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지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친 장준하의 마음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왔다”
문익환(1918~1994) 목사가 유원호, 정경모와 함께 일본 도쿄와 중국 북경을 거쳐 북한의 평양 땅을 밟은 것은 1989년 3월 25일 저녁이었다. 문익환을 태운 조선민항기가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안착하는 순간 해방 후 줄곧 철옹성처럼 높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던 분단의 벽은 한순간에 무력화되었다. 문익환은 도착 일성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친 장준하의 마음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러 왔다”고 성명을 낭독했다.
노구의 문익환을 북한으로 향하게 한 것은 통일 문제가 더 이상 정권 안보용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었다. 그는 남북을 잇는 창구 단일화의 금기를 깨기 위해 방북을 단행했다. 김일성을 만나 통일방안을 모색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9개항의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등 거침없이 이어지는 그의 방북 활동은 냉전의 분단 상황 하에서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몰고 왔다. 방북 일정 하나하나가 모두 분단구조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호불호를 떠나 국민의 첫 반응은 당혹감과 놀라움이었다. 뒤이어 격렬한 논란이 이어졌다. 예상대로 극과 극이었다. 보수 쪽에서는 ‘환상적 통일주의자’, ‘돈키호테’라고 폄훼했고, 진보진영 일부에서도 “공안정국을 불러 전체 민중운동의 이익을 훼손하게 된다”며 ‘소영웅주의적 돌출행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진보진영 대부분은 ‘통일을 위한 선각자적 결단’으로 치켜세웠다.
문익환은 4월 3일 평양을 떠나 북경과 도쿄를 거쳐 4월 13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속 영장이었다. 1976년 명동성당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시작해 유신헌법 비판 성명(1978), YWCA 위장결혼 사건(1980), 5·3 인천사태와 서울대 강연(1986)에 이은 5번째 구속이었다. 법원은 그의 방북을 ‘감상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행동’으로 규정,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문익환은 수감생활 19개월 만인 1990년 10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1991년 6월 이른바 ‘분신정국’에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가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되었다. 6번째 투옥이었다. 생전에 그의 자택 거실 벽에 붙어 있는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감옥에 가라’는 글귀처럼 문익환은 이렇게 12년 동안 차가운 감옥을 드나들었다.
평탄했던 삶 장준하의 의문사 후 소용돌이 쳐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당시 명동은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애국지사들이 국내에서 만주와 연해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었다. 그곳에서 어울려 놀던 친구가 윤동주, 송몽규였다. 1919년 3·1 운동이 터졌을 때 그의 고향 명동촌에서도 ‘조선 독립만세’의 봉화가 타올랐다. 아버지는 구속되고 어머니는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 생후 9개월된 문익환은 어머니 등에 업혀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문익환은 캐나다 선교부가 간도의 용정에 세운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1936년 평양 숭실학교로 전학했다. 하지만 5학년 때인 1932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학교를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용정의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도쿄의 일본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일제가 학도병을 강요하자 “일본을 위해 피를 흘릴 생각은 없다”며 1943년 만주의 봉천신학교로 옮겼다.
만주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해방을 맞은 그는 가족과 함께 걸어서 1946년 8월 서울에 도착했다. 1947년 한신대를 졸업하고 1949년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유엔군의 통역관으로 정전회담에서 활동했다. 종전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프린스턴신학교를 마치고 1955년 봄 귀국했다. 이후 한빛교회 목회자 겸 한신대 교수로 활동하던 그가 매진한 것은 성서 번역이었다.
1968년 신·구교 합동 공동성서 번역에 참여하고 1976년 대한성서공회 성서번역위원장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이때 번역한 성경이 ‘공동번역 성서’로, 천주교에서는 2005년 ‘성경’을 내기까지 사용했다. 신구약 66권과 외경(가톨릭에서는 제2의 정경) 9권을 망라한 공동번역 성서는 1977년 4월 출간되었다.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이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하느님’(구교)과 ‘하나님’(신교)으로 각기 달리 불리던 신의 명칭이 ‘하느님’으로 통일되었다. 그동안 일어와 중국어 성경을 중역한 데서 빚어진 혼란도 거의 해소되었다. 고유명사는 원음에 충실하게 통일하고 그동안 높임말로 표현되던 예수의 말씀은 모두 예사말로 바꾸었다.
8년간의 성경 번역은 문익환을 시인으로 만들었다. 시인은 죽마고우 윤동주와 함께 어린시절부터 꿈꿔온 소망이었다. 문익환은 1973년 6월 시집 ‘새삼스런 하루’를 펴냈다.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꿈을 비는 마음’, ‘두 하늘 한 하늘’,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등의 시집을 남겼다.
숨막히는 유신체제에 뒤늦게 도전장 내
고상하고 평탄하던 삶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의 의문사 후 소용돌이쳤다. 50대 후반의 ‘늦깎이’는 스스로 아호를 ‘늦봄’이라고 짓고 숨막히는 유신체제에 뒤늦게 도전장을 냈다.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되었을 때도 “구국선언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장준하의 혼이 시킨 것”이라며 의연하게 행동했다. 이후 그는 ‘재야의 대부’로 불리며 1980년대를 뜨겁게 저항하다가 1994년 1월 18일 76년간의 고단하지만 희열에 가득찬 생을 마감했다.
문익환의 죽음에 북한과의 갈등과 북한의 악의적 비방이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나서였다. 당시 문익환 밑에서 통일운동을 하던 하태경이 2011년 자신의 책 ‘민주주의에는 국경이 없다’에서 문익환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을 해체하려다가 ‘안기부 프락치’로 몰려 화병으로 숨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익환은 한동안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93년 “범민련으로는 북한과 대등할 수 없다. 북한과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민족회의를 만들어야 한다”며 범민련이라는 조직을 벗어나 새로운 합법적 통일운동체인 ‘통일맞이 7천만 겨레모임’을 구상했다. 그리고 1993년 12월 김일성에게 “범민련을 해체하고 통일 운동을 위해 더 크게 태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인 백인준이 답신을 보내 “범민련의 해체나 위상 약화를 통한 새로운 통일운동체의 결성을 반대한다”며 문익환을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는 안기부 프락치로 몰아갔다. 이런 사실이 지하조직에 퍼지면서 종북(從北) 세력의 문익환 때리기와 비난이 본격화했다.
사망 당일(1994년 1월 18일) 문익환은 서울의 한 식당에서 재야인사들과 점심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통일운동의 향후 노선을 놓고 재야인사들과 심하게 다퉜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내가 안기부 프락치냐”라고 고함을 치다가 밥알이 기도를 막아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환자가 많아 입원을 못하고 차 안에서 잠깐 회복한 뒤 집으로 들어갔다가 그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