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의화단 폭동과 열강의 약탈

제국주의 열강, 개신교·천주교의 성행, 부패한 청조와 잇따른 천재지변이 분노 폭발시켜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을 향해 침탈의 발톱을 곧추세우고 있던 19세기 말, 중국 산동 지방의 빈농과 유랑민들이 그동안 쌓인 불만을 열강과 조정을 향해 폭발시켰다. 이들은 비밀 종교결사인 백련교 계통의 무리들로 ‘권회’, ‘홍권회’, ‘의화권회’로 불리다가 ‘의화단’으로 명칭이 통일되었다. 통일적인 지도부가 없고 명확한 강령이 없어 대규모 세를 형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나 종교적 미신의 색채가 짙어 폭발력은 그 어느 집단보다도 강했다.

그들은 권법을 익히고 부적과 주술을 사용하면 물과 불에도 다치지 않고 총칼도 피할 수 있는 신통력이 생긴다고 믿었다. 영어로 의화단을 ‘복서(Boxer)’라고 지칭한 것은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의화단의 무술과 체조를 보고 “권투선수 같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

의화단의 첫 봉기 지역이 산동 지방인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산동성 내 교주만과 위해위가 독일과 영국에 각각 점령된 상태이고 열강의 군항·철도·광산 개발로 열강에 대한 반감이 다른 어느 곳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서양 상품의 대량 유입으로 농촌 경제가 파괴되고 농민들의 생존이 위협을 받은 것도 영향을 미쳤으며 일찍부터 산동에서 활동하는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저항감도 작용했다. 여기에 서양의 교회 세력을 등에 업고 저지르는 중국인 기독교 신자들의 온갖 악행도 분노를 촉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재해와 기근까지 겹쳤다.

의화단이 처음 내세운 기치는 ‘반청멸양(反淸滅洋)’이었다. 그러나 산동성 정부가 일시적으로 의화단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부터는 ‘청을 붙들어 일으키고 서양을 멸한다’는 의미의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기치를 바꿔 달았다. 의화단은 철교, 철도, 전선 등 서양과 관계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교회당은 불태우고 외국 선교사와 기독교 신자는 배척하고 외국 상품은 적대시했다.

의화단이 이처럼 폭도화하자 제국주의 열강이 의화단을 단속하도록 청 정부를 압박했다. 청 정부의 실세인 서태후는 원세개를 산동성 순무(지방관)로 임명해 의화단의 활동을 금지했다. 원세개의 무력 진압 후 의화단의 기가 잠시 꺾이는 듯했으나 이미 타오른 불길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의화단은 1900년이 되자 북경과 천진을 감싸고 있는 산동 북쪽의 직례성(현재의 하북성)으로 활동 중심을 옮겼다. 1900년 4~5월에는 북경 남쪽의 천진으로까지 대거 이동해 천진에서 북경으로 통하는 철도를 파괴하고 기차역을 불살랐다. 장강 이북의 다른 성에서도 외국 교회에 방화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러자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 등 열강이 자국의 선교사와 가족, 공사관 요원들의 보호를 위해 5월 31일 500여 명의 연합군을 급히 북경으로 파병했다. 6월 10일에도 2,100여 명을 천진을 거쳐 북경으로 파병했으나 의화단이 이미 철도를 파괴한 터라 북경에 입성하지 못하고 천진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북경에서는 6월 11일 일본공사관의 서기관이 살해되었다.

연합군은 대규모 군대의 상륙을 기도했다. 연합함대는 6월 17일 바다에서 천진의 대고항 포대를 포격한 뒤 며칠 만에 천진에 입성했다. 천진의 의화단원은 맨몸으로 서양식 총포 앞에 섰다가 결국 천진을 포기하고 북경으로 후퇴했다. 의화단은 6월 20일 북경성으로 쳐들어갔다. 성안의 빈민들도 자발적으로 의화단에 가담한 가운데 북경 거리는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의화단은 북경의 외국인에게 무자비한 테러를 가했다. 독일공사도 살해했다. 공사관이 집결한 동교민항을 포위하고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서태후는 이런 의화단을 과신한 나머지 의화단의 힘을 빌어 서양 세력을 쫓아낼 생각으6월 21일 각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의화단으로 하여금 북경 내 외국 공사관을 공격하게 했다. 점차 성안의 집집마다 의화단을 믿는다는 표시로 붉은 종이가 나붙었고 정부군도 의화단이 자금성을 약탈하는 데 동참했다. 그러나 의화단에도 약점은 있었다. 여전히 통일된 조직을 갖추지 못했고 집중된 핵심 지도부도 없었다. 청 왕조를 무너뜨린 후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의지는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의화단의 기세가 높아질수록 대오는 더욱 넓어지고 구성원의 성분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조직의 결속력도 더욱 느슨해졌다.

 

그나마 명맥 유지해오던 청조의 숨통 빨리 끊어버려

열강은 사태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북경 진입을 결정했다. 8개국 연합군은 2만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일본군이 가장 많은 8,000명이었고, 러시아는 4,800명, 영국은 3,000명, 미국은 2,500명, 프랑스는 800명, 오스트리아·이탈리아는 수십 명이었다. 독일군은 소수만 동참했다. 청 정부는 연합군의 북경 입성을 막기 위해 연합군이 북상하는 길목에 10만 명을 배치했으나 청 군대는 연합군과 싸울 의지를 보이기는커녕 도망가기에 바빴다.

결국 의화단은 점령 55일 만인 1900년 8월 14일 북경을 연합군에 내줘야 했다. 이로써 북경은 태평천국의 난 때인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점령된 후 40년 만에 다시 열강에 점령되었다. 서태후는 북경이 함락되기 전인 7월 21일 광서제와 대신들을 데리고 북경을 빠져나가 서안으로 도피했다.

8개국 연합군이 북경 안 도처에서 방화와 약탈을 저지르고 의화단원을 학살해 거리에는 시체가 널브러졌다. 북경은 연합국의 약탈로 황폐화되고 주인 없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북경을 점령한 열강의 최대 관심사는 중국의 분할 여부였다. 다만 러시아·영국이 중국의 분할에 관심이 있었던 것과 달리 독일·일본·프랑스·미국은 자칫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고 중국 백성의 저항이 우려되어 분할에 반대했다. 결국 열강은 중국의 분할을 포기했다.

사후 처리는 1901년 9월 7일 청나라와 연합국이 12개조의 ‘신축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조약에는 연합국 8개국과 벨기에·스페인·네덜란드 3국이 서명했다. 청나라가 40년간 분할 지급해야 할 보상금액은 은화 4억 5000만 냥이나 되었다. 이자를 합친 9억 8,000만 냥은 청 정부의 20년 재정 수입 총액과 맞먹는 엄청난 액수였다. 러시아는 신축조약 체결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북 3성을 전면적으로 침공하고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조약에 따라 북경의 동교민항 일대를 외국 공사관 지역으로 획정하고 각국이 자국의 군대로 공사관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공사관 지역은 나라 안의 나라가 되었다. 결국 중국은 독립국가를 유지했으나 사실상 식물 정부나 다름없었다.

막대한 배상금 지불은 청나라의 국가재정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고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렸다. 결과적으로 의화단 사건은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일어난 반제운동이었으나 그 실패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오던 청조의 숨통을 빨리 끊어버리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반식민지화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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