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25)] 이태영과 정일형… 장차 한국 여성의 대모(代母)와 반일·반독재 투쟁 8선 정치인이 될 두 청춘의 만남과 결혼

↑ 이태영이 서울대 법학박사 학위 수여식에 참석한 남편 정일형과 웃고 있다. (1969.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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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이태영(1914~1998)은 멸시와 냉대 속에 살아온 한국 여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시대의 어머니였다. 한평생 가족법 개정 운동을 벌인 여성운동의 대모였으며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여성 문제에 처음 눈을 뜬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축첩 반대, 가족법 개정, 동성동본 금혼제 폐지 등 이태영이 앞장서 일궈낸 결실은 한국 여성운동사의 중요 궤적으로 기록되었다. 이태영은 ‘한국 최초’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니는 여성 법조인이었다. 첫 여성 사법고시 합격과 첫 여성 변호사, 서울 법대 첫 여성 입학과 첫 여성 법학박사 등의 수식어가 그것이다. 정일형(1904~1982)은 일제 식민지 시절에는 반일 활동으로 감옥을 드나들었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8선 정치인이었다. 부부가 함께 걸어간 지난했던 삶을 알아본다.

가정법률상담소에서 활동할 때 이태영의 모습(1968년)

 

■만남과 결혼

1935년 12월, 정일형(1904~1982)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35년 11월 귀국해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 모색 중이었다. 그 무렵 이태영(1914~1998)은 이화여전 가사과 4학년생이었다. 정일형은 그해 12월 성탄절을 맞아 서울 정동교회에 갔다. 성가대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노래하고 합창이 끝날 무렵 한 여학생이 메조 소프라노 독창을 했다. 여학생은 성가대원 중 키가 가장 크고 얼굴이 시원스러웠다. 정일형은 지인에게 여학생이 누군지 꼬치꼬치 물어본 뒤 사람을 넣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는 평양으로 올라가 1936년 4월 설립할 개척교회 준비작업에 분주했다. 얘기를 전해들은 이태영도 정일형에게 마음이 끌렸다. 학력이 뛰어난데도 굳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개척교회 일에 뛰어든 그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무렵 한창 혼기가 무르익었던 이태영에게 여러 곳에서 중매가 들어왔는데 교회 지인들은 젊고 유능한 정일형이 이태영의 배필로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이태영은 1936년 4월 어느날 대전형무소에서 출소한 안창호가 평양 남산교회에서 하는 애국 강연을 들었다. 이태영이 강연장으로 간 것은 안창호를 뵙기 위한 것도 있지만 강연회를 주도하고 사회를 본 정일형을 유심히 살펴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36년 5월 초, 이태영이 이화여전 동창들과 평양의 한 교회에서 성가대 합창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정일형이 찾아와 “이화 출신들이 큰 교회에서만 노래할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에서도 노래해야 할 것 아니냐”며 자신의 교회로 초청했다. 이태영이 정일형의 교회에 갔을 때 낮에는 예배를 보고, 밤에는 공장 청년들을 모아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1936년 여름 금강산의 외금강 온정리에서 열린 주일학교 선생들의 수양회에도 함께 참석했다. 마지막 날 이태영은 금강산에 다녀오자는 정일형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물상, 구룡연, 삼선암, 해금강 등지를 구경했다. 이태영이 삼선암에 올라섰을 때 정일형이 “삼선암이 아니라 사선암이군”이라며 이태영이 선녀같다는 속마음을 넌지시 드러냈다. 이태영은 그 말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전한 프로포즈라고 생각했다. 이후 두 사람이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던 어느날 이태영이 장염에 걸려 입원했다. 정일형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문병을 가서 쾌유를 빌어 주었다.

그때만 해도 직업이 변변치 않아 이태영의 결혼 상대로 탐탁지 않게 여기던 어머니와 오빠는 정일형의 진심을 알고 결혼을 승낙했다. 두 사람은 1936년 12월 26일. 평양 정의고녀 강당에서 이윤영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22세였고 신랑은 10살이 많은 32세였다. 안창호가 축사를 한 결혼 피로연은 평양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 시절에 결혼식에서 케이크를 자르고 피로연에서 샌드위치를 돌리고, 신랑신부가 문앞에 서서 돌아가는 하객들을 배웅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식 모습

 

■결혼 전 이태영의 삶

이태영1914~1998)은 평북 운산에서 태어났다. 6대 독자 아버지는 탄광을 운영했는데 이태영이 1살 때 탄광사고로 숨졌다. 아버지가 평소 탄광으로 벌어들인 돈을 만주나 북경 등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냈기 때문에 아버지가 남기고 간 돈이 거의 없어 가세가 기울었다. 다행히 12살 연상의 큰오빠가 나중에 운수업으로 돈을 벌어 어린 시절을 큰 불편없이 보냈다. 이태영은 큰오빠가 평소 “태영이는 장차 변호사나 대의사(국회의원)가 될 거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기 때문에 변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서부터 장차 커서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이태영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이태영은 3대가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기도 했지만 감리교에서 세운 숭덕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기독교와 더욱 가까워졌다. 이태영의 향학열을 자극한 것은 “아들이고 딸이고 누구든 공부 잘하는 아이만 끝까지 공부시키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이태영은 숭덕학교를 거쳐 편입한 평양 정의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수석을 차지했다. 졸업 후 학비가 면제되는 도쿄여자고등사범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황달병에 걸려 고향의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후 1년 동안 교사로 근무하다 1932년 학비를 면제받는 특대생으로 뽑혀 이화여전 가사과에 입학했다. 당초 꿈은 법률 공부였으나 당시 이화여전에는 법과가 없었다. 7살 때부터 멋도 모르고 변호사가 되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던 이태영은 이화여전 밖에서 변호사에 대한 갈증을 달랬다. 연세대 정광현 박사의 경제법률 특강을 들으면서 법학도의 꿈을 키웠다. 그래도 해방이 될 때까지 여자인 이태영에게 법학을 공부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태영은 4학년 때인 1935년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주최한 전국여자전문학교 웅변대회에 나가 당당히 1등을 할 정도로 1930년대 여성치곤 적극적이고 당찼다. 1936년 2월 졸업 때는 공부도 잘하고 재주도 많다며 동아일보에 크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정일형과 결혼함으로써 행복과 고난이 교차하는 삶 속으로 빠져들었다.

 

■결혼 전 정일형의 삶

정일형(1904~1982)은 황해도 안악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집안은 유복했으나 정일형이 출생하고 1년 만에 할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고 2년 후 아버지마저 장티푸스로 급서해 경제적으로 어려움 속에서 자랐다. 더구나 어머니가 몇 년 후 재혼하면서 집을 떠나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머니가 재혼한 남성에게는 훗날 비구니 선승으로 유명해질 김일엽이라는 딸이 있었다. 따라서 김일엽은 정일형의 이복 누이인 셈이다.

정일형은 10대 때부터 일제에 저항하며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렸다. 평양 광성고보 3학년이던 1919년 3월에는 3·1 운동에 맞춰 평양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1주일간 구금되었고, 다시 몇 개월 후에는 상해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또다시 1개월간 경찰서에 갇혀 지냈다. 정일형은 1922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을 때도 학생들의 독립 사상을 비난하는 교수를 배척하는 운동에 나섰다가 1년간 정학을 당했다. 그 기간 야학 활동을 하다가 또다시 1개월간 구류를 살았다. 정일형은 1927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감리교 선교부의 한 기관인 종교교육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일을 하면서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감리교에서 시행하는 미국 유학생 시험에 합격, 1929년 3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타이피스트, 별장지기, 기숙사 도서관 조수, 사진사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오하이오 웨슬리언대에서 학사학위, 시러큐스대에서 종교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드류대에서 사회학을 연구해 1935년 6월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그해 11월 귀국했다. 연희전문에서 교수직 제안이 들어왔으나 개인의 안일보다는 약자를 위한 교회 설립이 먼저라고 생각해 1936년 4월 평양 공장지대인 신리의 한 공장 창고에 개척교회를 열었다. 일거리가 없어 헤매는 사람에게는 직장을 구해주고, 문맹자에게는 글을 가르쳤으며 가정문제도 상담해주었다.

정일형

 

■간난(艱難) 속으로

1936년 12월 결혼 후, 달콤했던 신혼 기간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정일형이 1937년 10월 안창호의 특별강연회를 평양에서 개최했다가 유언비어 유포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3개월간 구금되었기 때문이다. 정일형은 1940년에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다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정일형은 한 달도 안되어 피를 쏟으며 쓰러지기를 거듭했다. 이태영은 주사 놓는 법을 배워 그후 집안의 간호사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이태영은 평양고등성경학교(1936~1937)와 정명여자고등학교(1938~1940)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해방 때까지 7년 간은 이태영의 생애에서 가장 괴롭고 고생스럽던 시절이었다. 학교 선생 봉급으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세 아이를 먹여 살리기도 벅찬 데다 수감 중인 남편의 옥바라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태영은 손수 누비이불을 만들어 시장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그런 기간이 5년이나 되었다. 일제는 1944년 봄 정일형의 혐의를 캔다며 이태영을 공갈·협박·회유했다. 결국 이태영은 남편을 고문하고 감방에 가두어 치가 떨리는 그들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야 했다.

1937년 봄, 신혼 시절의 부부 모습. 왼쪽부터 정일형 어머니, 정일형, 이태영

 

■해방 후의 삶

1945년 8월 해방이 되었다. 정일형은 1945년 9월 송진우, 김성수, 조병옥 등과 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10월엔 미 군정청의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맡았다. 1948년 9월엔 대한민국 특사단의 차석대표로 아시아와 미주 등지를 순방하고 10월 파리 UN총회에 참석해 대한민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받는데 힘을 보탰다. 가정적으로는 “이제 고생 보따리를 바꿔 매자”며 이태영에게 “평생 소원하던 법률공부를 하라”고 격려했다. 이태영은 32살이라는 만학의 나이인 1946년 3월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 평생 소원해온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육순 노모를 모시는 며느리로서, 정치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아내로서, 세 자녀를 보살펴야 하는 어머니로서 학업을 병행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충이었다.

 

■변호사 이태영

이태영은 1950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52년 1월 여성 최초로 고등고시 사법과(2회)에 합격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야당집 마누라를 판사로 임명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 아니냐”며 판사 임용을 거부해 법관이 되지 못했다. 그때 법관 임명을 받지 못했던 아픔과 상처는 이태영이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이태영은 결국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의 삶을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1956년 8월 25일 18명의 교수·변호사들이 상담위원으로 참가한 여성법률상담소를 설립, 소장으로 활동했다. 여성법률상담소는 개소 10년만인 1966년 ‘가정법률상담소’로, 또 10년 뒤인 1976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공익법인)’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문적으로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법학석사(1957년)를 받고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 대학원에서 법학을 수학(1957~1958년)했다. 1969년엔 55살의 나이로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렇게 쌓은 지식을 발판 삼아 상담소 일을 하랴 변호사 업무를 하랴 바쁜 와중에도 1963년 8월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을 맡아 1971년까지 8년 동안 교수직을 병행했다. 당시 김옥길 총장은 법정대학 건물을 본관으로 옮겨달라, 법정대학 교수들의 연구실을 고쳐달라, 모의법정을 만들고 법정대학 전용 도서실과 고시 준비실을 마련해달라는 이태영의 온갖 주문을 모두 들어주어 이태영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태영은 또한 여성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여성 지도자 배출을 목표로 커리큘럼에 손을 대고 우리나라 최초로 법학의 임상교육을 실시하여 자신이 운영하는 가정법률상담소를 법률실습소로 결연시켰다.

변호사로는 1958년 9월 미국식 법률사무소 이름에서 따온 ‘이&김’이란 간판을 내걸어 또다시 화제가 되었다. 국내 로펌1호로 설립한 ‘이&김’의 두 주인공은 이태영·김흥한 변호사였는데 김흥한은 이태영의 서울법대 입학 동기이면서 맏사위로 일찍이 판사로 근무하다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국제변호사 국내 1호였다. ‘이&김’은 1961년 장대영 변호사가 합류해 고시 합격순서대로 ‘김·장·리’로 이름을 바꿨다.

이태영은 가정법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62년 청원운동을 시작해 1963년 가정법원이 설립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76년엔 국내 여성 100명의 힘을 모아 서울 여의도에 한국 여성운동의 산실인 여성백인회관을 세웠다. 1975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고 1984년 제1회 국제법률봉사상을 받는 등 국제적인 여성지도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이태영은 1998년 12월 17일 84세로 영면한 후 서울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남편 정일형과 함께 합장되었다. 아들 정대철은 2002년 남녀평등을 실현한다는 의미로 하나의 묘비에 이태영과 정일형 이름을 나란히 새긴 묘비로 바꿨다. 국립묘지에 부부가 각자의 묘비로 합장된 경우는 정일형-이태영 부부가 처음이다.

가족법 개정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태영 변호사

 

■정치인 정일형

정일형은 1950년 5월 서울 중구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 4·19 혁명 후에는 장면 내각의 외무부 장관으로 활동했으나 1961년 5·16 쿠테타 후에는 장관직에서 물러나 박정희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정일형이 반정부 투쟁에 나설 때마다 그 옆에는 언제나 이태영이 있었다. 부부는 1974년 11월 민주회복 국민선언,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3·1절 명동사건) 등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때문에 9대 국회까지 내리 당선되어 8선 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1976년 3월의 명동성당 구국선언사건으로 기소되어 1977년 대법원에서 3년형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정일형은 1982년 4월 눈을 감아 서울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아내와 함께 합장되었다. 정일형은 눈을 감기 이틀 전, 자식들과 친지들을 다 불러놓고 “교회와 국민과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힘써 살아가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이태영은 남편이 숨진 뒤 3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냐”며 웃었지만 사실 이태영이 상복을 벗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굽힘 없는 투쟁을 하다 숨진 남편에 대한 한이 서렸기 때문이다.

정일형은 아내에게 따뜻한 남자였다. 부부의 딸들이 “어머니는 천사와 사람의 중간으로 태어난 분을 어떻게 만났느냐“며 “어머니가 참 운이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태영 눈에 남편이 자신을 감싸고 사랑할 때는 남편으로 보이지만 때로는 자신을 귀히 길러주는 아버지처럼 보이고, 이태영을 가르쳐줄 때는 선생님으로 보이기도 하고, 가정보다는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 고민할 때는 큰어른으로 보였다. 정일형이 늘상 버릇처럼 사용하던 말은 “고맙구먼”이라는 감사의 말이었다. 이태영이 일찍 집에 돌아와도 “고맙구먼”, 무슨 일이 있어 늦게 귀가해도 “고맙구먼”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무엇이 고맙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매사를 고마워했다.

이태영 박사가 자서전 <나의 만남 나의 인생>을 발간한 후 당시 이혜원 서울시장에게 자서전을 보내면서 쓴 친필

 

정일형이 물러난 국회의원 빈자리는 1977년 7월 보궐선거로 중구에서 당선된 아들 정대철이 채웠다. 정대철은 이후 부침을 겪긴 했지만 5선 의원으로 활동했다. 2012년에는 정대철의 아들 정호준까지 서울 중구에서 당선되어 3대가 도합 14선을 기록했다. 그런데 정일형 집안은 인척까지 포함하면 국회의원 선수(選數)가 20선으로 늘어난다. 정대철 아내의 할머니인 독립운동가 박현숙이 2선, 정대철의 손윗 동서인 조순승이 3선을 하고 정일형 어머니의 6촌 여동생의 남편이 부부의 주례를 맡았던 제헌국회의원 이윤영이기 때문이다.

정대철의 처가도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아내(김덕신)의 할아버지 김성업은 안창호 선생의 수제자로 1924년부터 17년간 동아일보 평양지국장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때 4년 1개월 투옥되었다. 정대철 아내의 할머니 박현숙은 1915년 송죽결사대 사건, 1921년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송부 사건, 1941년 대동아전쟁 반전 사건 등으로 3차례에 걸쳐 6년 넘게 투옥되었다. 박현숙은 광복 이후 1946년 과도정부 입법위원, 1952년 제2대 무임소장관, 4대(철원 김화), 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두 사람도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정일형 가족 3대. 왼쪽부터 정호준(손자) 정대철(아들) 정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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