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과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개전

↑ 수에즈 전쟁 때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포트사이드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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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7월 26일, 서구 식민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 폭탄선언이 발표되었다.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 이집트 대통령이 알렉산드리아의 한 광장에 운집한 5만여 군중 앞에서 “수에즈운하는 이집트의 희생으로 세워진 것인데도 이제까지 외국의 부당한 지배로 착취를 당해왔다”며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한 것이다.

같은 시각, 30여 명의 이집트 군인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수에즈운하 관리사무소 부근에서 라디오방송으로 중계되고 있는 나세르의 연설을 들으며 무언가를 기다렸다. 연설 도중 나세르가 수에즈운하를 건설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이름을 거명하자 그들은 그것을 신호탄 삼아 수에즈운하 사무소를 급습, 운하를 점령했다.

수에즈운하는 오랫동안 프랑스와 영국이 소유·관리해왔고, 조차권도 12년이나 남아 있어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의 소유였다. 하지만 평소 서구의 자본 수탈을 고깝게 생각해오던 나세르는 운하를 되찾겠다며 수개월 전부터 운하 국유화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나세르의 거사 시기를 앞당기도록 부추기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과 영국이 이집트에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재정 지원하기로 한 당초의 약속을 뒤집고 국유화 선언 1주일 전인 7월 19일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스완 하이댐을 통해 산업 전력을 확보하고 또 관개용수를 이용해 경작지를 25%가량 늘릴 계획을 갖고 있던 나세르는 자신의 계획이 무산된 것에 크게 실망하고 어차피 한번은 치를 진통이라는 마음으로 국유화를 결심했다. 미국과 영국이 자금 지원을 거부한 것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나세르가 집단안보체제인 ‘바그다드조약기구’ 가입을 거부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체코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등 반서방 정책을 취해 자칫 지원금을 무기 구입으로 빼돌릴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의 금자탑”

이유가 무엇이든 아랍 전역으로 방송된 ‘국유화 선언’은, 장기간에 걸친 영국·프랑스의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아랍 민중을 고무했다. 국유화 선언은 1951년 이란의 모사데크 총리가 추진하다 실패한 ‘석유 국유화’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사건이자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의 금자탑으로 평가되었다. 반면 오랫동안 운하의 이권을 양분해온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충격이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우리는 사악한 돼지가 우리의 교통망을 가로막게 할 수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튀니지를 잃고 모로코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알제리 반란을 부추기는 나세르의 붕괴를 원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무력을 행사하기로 뜻을 모은 뒤 이스라엘에 동참 의사를 물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티란해협을 이집트가 봉쇄하고 있어 사실상 이집트와 준전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며 “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기대에 반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단호하게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시리아·요르단과 군사외교 동맹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스라엘은 자칫 포위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이집트에 대한 선제 공격을 결정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3국은 파리에서의 비밀 회동을 통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선제공격하면 프랑스와 영국이 뒤따라 참전하기로 합의했다.

 

영국·프랑스의 중동 지역 지배도 종전과 함께 마침표 찍어

1956년 10월 29일 밤, 이스라엘군이 이집트 영내 시나이반도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중동전 이른바 수에즈 전쟁이 개막되었다. 이튿날, 영국과 프랑스는 사전 각본대로 수에즈운하의 안전운행 확보를 이유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군에게 24시간 내 운하에서 각각 16㎞씩 철수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집트가 거부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24시간의 철수 시한이 채 끝나기도 전인 10월 31일, 수에즈운하 입구에 있는 포트사이드 항구 등 운하 연변의 도시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세르는 50척이 넘는 화물선 밑창에 구멍을 뚫어 운하 입구에 침몰시키는 운하 봉쇄로 제국주의에 맞섰다. 소련은 “무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며 3국의 침공 중단을 요구했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이 그들에게 폭탄을 투하해도 그대로 방치할 것”이라며 분노했다.

11월 2일 유엔이 긴급 특별총회를 열어 미국이 제안한 수에즈운하 정전 결의안을 가결하고 11월 5일 유엔 중동평화군 제1진을 이집트로 파견했다. 미국이 주도한 정전 결의는 냉전 기간 중 미국이 동맹들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사례였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11월 5일과 6일 각각 정전안을 수락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정전안을 거부하며 포트사이드 등을 점령했다. 하지만 두 나라도 결국에는 국제 여론의 압력에 밀려 11월 7일 정전안을 수락했다.

1주일밖에 안되는 전투에서 침략 3국의 희생자는 200명이 채 안 되었지만 이집트에서는 거의 3,000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났다. 12월 22일 영국·프랑스 양군이 철군을 완료함으로써 전쟁은 47일 만에 종결되었다. 100여 년에 걸친 영국·프랑스의 중동 지역 지배 시대도 종전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아랍 세계는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뤄낸 아랍 민족주의의 승리에 열광했고, 나세르는 “서방 세계에 도전한 첫 아랍인”,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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