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제임스 게일, 연동교회 초대 담임목사 부임

절망에 빠진 한국인에게 희망 심어줘

제임스 게일(1863~1937)은 1888년부터 40년 동안 선교사와 목사로 기독교 복음을 조선에 파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세계에 알린 문화 전령사였다. 한영자전 편찬과 성경 번역으로도 조선의 어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

게일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엘마에서 태어났다. 토론토대에 다니던 188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마운트 허먼에서 열린 대학생 모임에서 한 YMCA 지도자의 설교를 듣고 조선행을 결심했다. 1888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 국내 사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1889년 3월 황해도 해주에서 평생의 친구요 조사(助事)가 될 이창직을 만났다. 이창직은 게일의 한국말 선생이 되어 이후 작업할 한영자전 편찬과 성서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게일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호러스 언더우드의 한영사전 편찬을 돕고, 대영성서공회(현재 대한성서공회) 전임 번역위원으로 신약성서의 사도행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서, 요한1서를 번역했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신의 명칭을 ‘천주’로 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게일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하나님’으로 정해졌다. 오늘날 기독교 사학자들은 ‘하나님’ 칭호를 게일의 가장 큰 공헌으로 꼽는다.

게일은 1892년 4월, 2년 전 조선에서 병사한 미국의 선교사이자 의사인 존 헤론의 미망인 해리엇 깁슨과 결혼하고 1897년 5월 미국으로 건너가 북장로교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98년 4월 돌아와 함남 원산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젊은 날 노름판을 전전하던 고찬익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게일은 1900년 5월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연못골(연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연동교회는 1894년 설립된 후 새뮤얼 무어(모삼열), 그레이엄 리(이길함) 등 5명의 선교사들이 목회를 맡고 있었다. 게일은 양반들이 모인 교회에 천민도 발을 들여놓게 함으로써 출신과 신분의 장벽이 없는 교회를 꿈꿨다. 상민 출신 고찬익과 천민 출신 이명혁을 연동교회의 초대(1904)와 2대(1909) 장로로 삼은 것은 한국 교회에서 처음 시도한 신분 혁명이었다. 뒤이어 광대 출신 임공진을 장로로 임명하려 하자 그동안 참아온 양반 교인들이 반기를 들었다. 양반 교인들이 1910년 연동교회를 떠나 묘동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심하게 반발했지만 게일은 임공진을 1915년 장로로 임명했다.

1904년 3월에는 독립협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른 양반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과 조선의 관리로 활동한 이상재·이원긍·유성준·안국선·김린 등이 연동교회에 입교했는데 이것은 관료들이 기독교를 믿은 시원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사적 의미가 크다. 게일은 1903년 YMCA 창립위원 겸 회장으로 선임되어 YMCA가 이 땅에 뿌리내리는 데도 기여했다.

1908년 아내, 부모, 고찬익이 모두 숨지는 뼈아픈 시련을 겪었으나 1910년 영국 출신의 여성과 재혼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1927년 5월 연동교회 시무를 마친 뒤에도 1년간 조선에 머물며 미국 북장로교 선교와 모금 활동을 한 후 1928년 영국으로 건너가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생을 마쳤다.

 

한국인의 시선에서 한국학 개척

게일은 이처럼 목회자로 기독교를 조선에 전파하는 데 열심이었으나 사실 그가 조선에 끼친 진짜 공적은 한영자전을 편찬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외국에 소개한 데 있다. 그는 먼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우리말로 번역해 1895년 출간했는데 한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서양 서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캐나다 온타리오 공립학교 교과서를 이창직과 함께 한국어로 번역한 ‘유몽천자’(1901~1910)도 발간해 경신학교 교과서로 사용하게 했다. 또한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을 돕기 위해 한국어 문법책인 ‘사과지남’도 1894년 펴냈다.

1897년에는 이창직 등 몇몇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한영자전’을 일본에서 출간했다. 3만 5,000여 단어를 수록하고 1,260쪽으로 구성한 한영자전 뒷부분에는 중영사전(옥편)을 덧붙여 한자와 영어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도 하게 했다. 한영자전은 세계 지명, 신문화와 신문명, 기독교 관련 어휘가 많아 오늘날 19세기의 언어 현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영자전은 1911년과 1931년 두 차례 개정증보판으로 나왔다. 5만 단어를 수록하고 1,150여 쪽으로 선보인 1911년판은 요코하마의 후쿠인출판사에서 발간되었고, 8만 2,000 단어를 수록하고 1,780여 쪽으로 두꺼워진 1931년판은 ‘한영대자전’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조선야소교서회가 출간했다. 다만 1931년판은 게일이 3년 동안 수정증보판을 준비하다가 1928년 한국을 떠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출간되었다.

게일은 한국학 분야에서도 다양한 책을 발간했다. 조선의 풍물을 기록한 영문 저서 ‘한국 개관’(1898)과 일종의 구비문학 작품집인 ‘한국 민담집’(1913)을 미국에서 출간했다. 1904년에는 고찬익을 모델로 한 논픽션 영문 소설 ‘선봉자’를 미국에서 출판했으며 선교사들의 잡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지에 1924년 7월호부터 1927년 9월호까지 총 38회 연재한 것을 묶어 1927년 ‘조선 민족사’를 영문으로 발간했다.

또한 조선 시대 야담집 ‘천예록’(1913)과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이 지은 고대소설 ‘구운몽’(1922)을 영역해 영국에서 발간했다. ‘구운몽’은 한국 문헌 중 전체가 외국어로 번역된 첫 작품으로 영역이 고풍스러워 지금도 해외 한국학 학자들 사이에 교과서처럼 읽히고 있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신구약 전서도 윤치호가 설립한 창문사에서 1925년 출간했다.

그는 암흑 같았던 조선의 미래를 낙관해 절망에 빠진 한국인에게 희망을 심어주기도 했다. 1928년 ‘조선사상통신’에 게재된 그의 글 ‘구미인이 본 조선의 장래’에는 조선에 대한 그의 높은 평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글에서 “조선은 실로 동양의 희랍(그리스)이라고 말하고픈 나라로 일찍이 고대 유사 이래 온갖 문화를 창조했으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바가 있어…”라고 칭송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