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집트 수에즈운하 개통

↑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식을 그린 작자 미상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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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운하는 이집트 영토인 지중해 포트사이드 항구와 홍해 수에즈 항구를 연결함으로써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해로(海路)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에 운하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기원 전 고대부터 있었다. 첫 삽을 뜬 것은 이집트 파라오 네코 2세(재위 기원전 610-595)의 치세 때였다. 다만 오늘날과 같이 지중해와 홍해 사이에 통로를 뚫는 식이 아니고, 이집트의 물자가 집결하는 나일강의 삼각주를 지나는 강 지류에서 홍해로 통하는 수로였다. 하지만 공사 중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로가 뚫린 것은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열었던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기원전 486) 때였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 1세가 완성한 운하는 폭이 넓어서 삼단노선 2대가 노를 펼친 상태에서 쌍방 통행이 가능했고 횡단하는 데 나흘이 걸렸다”고 묘사했다. 수에즈운하 근처에서 발견된 비석 파편에는 “왕 다리우스가 말한다. 나는 페르시아에서 출발해 이집트를 정복했다. 나는 이집트의 나일강에서 페르시아의 바다까지 운하를 파라고 명령했다. 내가 명한 대로 운하를 팠더니 배들이 이집트에서 운하를 거쳐 페르시아로 갔다.”고 적혀 있다. 이후 수로는 다시 막히고 뚫렸다를 반복하다가 서기 8세기에 이슬람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만수르가 운하를 완전히 메우면서 스에즈운하의 시대는 긴 동면에 들어갔다.

운하를 재개통하려는 움직임이 유럽인들 사이에 꿈틀거린 것은 유럽의 대양 진출이 본격화한 대항해 시대였다. 15세기 말 베네치아 공화국이 관심을 보였으나 비용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 못하고 17세기에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운하를 파려다가 토목 기술상의 문제로 단념했다. 18세기 말에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 고대 운하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측량을 실시했으나 홍해와 지중해의 수위 차가 25㎝에 불과한데도 10m로 너무 높게 측정하는 바람에 공사를 포기했다. 19세기 들어 지중해와 홍해 간 수위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게 밝혀지자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운하 공사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상 최초로 동·서를 잇는다는 자부심도 컸지만, 운하가 개통되면 그의 조국 프랑스가 막강 해운 대국인 영국이 대서양에서 누리는 절대 우위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운하 공사를 서둘렀다.

레셉스는 1854년 이집트 왕 사이드 파샤와 운하 회사(수에즈 운하 만국회사) 주식을 나누고 운하 개통 후 순이익의 15%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운하 건설 허가권과 99년간의 독점 조차권을 보장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회사가 발행한 주식 40만 주 가운데 17만7642주는 사이드, 20만7000주는 프랑스인 투자자들, 나머지는 명목상 이집트의 상위 군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차지했다. 지중해의 항구도시 포트사이드에서 시작해 팀사호와 그레이트 비터호를 관통한 뒤 홍해의 수에즈만에 이르는 총연장 163㎞(현재는 193㎞)가 레셉스 회사가 뚫어야 할 공사 구간이었다.

1859년 4월 착공한 공사는 난관의 연속이었다. 공사에 동원된 인력 중 12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콜레라 창궐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당초 계획했던 기간의 2배인 11년의 공사 끝에 1869년에 가서야 지중해 측 포트사이드와 홍해 측 수에즈 사이 162.5㎞가 수로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유사 이래 대서양과 인도양, 동양과 서양을 가로막았던 단절의 벽도 무너졌다. 운하 개통 후 영국 런던에서 인도 뭄바이에 이르는 뱃길은 1만 9,800㎞에서 1만 1,600㎞로, 8,000㎞ 이상 단축되었다. 1869년 11월 17일 개통 당시에는 하상 부분의 폭이 22미터, 수면 부분의 폭이 60~90미터, 깊이 6미터에 불과했고. 운하 통과 시간은 49시간 걸렸다.

프랑스의 운하 성공으로 가장 심기가 불편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이집트 왕 이스마일 파샤가 엄청난 공사비로 파산 직전에 몰린 것을 알고는 1875년 그에게 접근해 전체 주식의 44%를 사들여 운하 소유권의 일부를 손에 쥐었다. 이후 1882년 이집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는 운하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운하 양안에 주둔시켜 이집트를 사실상 식민지화했다. 그러자 영국이 자유로운 항행을 방해할 것을 우려한 서양 열강들이 영국과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1888년 튀르키예 콘스탄티노플에서 영국·프랑스·독일 등이 모여 체결한 ‘콘스탄티노플 조약’은 그 결과물이었다. 군함을 포함한 모든 국가의 선박이 수에즈운하를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고, 운하에서의 적대 행위나 요새 건설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레셉스는 수에즈 운하 개통의 공로를 인정받아 1873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188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한림원)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말년은 좋지 않았다. 파나마 운하 건설에 나섰다가 경영 부실로 파산해 잔뜩 빚을 졌고, 이로 인해 정신착란을 얻어 고생하다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지배는 1952년에서야 종식되었다. 1952년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나세르가 1956년 대통령이 된 후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제2차 중동 전쟁(수에즈 전쟁)을 일으켰으나 유엔의 개입으로 군대를 철수하면서 결국 수에즈운하는 완전히 이집트 소유가 되었다. 수에즈운하가 다시 막힌 것은 1967년이었다. 1967년 6월 5일,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집트가 15척의 화물선으로 수에즈 운하를 막아버린 것이다. 운하 폐쇄는 7년이나 계속된 끝에 1973년에서야 풀렸다.

이집트는 2007년 중미의 파나마가 제2운하 공사에 나선 것을 보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2014년 8월 제2수에즈 운하를 착공해 2015년 8월 6일 개통했다. 핵심 도시 이스마일리아를 중심으로 한 72㎞ 구간에 기존의 수에즈 운하와 평행하게 건설했다. 그 결과 수에즈 제1·2 운하 전체 폭은 기존 160~200m에서 317m로 넓어지고, 깊이도 14.5m에서 24m로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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