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일제 하에서 9차례(7년 3개월간)나 옥고 치르며 독립의 횃불을 밝혔던 참 언론인이면서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을 도모했던 현실 정치 지도자
2023년 5월 23일 · zznz

↑ 세칭 ‘군관학교 학생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 종로경찰서가 촬영한 사진(1936년 6월 23일)
by 김지지
안재홍은 일제하 민족 지사이자 역사학자였으며 언론인이었다. 해방 후에는 이상이 아닌 현실에 발을 딛고 좌우합작을 도모한 정치 지도자로 활동했다. 안재홍은 국학(國學)을 깊이 연구했지만 국수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그의 호 ‘민세’가 의미하는 것처럼 ‘민족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민족으로’라는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했다. 그의 동상이 2023년 5월 11일 그가 살던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세워졌다. 신체 일부가 사라진 듯한 동상 모습은 6·25 때 북한으로 납치된 민세가 역사 속에서 조금씩 잊히는 안타까움을 나타낸 것이다.

일제 하에서 서슬 퍼런 논설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해
안재홍(1891~1965)은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공부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읽고 감명받아 “조선의 사마천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그가 추구했던 국학과 역사학 연구의 시작점이 된다.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전신) 중학부를 거쳐 20살 때이던 1911년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유학 시절 조국의 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가 신규식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났으나 경제적 토대가 없는 해외 운동보다는 국내 투쟁에 주력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하고 다시 도쿄로 돌아와 학업을 마쳤다.
1914년 귀국 후 중앙학교 학감,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안재홍은 1919년 6월 독립운동 비밀조직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총무를 맡아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부 임무를 수행하다가 1919년 11월 일제에 체포되었다. 일제하 9차례에 걸친 7년 3개월 옥고의 시작이었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1919년 4월경 상해에 있던 조용주(조소앙의 동생)와 연병호(1·2대 국회의원)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청년 단체를 국내에 만들기로 하면서 출발했다. 6월 초순 국내에 들어온 두 사람은 재력가 이병철과 명망가 안재홍을 총무로 영입했다. 연병호는 조직 정비와 확대 실무를 맡았고, 안재홍은 단체의 목적과 방향을 담은 강령 등을 작성했다. 청년외교단은 임정의 활동상을 알리는 한편 애국부인회 등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이들은 ‘배달청년단’으로 조직 확대를 추진하던 중 11월 말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간부들이 체포됐다. 안재홍은 이 사건으로 1919년 11월부터 30개월간 첫 옥고를 치른 후 1922년 6월 만기 출옥했다.

안재홍은 1924년 5월 최남선이 주도하는 시대일보에 논설기자로 입사해 언론계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24년 9월에는 조선일보 주필로 입사해 본격적으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조선일보의 발행인과 부사장, 사장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서슬 퍼런 논설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안재홍은 사설과 시평을 쓰면서도 1927년 신간회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좌우 합작 독립운동 단체로서 회원 수가 3만~4만명에 이르렀던 신간회에서 민세는 총무간사를 맡았다.
동서고금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의 소유자
안재홍은 조선일보의 대표 논객이었다. 1932년 조선일보를 떠날 때까지 8년 동안 사설 980여 편, 시평 470여 편 등 모두 1,450편에 이르는 방대한 글을 썼다. 문체가 독특해 ‘민세체’로 불렸다. 안재홍이 사설을 쓸 때 초인적인 필력을 보였다는 증언에 따르면 안재홍은 사설 한 편을 15분만에 쓰고 사설을 쓸 때 손님이 찾아오면 대화는 대화대로 나누며 글을 썼다. 그의 글은 “붓만 들면 장강대하(長江大河·긴 강과 큰 강)처럼 쏟아져 나오는 경세(經世·세상을 다스림)의 대문장”이라 불렸다.
동서고금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글은 독자의 가슴을 후련하게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압수와 게재 금지가 끊이지 않았다. 벌금형을 받거나 구속되는 때도 많았다. 대표적인 글이 조선일보 1928년 5월 9일자 사설 ‘제남사변의 벽상관’이다. 그는 사설에서 외국의 사례를 인용해 일본의 중국 산동 출병을 비판했다. ‘제남사변’은 일본이 중국 장개석의 국민군을 견제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 산동성 제남에서 벌인 전투를 말하고 ‘벽상관’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말로 ‘형세를 중립적으로 관망한다’는 뜻이다. 일제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안재홍은 결국 이 사설로 세 번째 구속되어 금고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조선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133일간 신문을 내지 못했다.

안재홍은 1929년 1월 만기 출소해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복귀했다.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1931년 5월 조선일보 사주 신석우가 상해로 망명하자 그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안재홍이 조선일보 사장으로 재임하며 근대 민족문화사에 끼친 가장 큰 공로는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의 중추 역할을 한 것이다.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신채호·문일평·장도빈·최남선 등 당대 최고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을 필진으로 영입, 조선일보를 조선학 운동의 산실로 발전시켰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신채호가 중국 여순의 감옥에 있으면서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다.

일제는 안재홍을 조선일보에서 쫓아낼 구실을 찾는 데 혈안이었다. 결국 일제는 1932년 3월 안재홍이 만주동포 구호 의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씌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안재홍은 그해 4월 옥중에서 사장직을 내놓았고 출옥 후에는 국학 연구와 문화운동에 매진했다. 1936년 5월 군관학교 사건으로 징역 선고를 받아 6번째 옥고를 치르고 1937년 풀려난 후에는 고향에 칩거하며 ‘조선상고사감’, ‘조선통사’를 집필했다. 그러던 중 조선어학회 사건에 또다시 연루되어 1942년 12월 9번째이자 마지막 옥고를 치르고 1943년 3월 출감했다.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을 도모한 정치 지도자
1945년 광복 후에는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면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협동하는 ‘초계급적 협동 전선’이 시급한 과제라고 인식해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부위원장을 맡았다. 일제 하에서 신간회 운동에 앞장섰던 그에게 좌우 협동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연히 요청되는 ‘시대정신’이었다. 하지만 건준이 좌경화하자 20일 만에 탈퇴하고 좌익 노선과 선을 그었다.
건준 탈퇴 후에는 좌우의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며 통합을 주장했다. 곧바로 국민당을 결성해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고, 좌우에 편향되지 않은 화합을 이뤄내 진정한 민족 국가를 세우자는 뜻을 담은 저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1945.12)를 출간했다. 책에서 그는 “기존의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말고 민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정신 아래 초계급적인 통합 민족국가를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그 후 국민당을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통합시켜 중앙상무위원이 되고 1946년 2월 한성일보를 창간했다.
안재홍은 좌우합작으로 정치 세력을 통합하고 이 힘을 기반으로 미 군정으로부터 점차 군정을 이양받아 자주 행정권을 얻어내고자 했기 때문에 미 군정이 추진하는 미소공동위의 현실을 인정했다. 1946년 12월 미 군정의 남조선 과도입법위원에 참여하고 1947년 2월 미 군정하 한국인 최고 책임자인 민정장관직을 받아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안재홍이 속해 있는 한독당이 ‘모스크바 3상회의’를 관철하려는 미 군정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그는 반탁 동지들로부터 ‘독립운동의 방해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 한독당에서 제명되는 수모를 겪었다. 1947년에는 가까스로 암살을 모면한 일도 있었다.

안재홍의 좌우합작 노선은 이승만·한민당 계열, 중경 임시정부 계열과 크게 달랐다. 안재홍은 이 두 계열의 우익과 구별해 자신과 중도우파를 ‘순정(純正) 우익’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그가 기대한 제2차 미소공동위마저 1947년 10월 결렬되자 미·소 협조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이 무망하다고 판단해 유엔 참관 하의 단독정부 수립을 수용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선거가 무난히 치러지도록 민정장관직을 수행하고 6월에 퇴임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6·25 발발 후 자택에서 납북되어 1965년 3월 1일 북한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