 농촌의 개혁이었으며 셋째는 노동조건의 개선과 노동자들의 생활 향상이었다.

결국 차르는 10월 30일(러시아력 10월 17일) 두마(의회)의 설립을 약속하고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10월 선언’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이후 짧은 기간이지만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고 노동시간과 노동조건이 일정 부분 개선되었다. 이처럼 ‘10월 선언’이 중산층과 일부 혁명 세력을 만족시키자 자유주의자와 부르주아들이 차리즘의 수호와 인민혁명의 타도를 표방했다.

차리즘 타도에 앞장섰던 사회혁명당 안에서도 10월 선언에 동조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반면 좌파는 토지의 국유화와 재분배를 강력히 요구했다. 소비에트는 정치범의 전면적 석방, 토지 분배, 8시간 노동제, 검열제 폐지, 언론 자유 보장 등을 요구했다. 결국 혁명 세력의 분열로 파업 열기가 점차 식어 파업은 중단되었다.

차르 정부와 극우 세력이 반격에 나선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들은 폭력단을 동원해 혁명가들과 전투적 노동자들을 폭행하고 살해했다. 불과 2~3주 사이에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2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재판을 거치지 않은 총살과 교수형도 다반사로 집행되었다.

그러자 소비에트 중앙집행위가 12월에 새로운 총파업을 결의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지쳐 있었고 준비도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벌였으나 곧바로 진압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역시 발족한 지 50여 일 만에 와해되었고 트로츠키는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결국 12월을 정점으로 그해 1월 시작된 혁명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한편 차르 정부는 총파업이 한창이던 1905년 12월 두마 선거법을 공포했다.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를 보이콧했으나 대중은 두마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두마 의원을 뽑는 선거는 1906년 3월 거행되었다. 그에 앞서 차르 정부가 선거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하원 격인 두마는 다단계 간선으로 구성하고 황실의 통제를 받는 상원 격의 국가회의 견제를 받으며 차르의 동의 없이 예산과 법률을 고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모든 법안은 국가회의와 차르의 동의를 얻어야 했으며 차르는 법안에 대한 절대 거부권은 물론 두마의 소집권과 해산권 그리고 비상사태 선포권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선거 결과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카데트(입헌민주당)가 제1당을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들은 전체 478석 가운데 179석을 차지하고 정부를 지지한 정당은 참패했다.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당의 당선자를 포함하면 전체적으로 반정부적 색채가 짙었다.

 

‘스톨리핀의 반동’ 거세게 몰아쳐

1906년 4월 23일 제헌 헌법이 공포되었으나 차르가 여전히 행정·군사·외교 등의 실권, 법률 거부권, 비상시 입법권, 두마 해산권까지 장악한 사이비 입헌군주제였다. 그래도 4월 27일 개원한 초대 두마는 차르 체제에 대한 의원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웅변장이 되었고, 따라서 ‘국민적 분노의 두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차르는 기세가 오른 두마를 견제하기 위해 1906년 6월 표트르 스톨리핀을 총리로 임명해 전권을 위임했다. 이후 러시아에는 ‘스톨리핀 반동’의 바람이 불었다. 스톨리핀은 취임하자마자 개원 후 73일밖에 지나지 않은 초대 두마를 해산하고 1907년 2월 2대 두마를 구성했다.

하지만 2대 두마에도 사회민주당과 사회혁명당 등 좌파 정당이 다수 진출해 한층 더 반정부적인 색채를 띠자 스톨리핀은 이들 좌파 정당이 반국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개원 100일 만인 1907년 6월 또다시 두마를 해산하고 개악된 새 선거법을 공포했다. 새 선거법에서는 선거인단의 3분의 2를 지주·자본가·관료·성직자로 채우도록 했다. 그 결과 1907년 11월 개원한 3대 두마는 전보다 더욱 보수화되었고 스톨리핀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스톨리핀의 반동’에 따라 200여 종의 신문이 폐간되고 노동조합은 문을 닫았으며 반정부 노동자와 지식인들은 처형되거나 유배지로 쫓겨났다. 즉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혁명가들은 즉각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톨리핀이 피살된 1911년까지 수천 명이 처형되고 수만 명이 투옥되거나 유배되었다. 활동가들은 투옥되거나 유형지로 쫓겨났으며 사회주의 정당의 지방 조직은 거의 괴멸되었다. 레닌도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그런데 스톨리핀은 좌익 혁명가는 물론 정부 안의 부패 세력에 대해서도 무자비하게 대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우익 폭력배들까지 일소하는 정책을 펴 그에게는 ‘목을 베는 사나이’, 교수대에는 ‘스톨리핀 넥타이’라는 별명이 따라 붙었다.

또한 스톨리핀은 자영농을 육성해 안정된 체제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토지개혁령도 제정·실시했다. 토지개혁령에 따라 농민은 미르(농촌공동체)에서 해방되어 자기 이름의 사유 토지를 갖게 되었다. 토지 사유제 도입 등 포괄적인 농업 개혁으로 농민을 우군화해 혁명 세력의 침투를 막으려고 한 그의 정책에 대해 레닌은 ‘건전한 반동 정치’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스톨리핀이 1911년 9월 18일 키예프의 한 극장에서 살해되면서 스톨리핀의 반동도 멈춰섰다.

다행히 러시아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은 차츰 호전되었고 산업은 발전했다.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되었고 두마는 자리를 잡아갔다. 문제는 1914년 발발한 1차대전이었다. 물자가 부족해지고 경제가 엉망이 되어 차르 정부를 안팎으로 혼란에 빠뜨렸다. 파업도 다시 꼬리를 물고 일어나 러시아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그런 와중에 주술사 라스푸틴까지 러시아 황실을 농락하면서 황실의 권위가 곤두박질쳤다.

 

‘혁명은 전쟁을 먹고 자란다’

‘혁명은 전쟁을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것은 1917년이었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자 페트로그라드(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칭)시는 1917년 초부터 먹을 것과 땔감 배급제를 실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급해줄 빵이 다 떨어지자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들이 ‘세계 여성의 날’인 1917년 3월 8일 “빵을 달라”며 거리를 행진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동참했다. 그해 첫 두 달 동안 1,300여 건, 70만 명이 참가할 정도로 파업은 일상사였으나 이날의 파업은 전 도시를 마비시키는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3월 11일 차르의 친위 부대가 군중에게 발포해 많은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런데 갑자기 친위 부대원들이 발포를 중단하고 시위 군중과 합세하면서 ‘2월 혁명’은 중대 전환점을 맞았다. 3월에 일어난 일인데도 2월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때가 러시아 구력으로 2월인 데서 연유한다. 병사들은 위에서 발포 명령을 내려도 하늘을 향해 총을 쏠 뿐 진압에 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장교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까지 했다.

페트로그라드는 점차 혁명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3월 13일 갓 출범한 혁명위원회가 차르의 장관들을 체포하고 3월 14일 군 장성들이 전선에 나가 있는 차르에게 “제위를 포기해야 독일의 침략에서 러시아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언하면서 사태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차르는 결국 3월 15일 황제직을 포기하고 동생에게 양위했으나 동생마저 신변에 위협을 느껴 황제직을 거부함으로써 303년 동안 이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차르 퇴위 후 임시정부를 구성한 것은 두마의 온건파 지도자들이었다. 멘셰비키(사회민주당 다수파)와 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병사 소비에트도 결성되어 이른바 ‘이중 권력’ 상태가 시작되었다. 소비에트는 임시정부를 마르크스주의가 정의한 사회주의로 가기 전 단계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보았기 때문에 임시정부가 혁명을 수호하고 민주적으로 행동하는 한 임시정부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즉 2월 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해석하고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는 것이 혁명 단계상 적절하다고 생각해 임시정부를 인정한 것이다.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는 불편하면서도 서로를 인정하는 협동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볼셰비키(사회민주당 소수파)의 레닌이 귀국하면서 상황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정치 선전의 명수 트로츠키까지 귀국함으로써 혁명은 급물살을 탔다.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2월 혁명이 발화하자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귀국을 결심했다. 그러나 전쟁의 지속을 결정한 임시정부와 영․불 연합국은 “제국주의 전쟁 반대”를 외치는 레닌의 귀국을 원하지 않았다. 레닌은 고심 끝에 러시아와 교전 중인 독일을 통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독일 군부도 전쟁 반대를 외치는 레닌을 러시아로 보내 전쟁 의지를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레닌과 30여 명의 망명가들은 훗날 ‘봉인(封印) 열차’로 불리게 될 열차를 타고 4월 9일, 스위스 취리히역을 출발했다. 열차는 문을 봉인한 채 여권과 짐 검사도 없이 스위스 국경을 넘어 독일을 통과한 뒤 스웨덴(중립국)과 핀란드(러시아 속국)를 거쳐 4월 16일(러시아력 4월 3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레닌은 곧바로 임시정부 지지를 철회하고 1차대전 참전 중단을 촉구했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임시정부 지지 철회’, ‘모든 토지의 국유화’ 등 10개조로 구성된 ‘4월 테제’다. ‘당면한 혁명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발표된 ‘4월 테제’는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부르주아혁명 단계를 뛰어넘어 바로 사회주의혁명을 쟁취하자는 레닌의 주장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레닌을 ‘독일의 첩자’로 몰아세웠고 멘셰비키는 ‘반동’이라고 비난했으며 플레하노프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며 일축했다. 멘셰비키는 “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며 여전히 1차대전 참전을 고수했다. 소수파였던 볼셰비키도 처음에는 레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가 ‘4월 테제’가 점차 전쟁에 지친 군인과 굶주린 노동자들 가슴속을 파고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했다.

1917년 6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제1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을 때 볼셰비키는 822석 가운데 겨우 105석만 차지해 멘셰비키(248석)와 사회혁명당(285석)에 비해 현저히 열세였다. 임시정부의 실권은 온건 사회주의자 알렉산더 케렌스키가 쥐고 있었다.

그러던 중 7월에 일어난 두 개의 사건으로 반전이 일어났다. 첫째는 임시정부가 독일을 향해 총공세를 펼쳤다가 대참패로 끝나자 전쟁에 싫증이 난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탈영한 것이고 둘째는 소비에트 조직원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임시정부의 위신이 떨어지고 반전을 외치는 볼셰비키의 인기가 높아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17년 7월 17일(러시아력 7월 4일) 페트로그라드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십 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케렌스키 정부는 대중의 시위를 ‘볼셰비키의 음모’라고 규정하고 발포를 명령했다. 이후 며칠 동안 계속된 시위에서 56명이 죽고 650여 명이 다쳤다. 케렌스키 정부는 페트로그라드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트로츠키와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핀란드로 탈출한 레닌은 ‘독일의 스파이’로 몰아세웠다.

 

인류사에 큰 변화를 몰고 온 것치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희생

볼셰비키의 승리를 가져올 최초의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9월 초였다. 보수파 인사들이 질서를 회복하겠다며 군 최고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9월 9일 소비에트가 장악하고 있는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했다. 케렌스키 정부는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코르닐로프를 해임하고 트로츠키를 석방했다. 철도 노동자들에게는 도움을 요청했다.

철도와 전신 노동자들이 쿠데타군의 통신과 이동을 방해해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군 고위층의 신망은 철저하게 떨어지고 임시정부는 고립되었다. 반대로 볼셰비키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트로츠키는 영웅이 되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뽑히고 레닌은 10월 20일 몰래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레닌은 철저한 무장봉기의 준비를 촉구했다. 예정된 봉기 일자는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개최일인 11월 7일이었다. 노동자 적위대와 혁명파 군인들이 봉기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임시정부가 선제 공격을 가해왔다. 곧 임기정부 군대가 볼셰비키의 인쇄소를 점령하고 정부청사와 역에 진주했다.

레닌은 11월 6일 오후, 볼셰비키 중앙위에 긴급 편지를 보내 “봉기를 늦추는 것은 곧 죽음”이라면서 당일 밤 봉기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6일 밤 노동자·병사들이 봉기했고 이들은 11월 7일 새벽 역, 교량, 발전소, 우체국, 전화국, 무기고, 국립은행 등을 무혈 점거했다. 그리고 11월 7일 오전 10시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정권의 탄생을 선포했다.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농민의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혁명군은 임시정부가 들어서 있는 동궁을 빼고 페트로그라드 전 시내를 점령했다. 동궁의 임시정부 각료들이 육사 생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항복을 거부하고 있는 동안 케렌스키는 페트로그라드를 빠져나갔다. 11월 7일(러시아력 10월 25일) 밤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했음을 선포했다.

그날의 대회는 볼셰비키가 다수파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참석자 648명 가운데 338명이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볼셰비키에 동조하는 사회혁명당 좌파까지 포함하면 대의원의 3분의 2가 볼셰비키 편이었다. 그리고 그날 늦은 밤, 동궁 뒤 네바강에 정박해 있던 오로라 군함이 동궁을 향해 쏜 2발의 포탄을 신호로 혁명군이 동궁으로 진입했다. 임시정부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동궁은 11월 8일 새벽 2시 함락되었다.

8일 오전 6시, 소비에트 대의원들에게 레닌이 기초한 “혁명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새 시대의 막을 열었다”는 대회 선언이 낭독되었다. 소비에트 대회는 3일간의 회의 끝에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새로 창설했다. 다른 당파는 참여하지 않았다. 레닌이 인민위원회 의장,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 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을 맡았다.

페트로그라드 봉기는 희생자를 거의 내지 않고 완료되었다. 다만 모스크바에서는 7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1월 16일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쟁취하기까지 전체적으로 사상자는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인류사에 큰 변화를 몰고 온 것치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희생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은 러시아 볼가강 남쪽에 위치한 타타르 지역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사·장학사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얼굴은 몽골계 타타르인의 피를 이어받아 보통의 러시아인들과는 달랐다. 광대뼈가 눈에 띄게 튀어나왔고 코도 납작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형 알렉산드르가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재학 중이던 1887년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3세를 암살하려다 체포․처형된 것은 레닌의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혁명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레닌은 1887년 카잔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그해 12월 학생 시위 연루 혐의로 제적되었다. 이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1895년 파리․취리히․베를린 등을 두루 방문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그해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노동계급 해방투쟁 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4개월간 감옥에 갇히고 3년간 시베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지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수정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다. 1900년 1월 유배 생활을 끝내고 잠시 러시아에 머물다가 그해 5월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1900년 12월 독일 베를린에서 러시아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등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최초 신문인 ‘이스크라’를 창간한 후 ‘레닌’을 필명으로 사용했다. 러시아어로 ‘불꽃’을 뜻하는 ‘이스크라’가 러시아에 밀반입되면서 레닌의 이론을 추종하는 혁명가들이 많아졌다. 트로츠키와 스탈린도 이스크라에 게재된 레닌의 글을 읽고 레닌의 지지자가 되었다.

레닌은 1902년 훗날 자신의 대표작이자 공산당 조직론의 고전으로 불리게 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팸플릿을 발표했다. 팸플릿에서 차리즘의 타도를 위한 직업적 혁명가들의 비밀스럽고 음모적인 지하 정당의 결성을 제의한 것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혁명의 객곽적 조건보다 혁명가들의 주관적 의지를 중시한 레닌의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이었다. 자본주의 발달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자본가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의 모순이 폭발해 무산계급의 혁명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예언한, 그래서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중시한 마르크스의 이론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문제적 인물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레닌은 1903년 영국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가 열렸을 때, “당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각오가 되어 있는 열성 혁명 분자만을 당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마르크스주의 정통성을 지키는 핵심적 지도자로 자처하던 플레하노프가 “레닌의 이론은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할 일반 대중을 무시한 음모적 엘리트들의 쿠데타를 의미할 뿐이며 만일 레닌 방식의 쿠데타가 성공해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면 그 정권은 결국 민중을 탄압하는 독재정권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레닌의 노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트형 혁명이라면 다른 다수의 노선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대중 중심형의 혁명이었다.

결국 레닌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만으로 소수파를 뜻하는 볼셰비키파를 만들었고 레닌의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은 멘셰비키파를 형성했다. 이후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다수파를 뜻하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로 갈려 영원히 불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레닌의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

1914년 발발한 1차대전은 레닌의 혁명 투쟁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레닌은 1916년 ‘제국주의론 :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는 소책자를 발간했는데 그는 소책자에서 자본주의는 반드시 망한다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이론이 왜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지에 대한 해답을 추구했다. 레닌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변모했기에 망하지 않고 생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자본주의 국가들이 해외에서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을 써서 식민지를 확보하고 그곳을 착취해 얻은 부로써 본국 노동계급의 불만을 무마하고 있기에 노동계급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아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화했을 때 레닌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망명 중이었다. 어느덧 그의 나이 47세. 30여 년 동안 혁명을 위해 몸바쳐온 일생이었지만 좀처럼 희망의 빛이 보이질 않았다. 한 모임에서 “우리 같은 늙은이가 앞으로 혁명의 결정적인 전장을 보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혁명에 대한 열정도 식어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레닌은 1917년 2월 혁명 소식을 들었을 때도 실감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은 분명한데 1905년처럼 좌절한 폭동인지 아니면 진짜 혁명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도 레닌은 귀국을 감행해 저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혁명을 성공시켰으니 한시름 놓아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게 한가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볼셰비키 정부를 안착시켜야 했는데 그러러면 전쟁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그 결과물이 1918년 3월 독일과 정전을 약속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이었다.

레닌의 건강을 결정적으로 빼앗아간 것은 1918년 9월에 일어난 레닌의 암살 기도였다. 레닌은 정치적 반대자가 쏜 총탄을 몸에 지니고 있다가 4년 후 제거해 건강을 해쳤다. 게다가 극도로 긴장해야 하는 오랜 혁명 활동과 그에 따른 과로는 1921년 중반부터 격심한 두통을 불러왔다. 1922년 5월 일어난 첫 발작은 정상적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공산주의가 뿌리내릴 때까지 일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1923년 3월 발병한 3번째 정신착란은 레닌을 사실상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

결국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모스크바 근교 고리키 별장에서 4번째 뇌졸중 발작을 일으켜 54세로 눈을 감았다. 시신은 미망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모스크바 붉은광장 지하 영묘에 안치되었다. 레닌을 신격화할수록 자신의 위치도 탄탄해질 것이라는 스탈린의 계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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