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고려 묘청의 난

나라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 민심이 흉흉하고 나라 밖으로는 강성한 여진족이 금(金)을 세워 고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던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이 왕에게 접근,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은 왕기(王氣)가 다했으니 도읍을 서경(평양)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솔깃한 인종이 서경에 대화궁을 짓게하는 등 천도(遷都)를 모색하자 반대세력이 “묘청은 서경 사람”이라는 등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설상가상으로 대화궁에 벼락이 떨어지는 등 불길한 조짐까지 보이자 불안해진 인종은 천도계획을 중단시켰다. 초조해진 묘청은 1135년 1월4일, 나라 이름은 ‘대위국(大爲國)’, 연호는 ‘천개(天開)’로 정하고는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이 서경에 당도하자 반란군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묘청은 부하인 조광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광은 1년여를 버티다가 식량부족과 사기저하로 정부군에 성을 빼앗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136년 2월19일이었다.

단채 신채호는 “묘청이 승리했다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며 이 사건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 第一大事件)’으로 평가했다. 묘청의 난을 ‘진취 대 보수’의 싸움으로 볼 것인지 ‘개경파 대 서경파’ 즉 지방세력 간의 알력으로 볼 것인지는 관점과 해석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김부식이 패했다면 삼국사기를 정사로 하는 오늘날의 역사교과서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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