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닉슨 없는 키신저 없고 키신저 없는 닉슨 없다”
헨리 키신저(1923~ )가 미국 외교의 전권을 틀어쥐기 시작한 것은 1968년 12월 2일 닉슨(1913~1994) 대통령 당선자에 의해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고부터였다. 이후 “닉슨 없는 키신저 없고 키신저 없는 닉슨 없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둘은 밀착했다. 심지어 닉슨을 두고 ‘키신저의 또 다른 얼굴’이라거나 닉슨 정부를 가리켜 ‘닉슨·키신저 공동정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키신저는 독일 퓌르트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8년 8월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독일에서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되기 석 달 전이었다.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키신저의 가족과 친구 1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키신저는 뉴욕에서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뉴욕시립대 야간부에 입학해 밤에는 회계학을 공부하고 낮에는 돈을 벌었다. 당시 뉴욕시립대는 명석한 유대인 이민 자녀들의 집합소였다.
1943년 미군에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한 그는 어린 시절 폭력을 피해 도망쳤던 고향 독일에 점령군 자격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국가 간 힘의 충돌을 몸소 체험했다. 이는 훗날 그의 현실주의 외교의 토대가 된다. 키신저는 군에서 만난 16살 연상의 프리츠 크래머 이등병을 통해 자신이 훌륭한 정치적 두뇌의 소유자임을 알게 되자 그때까지 목표였던 공인회계사 대신 학구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설정했다.
키신저는 1946년 제대 후 하버드대에 입학해 철학과 외교를 전공했다. 주요 연구대상은 19세기 유럽 세력 균형의 외교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였다. 1954년 비엔나조약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57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핵무기와 외교정책’이라는 명저를 써 언론과 외교정책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당시 소련 군부도 키신저의 저서를 높이 평가했다. 14주 동안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책의 성공으로 키신저는 외교가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정치의 계단으로 한 걸음 더 접근했다. 1958년에는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1961년엔 케네디 정부에서 외교 보좌관을 맡았으나 케네디 정부에서 뜻을 펼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자 1962년 자의반 타의반 케네디 정부와 인연을 끊었다. 이후 존슨 정부로부터 베트남전을 현지에서 분석 평가하는 임무를 맡아 1965년부터 3년 동안 베트남 현지를 드나들면서 베트남에 정통한 전문가가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인맥과 비밀 외교채널은 장차 닉슨 대통령의 밀사로 미국과 북베트남 간의 직접 회담을 주도하는 발판이 되었다.
닉슨과 달리 탈 이데올로기적 외교 지향해
키신저가 외교에 관한 실무 경험을 넓히는 동안 닉슨은 1960년 케네디와의 대통령 선거 대결에서 패하고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1968년 닉슨이 또다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쟁에 뛰어들었을 때 키신저는 닉슨의 공화당 내 경쟁자인 넬슨 록펠러의 외교정책담당 수석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공화당 내 선거운동 기간 중 키신저는 닉슨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닉슨은 록펠러를 물리치고 공화당의 후보가 되어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키신저가 닉슨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과 달리 닉슨은 수년 전부터 키신저의 저서와 사고에 관심이 많았다. 1960년 케네디와 대통령 선거전을 벌일 때도 키신저에게 외교문제 보좌관으로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닉슨은 1968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또다시 키신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까지도 키신저는 닉슨을 정치적으로는 불순하고 지적으로는 2류 이하의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닉슨의 요청을 받아들여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무렵은 “자유를 지키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미소 냉전기였다. 하지만 키신저는 편견이 없고 과거의 잘못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주의자였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힘과 힘의 조화에 의한 세계질서의 창조’였지 ‘무력에 의한 강제’가 아니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대결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은 이데올로기가 외교에 개입해서도 안된다고 믿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닉슨과 달리 키신저는 탈이데올로기적인 외교를 지향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두 사람 간의 정치적 견해가 날카롭게 대립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닉슨이 점차 키신저에게 설득당하면서 외교에 관한 한 키신저의 독무대가 되었다. 키신저의 외교전략은 첫째도 국익, 둘째도 국익이었다. 평소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는 말을 즐겨 사용한 데서 알 수 있듯 키신저는 역사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는지를 늘 의식하며 행동했다.
잠행 비밀외교는 트레이드 마크
잠행 비밀외교는 키신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969년 8월 파리 근교에서 레둑토 북베트남 측 대표와 비밀협상을 할 때도 비행기를 수 차례 바꿔 타며 파리에 도착하는 잠행을 보였고, 1971년 7월 첫 중국 방문도 미국의 부통령과 국방장관조차 모르게 완벽한 비밀로 성사시켰다. 중국 방문 후 파리로 날아가서도 공개적으로 CBS 방송 프로듀서와 데이트를 즐기는 것처럼 해 보도진을 방심하게 해놓고는 파리에 와 있던 북베트남 대표와 비밀리에 만나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문제들을 타결지었다.
1972년 4월의 모스크바 방문도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했다.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 백악관은 키신저가 대통령의 별장에서 닉슨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있다고 발표해 키신저의 모스크바 방문을 감쪽같이 숨겼다. 닉슨이 별장을 떠날 때 키신저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는 모습을 공개함으로써 키신저는 지난 5일 동안 국내에 있었던 사람이 되었다. 이런 잠행외교를 통해 중국과는 1971년 7월 핑퐁외교를 성사시켰고 소련과는 1972년 5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체결하도록 해 미·소 간 데탕트를 완수했으며 1973년 1월 27일엔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해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키신저는 1973년 8월 국무장관이 되고 1974년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후임 대통령 포드와 호흡을 맞추며 계속 국무장관직을 유지하다 1977년 1월 포드가 물러날 때 함께 물러났다. 키신저가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이룬 많은 외교 정책 중 또 하나 중요한 업적은 추락하던 달러의 위상을 회복시킨 ‘페트로 달러 체제’ 구축이었다. 달러 약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1년이었다. 국가 부도 사태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비상 국면의 상황이 되자 1971년 8월 15일 닉슨 미 대통령이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는 금태환 정지 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닉슨 쇼크’였다. 미국이 하루아침에 금과 달러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그간 금 교환권이라고 믿어온 달러를 종잇조각으로 전락시켰다. 국제 외환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엇보다 달러가 기축통화의 위상을 상실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일 쇼크가 덮쳤다.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주로 아랍국가들로 구성된 OPEC(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들을 제재하기 위해 석유 무기화를 천명하며 원유 가격을 올렸다. 3개월 사이에 석유 가격이 배럴당 3.01달러에서 11.65달러로 387%나 급등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스라엘 지지 국가에 대한 석유 금수도 결정했다.
그러자 키신저는 1973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을 만나 달러의 명운을 좌우할 거래를 은밀히 진행했다. 미국이 사우디 안보와 왕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OPEC은 원유를 오로지 달러로만 판매하는 협상이었다. 이 협상을 위해 키신저가 사전에 검토한 또 다른 옵션이 사우디아라비아 침공이었다. 명분은 사우디 내 미국 자본 보호였다. 미국은 금수 조치 해제를 위해 사우디와 협상을 진행하는 동시에 군사 전략도 준비한 것이다. 키신저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보여주며 사우디 왕실을 압박해 1974년 6월 ‘군사 경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는 사우디 산업과 군대 현대화 지원 등이 있지만 핵심 내용은 페트로 달러 체제 구축이었다. 키신저는 미모의 여성들과 자주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워싱턴이나 해외 여행길에서 종종 미모의 아가씨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사실은 비밀행적을 감추기 위한 연막작전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그의 주변엔 늘 007 영화 주인공, 탤런트, 모델 등 다양한 여성들이 줄을 지었다.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미소 데탕트와 미·중 관계 정상화를 실현한 ‘20세기 최고의 외교전략가’, ‘살아 있는 외교 교과서’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쯤은 쉽게 짓밟아버리는 책략가라는 평가도 있다. 베트남전 평화협상을 고의로 지연시켜 많은 양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려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수립을 돕는 등 국제적으로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