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83년 : 안토니 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공사 총감독에 임명

↑ 안토니오 가우디

가우디는 건축가이면서 수도자

안토니 가우디(1852~1926)는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건축가’로 추앙받고 있고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초월의 건축’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 흐르듯 자유롭게 떠 있는 듯한 선적(線的) 형태들을 3차원의 건축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굳이 비교하자면 ‘아르누보’에 가깝다는 평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수도자처럼 살며 오로지 건축에만 관심을 두었으나 과한 장식과 지나치게 독창적인 스타일은 가우디 생존 시 호불호가 갈려 칭송과 비판이 혼재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건축의 신”이라고 평한 반면 일부 건축가들은 “새로운 것과 기괴한 것만을 좇아 천박하다”고 혹평했다.

가우디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서쪽 작은 시골 도시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폐병과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고 위로 두 형이 3개월 간격으로 죽어 가우디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날들을 하루하루 이겨내며 의지력을 키웠다. 지병 탓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은 가우디에게 자연은 친구이자 놀이터였다. 틈틈이 근처 숲과 강에서 놀며 자연에 대한 관찰력과 상상력을 키웠다.

가우디의 건축 재능은 구리 세공사이자 주물 제조업자인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 역시 장인 집안의 딸이었기에 부모 모두에게서 장인의 피를 물려받은 셈이다. 가우디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불을 다루고 철을 단련하고 무쇠를 녹이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훗날 어떤 재료도 겁을 먹지 않고 사용할 줄 아는 건축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가우디는 17살 때인 1869년 고향을 떠나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대학 예비과정에 입학하고 1874년 10월 대학입학 시험을 통과했다. 1875년 바르셀로나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틈틈이 건축 장인들의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1876년 바르셀로나 의과대에 다니던 형이 25살의 젊은 나이에 숨지고 이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도 2개월 후 세상을 떠나 한동안 깊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가우디의 건축학교에는 창의적인 교수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교수는 고전주의 건축을 그대로 모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우디는 단순하고 진부한 교육에 싫증을 느꼈다. 다혈질에다 고집까지 세서 자신의 스타일을 맹목적으로 강요하는 일부 교수와 마찰을 빚었다. 가우디가 1878년 졸업자 명단에서 제외된 것도 학장이 평소 가우디를 건방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우디는 다행히 다른 교수의 중재로 졸업할 수 있었으나 학장은 1878년 졸업식에서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치광이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초월의 건축

가우디는 1878년 3월 개인 건축사무소를 열긴 했으나 주로 다른 건축가들의 도제로 활동했다. 그 기간 카사 비센스, 레이알 광장의 가로등을 설계하면서 건축 경력을 쌓았다. 카사 비센스는 가우디의 철학과 재능과 열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모델하우스로 이 건축물을 설계한 후 더 이상 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만큼 유명해졌다.

가우디가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의 후원자 에우세비 구엘 백작을 만나고부터였다. 구엘은 무역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였다. 두 사람을 연결해 준 것은 1878년 장갑가게 주인의 의뢰를 받아 가우디가 제작하고 그해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유리 진열대였다. 구엘은 박람회에서 진열대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나중에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가우디가 진열대를 만든 인물이고 또 탁월한 능력의 건축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1918년 죽는 날까지 가우디 건축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두 사람은 건축주와 건축가의 관계를 넘어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로 지냈다. ‘구엘 궁전’으로도 불리는 ‘구엘 저택’(1886~1889)은 둘의 의기투합이 빚어낸 첫 결실이다.

가우디의 대표 작품 중에는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놓은 듯한 6층짜리 최고급 빌라 ‘카사 밀라’(1906~1910)도 있다. 당시 건축된 스페인 도시의 주택들은 대칭, 직선, 직각이 특징이었다. 합리성을 상징하는 직사각형의 건축은 현재까지도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지만 가우디는 카사 밀라의 외관을 물이 흐르는 듯한 곡선으로 설계했다.

가우디는 ‘건물은 각진 것’이라는 기존의 관행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건물은 살아 있는 유기체’라는 믿음 아래 자유롭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설계해 1910년 12월 카사 밀라를 완공했다. 물결치듯 흐르는 선은 외곽뿐 아니라 각 층의 내부에도 이어졌는데 이는 가우디 이전의 그 어떤 건축가도 시도하거나 모험하지 못한 예술의 경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카사 밀라가 있는 바르셀로나의 시민들은 잘린 돌을 그대로 많이 쌓아 올렸다고 해서 채석장이라는 뜻의 ‘라 페드레라’로 불렀다.

건물이 완성되자 호불호로 갈렸다. 유기적인 형태나 조형성을 높이 평가하는 찬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이었다. 그러나 카사 밀라는 오늘날 ‘20세기 건축 베스트 10’에 꼽히고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될 만큼 가우디의 역작이자 인류의 위대한 공학적·예술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우디의 일생은 죽는 날까지 성당 공사에 바쳐져

사실 카사 밀라를 포함해 가우디 건축의 상당 부분은 바르셀로나 북서쪽에 위치한 몬세라토 산의 영향을 받았다. 몬세라토 산은 ‘톱니꼴의 산’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1,500여 개의 봉우리가 기기묘묘한 형태로 솟아 있는 몹시 험난한 산이다. 몬세라토의 육감적인 암석 기둥은 나중에 성가족 대성당에서 부활했고 암벽은 카사 밀라의 외벽과 지붕으로 변주되었다.

평소 이상적인 정원 도시를 꿈꿨던 구엘은 가우디에게 바르셀로나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페라다 산기슭에 모든 상상력이 동원된 정원 도시를 건설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구엘 공원’(1900~1914)인데 공원은 구엘이 만년에 품고 있는 꿈을 실현해주기 위한 가우디의 마지막 도전이었다.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대성당은 가우디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건축물이다. 가우디가 성가족 대성당의 공사 총감독에 임명된 것은 31살이던 1883년이었다. 성당은 기계화와 근대화로 점차 타락해가는 도시 생활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의 집’뿐이라는 한 출판업자의 구상에서 1866년 처음 계획되었다. 이후 성당건축위원회가 발족하고 성당 건축비를 모금한 후 시작한 대성당의 공사 총감독은 가우디에게 건축 실무를 가르쳐 준 프란시스코 비야르가 맡았다. 비야르는 1882년 3월 성당을 짓기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 납골당의 대들보에 어떤 재료를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성당건축위원회 측과 마찰을 빚어 공사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가우디는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당을 머릿속에 그린 뒤 비야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을 완전히 폐기하고 새롭게 시작했다. 이후 가우디의 일생은 죽는 날까지 성당 공사에 바쳐졌다. 설계를 다시 하고 공사비를 모금하고 기술자를 모으고 건축비를 적게 쓰려는 성당 관계자와 싸우며 공사를 진행했다. 교구의 만성적인 적자가 공사를 종종 중단시키기도 했으나 한순간도 자신의 꿈을 내려놓지 않았다. 공사의 더딘 진행은 오히려 가우디에게 종교적인 상징을 완벽하게 설계에 반영하고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가우디의 건물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만 7점

구엘 공원 공사를 일단락한 1914년부터는 작업실을 아예 성당의 현장 사무실로 옮겨 인부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평생의 역작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가우디 모습은 건축가이면서 수도자였다. 매일 거의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러던 중 1926년 6월 7일 저녁, 가우디는 산책을 위해 성당을 나왔다가 전차에 치였다. 초라한 행색 때문에 한동안 아무도 그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가우디인 것을 알았지만 가우디는 결국 6월 10일 74세를 일기로 눈을 감고 말았다. 시신은 온 바르셀로나가 슬퍼하는 가운데 성자들만 묻히는 성가족 대성당의 지하에 안치되었다.

가우디는 평생을 건축에만 전념했을 뿐 논문을 쓰거나 강의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가 남긴 출판물은 1881년 2월 한 잡지에 실린 단 한 편의 논문뿐이다. 그가 남긴 유언도 “내 이름을 권리로 삼지 말라”는 한 줄뿐이다.

성가족 대성당은 현재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고 언제 완공될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옥수수 모양의 첨탑, 직선을 배제하고 곡선만 사용한 독특한 조형미에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높이가 100m가 넘다 보니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며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현재 가우디의 건축물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만 모두 7점이다. 1984년 카사 밀라, 구엘 저택, 구엘 공원이 처음 등재되고, 2005년 성가족 대성당 ‘탄생의 파사드’와 지하 예배당, 카사 비센스, 콜로니아 구엘 지하 예배당, 카사 바트요 등 4점이 추가로 등재되었다. 개인으로서는 최다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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