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안창호 흥사단 설립

창립 취지는 “국민의 인격 혁명을 통해 세계 최고의 일등 국민이 되자”

안창호(1878~1938)는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해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는 일에 평생을 바친 민족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각종 협회나 단체를 국내외에 다수 설립한 조직의 달인이었으며 연설의 귀재였다. 평남 강서군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던 안창호가 안일한 삶을 반성하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고 결의한 것은 1894년 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겪고 나서였다. 안창호는 곧 서울로 올라와 1895년 밀러학당(구세학당)에 입학하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7년에는 고향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하는 데 앞장섰다.

그가 일약 청년 명사로 떠오른 것은 1898년 9월 10일 독립협회 관서지부가 평양 쾌재정에서 주최한 만민공동회 연설 후였다. 그는 쾌재정 연설에서 18조목의 쾌재(즐거운 일)와 18조목의 불쾌(즐겁지 않은 일)를 들어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비리를 규탄하고 외세의 침탈에 강력히 대응할 것을 호소했다. 이후 그가 연설하는 곳마다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조만식, 여운형, 이승훈도 안창호의 연설에 영향을 받았다. 안창호의 명연설은 1898년 겨울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집회에서도 크게 빛을 발했다.

안창호는 1899년 고향에 점진학교와 난포리교회를 세워 교육과 전교 활동에 전념하다가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고 부족한 공부를 더하기 위해 1902년 10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곧 미국 서부에 사는 한인들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1903년 9월 미주 한인 최초의 조직인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했다. 한인들은 일거리를 주선하고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인친목회의 등장을 반겼다.

안창호는 1904년 샌프란시스코의 리버사이드로 이주해 미국인 가정의 가사고용인으로 일했다. 그런데 미국인 집주인이 집을 더럽게 관리하는 한인들에게 집 임대를 꺼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창호는 일일이 한인들의 집을 방문해 커튼을 치게 하고 문 앞과 창문에 화분을 놓아 꽃씨를 심게 하는 등 주변 환경을 청결하고 아름답게 가꿨다. 한인들이 이런 안창호에게 점차 마음을 열면서 안창호는 어느덧 한인 공동체의 지도자로 인식되었다.

안창호는 1905년 4월 5일 교민 상부상조 단체인 ‘공립협회’를 결성, 조직의 명수다운 행보를 보였다. 공립협회는 머지않아 회원이 600여 명으로 늘어나 3층 건물의 회관을 마련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간했다. 1908년 3월 대한통감부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려던 전명운 의사, 1909년 12월 이완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명 의사도 공립협회 회원이었다. 공립협회는 1909년 2월 1일 ‘국민회’(1910.5. ‘대한인국민회’로 개칭)로 확대 개편되어 미주 한인을 총괄하는 단체로 발전했다.

 

조직의 달인, 연설의 귀재

안창호는 나라가 백척간두에 놓이게 되자 1907년 2월 귀국해 4월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애국지사들의 구국 운동을 지휘했다. 신민회 총감독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양기탁이 추대되었지만 조직과 활동을 실제로 이끌어간 중심 인물은 안창호였다. 신민회는 엄격하게 선발된 회원 수가 800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비밀결사였던 만큼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안창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이 1907년 11월 안창호와 만나 조선 병탄 계획의 일환으로 청년내각 조직을 은밀히 제의했으나 안창호는 단호히 거절, 이토를 머쓱게 했다.

신민회는 일제의 조선 병탄이 노골화하자 애국 계몽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해외 독립군 기지 창설 운동을 준비했다. 의병 활동의 쇠퇴기이던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비밀회의를 열어 만주 지역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편성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추진하고 있던 중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안창호·이동휘·유동열·이종호 등 다수의 신민회 간부를 구속, 신민회 사업은 잠시 중단되었다. 다행히 일제는 신민회의 존재를 알지 못해 2~3개월 뒤 신민회 간부들을 석방했다.

신민회는 멈췄던 사업을 재개했다. 1910년 3월 양기탁의 집에서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했다. 독립전쟁 전략이란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 동삼성 국경 인접 지대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신민회가 모금한 자금으로 토지를 구입하고, 조선인들을 단체 이주시켜 신한민촌을 만들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장학교를 설립한다는 계획이었다. 신민회는 결정을 실천하기 위해 1910년 4월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 등을 만주와 러시아령으로 망명하게 했다.

안창호는 1910년 4월 중국을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로 들어가 각지를 돌며 한인의 권익 보호와 민족 통합을 주선하고 북만주 밀산의 개척지를 답사했다. 이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를린, 런던을 경유해 1911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국내에 남아 있던 신민회 회원들은 안악사건(1910)과 일제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1911)으로 대부분 투옥되고 이로 인해 신민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안창호는 국내 조직 기반이 무너지자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재미 한인을 일본인으로 취급하려는 주미 일본 대사관에 맞서고 미국에 새로 입국하는 한인들을 위해 출입국 관련 업무를 도와주는 등 준정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안창호는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3대 회장으로 선출되자 하와이․북미․만주․시베리아 등 4곳에 지방총회를, 멕시코․쿠바․필리핀 등 160여 곳에 지방회 조직을 결성했다. 이로써 대한인국민회는 명실상부한 세계 한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안창호는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종익(경상도), 홍언(경기도), 조병옥(충청도), 염만석(강원도), 민찬호(황해도), 강영소(평안도), 김종림(함경도), 정원도(전라도) 등 8도 대표를 포함해 25명의 창립위원과 함께 청소년 훈련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했다. 1909년 8월 그가 국내에 있을 때 발의하고 윤치호, 최남선 등이 조직한 청년학우회의 취지를 계승한 것으로 민족운동 지도자 양성이 목적이었다.

흥사단은 “국민의 인격 혁명을 통해 세계 최고의 일등 국민이 되자”를 창립 취지로 내세우고, 무실·역행·충의·용감을 4대 정신으로 삼았다. 일찍이 율곡 이이가 ‘성학집요’에서 무실·역행·실리·실심·실공을 강조했기 때문에 4대 정신은 안창호가 창안한 덕목이라고 할 수 없지만 안창호가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흥사단 회원은 창립 당시 35명으로 출발해 6년 후 150명으로 늘어났다.

안창호는 흥사단을 창립하면서 ‘독립혁명 방략도’를 구상해 독립운동의 단계적 로드맵을 선보였다. 그가 설정한 독립운동의 5단계 중 1단계인 기초 단계는 각 개인이 인내·충의·용감·신애의 정신으로 단결하고 행동통일·직무분담·주의일치의 정신력으로 민족의 대동단결 기초를 꾀한다는 내용이다. 흥사단 설립은 기초 단계에 해당된다. 2단계는 인력과 재력을 준비하는 진행 준비 단계이고 3단계는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완전 준비 단계이며 4단계는 독립전쟁 수행 단계인 진행 결과 단계이다. 5단계는 독립전쟁에 승리해 국권 광복을 이룩하고 민주공화주의 민권국가를 수립해 조국 증진으로 나가는 최종 단계이다. 이렇게 장기 로드맵을 그려놓고 몸소 실천한 지도자는 사실상 우리 역사에는 없었다.

안창호는 초기 상해 임시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발족하자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한 뒤 당시 분열하고 있던 세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도 추진해 국내와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통망을 구축하고 정부 기관지로 ‘독립’을 창간했다. 1923년 임시정부 내에서 노선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을 수습하고 민족운동의 통합과 임정 개조를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으나 회의는 끝내 결렬되었다. 1926년 민족 유일당 운동에 헌신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초기 상해 임시정부의 든든한 버팀목

안창호는 임정 활동을 하면서도 흥사단과 동일한 목적과 정신을 가진 운동을 전개할 생각으로 1920년 9월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했다. 국내에서는 이광수 등이 안창호의 뜻을 받들어 1922년 2월 서울에 ‘수양동맹회’를, 대성학교 동창생들과 전 신민회원이 1923년 1월 평양에 ‘동우구락부’를 각각 조직했다. 국내 두 단체는 1926년 1월 ‘수양동우회’로 통합했다.

안창호는 중국과 러시아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기 위한 이상촌 건설을 추진하고 정치사상인 ‘대공주의’ 실현에 진력했다. 대공주의란 민족 전체의 범국민적인 평등 사회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사회주의 사상 일부까지 포용해 초계급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하면서 자기 희생정신으로 민족 평등, 정치 평등, 경제 평등, 교육 평등의 4가지 평등 원칙에 입각해 민족과 인류에게 멸사봉공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안창호는 윤봉길의 의거가 있던 1932년 4월 29일 저녁 영문도 모른 채 상해 교민단장의 집을 찾아갔다가 잠복해 있는 프랑스 조계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었다. 김구가 안창호에게 그날의 거사 사실을 알리지 않고 “무슨 대사건이 일어날 듯하니 오전 10시 이후에는 집에 있지 말라”고만 해 의거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황에서 체포된 것이다. 안창호는 국내로 압송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했다.

그러다가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꼭 한 달 전인 1937년 6월 국내 민족주의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 검거령을 내렸을 때 또다시 검거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검거된 사람은 70여 명의 흥사단우를 포함해 500여 명이나 되었다. 안창호는 병이 악화되어 12월 24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석방 4개월 만인 1938년 3월 10일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서거했다.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서울 강남에 도산공원이 조성되었을 때 미국에서 온 부인의 유해와 함께 이곳에 합장되었다.

안창호는 생전에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고 주장했다. 인격혁명을 통한 자아 혁신이 자기 개조이고, 그것이 민족 개조로 이어진다는 게 안창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안창호의 사상이나 민족운동 노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며 절대 정직과 진실 정신을 최고 덕목으로 강조·실천한 도덕주의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혁명적 투쟁에는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그 하나요, 당장의 정치적 필요에 함몰되기보다는 인격 수양과 실력 양성을 강조한 그의 투쟁 방식에 대해 “싸움을 회피하는 준비론”이라는 비판이 또 다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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