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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더 원했던”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이면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세계에 알린 전령사

↑ 호머 헐버트

 

by 김지지

 

부산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미국인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의 훈격을 높여 달라는 청원서를 2023년 5월 17일 국가보훈처장에게 전달하고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헐버트 박사 묘소를 참배했다. 청원서는 헐버트 박사가 받은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의 훈격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나 대통령장(2등급)으로 올려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헐버트의 삶을 알아본다.

2022년 발매된 헐버트 우표

 

한국을 위해 평생을 마친 독립운동가, 교육자, 역사학자, 한글학자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오롯이 한국을 위해 살다가 생을 마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고 역사학자이자 한글학자였다.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대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1884년 다트머스대를 졸업하고 1886년 뉴욕의 유니온신학대를 수료한 그가 한국행을 선택한 것은 고종이 ‘육영공원’을 설립하면서 주한 미국공사 푸트에게 미국인 교사를 요청한 게 계기가 되었다. 육영공원은 1883년 보빙사(조선 최초로 미국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의 미국 방문이 일궈낸 결실이자 조선과 미국이 협력한 최초의 개화 사업으로 양반집 자제와 관리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 정부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이다.

헐버트는 다른 미국인 교사 조지 길모어, 달젤 벙커와 함께 1886년 7월 5일 23세의 나이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9월 23일 35명의 학생으로 개교한 육영공원에서 영어, 자연과학, 지리, 수학, 각국의 역사와 정치 등을 가르쳤다. 학생 중에는 훗날 영국에서 자결한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과 친일 매국노 이완용도 있었다.

헐버트의 젊은 시절 모습

 

헐버트는 학생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한글을 배우던 중 영어 발음을 표기하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한글에 매료되었다. 1888년 9월 미국에서 결혼하고 아내와 함께 돌아와서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끝에 1889년 ‘사민필지(士民必知)’ 제목의 교재를 완성했다. ‘사민필지’는 ‘양민과 평민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세계지리 교과서로 활용되었다. 헐버트는 ‘사민필지’를 161쪽의 대중용으로 다시 손질해 1891년 2,000부를 인쇄했다. 서문에는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훨씬 편리하지만 도리어 언문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깝다. 이에 특별히 언문으로 세계 각국 지리와 풍속을 기록하려 한다.’고 썼다. ‘사민필지’ 1장에서는 태양과 지구, 자연 현상의 원리, 인간의 출현과 이동 등을 설명하고, 2∼5장에서는 세계 5대륙과 각국의 지형과 기후, 산업과 교역, 정치제도와 군사, 인구와 민족, 종교와 교육 등을 소개했다. 교재는 상당한 반향과 인기를 끌어 한문본(1895)과 국한문 혼용본(1906)으로도 출판되어 일반인이 세계 역사와 지리를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06년 판에서는 ‘美國(미국)’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데 그전까지 미국을 표기할 때 관용적으로 사용하던 ‘미리견합중국(米利堅合衆國)’의 ‘米’자를 ‘美’자로 바꾸어 쓴 것이다.

1906년 발간한 ‘사민필지’ 국한문 혼용본 표지(왼쪽)와 속지

 

헐버트는 5년의 계약 기간이 끝나 1891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 있으면서도 영국인 올링거 부부가 1892년 1월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 ‘한국 소식(KOREAN REPOSITORY)’ 창간호(1892.1)에 한글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한 ‘한국의 알파벳’이라는 제목의 9쪽짜리 영문 논문을 발표해 한글의 독창성, 과학성, 간편성 등을 서양에 소개했다. ‘한국 소식’ 1892년 3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알파벳 2’ 제목의 논문에서는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다루고 1898년 2월호에서는 전문가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두’를 소개했다. ‘한국 소식’은 당시 한국의 모습을 서양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개화기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들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밝혀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헐버트는 1893년 10월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방한, 출판을 통한 선교 활동과 한국의 문화·역사 등에 관한 집필 활동에 집중했다. 출판을 통한 선교 활동은 미국에서 가져온 신식 인쇄기로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삼문출판사(트라이링규얼 프레스)에서 양서와 잡지들을 출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삼문출판사는 1891년 감리교가 배재학당 안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인쇄출판소로 올링거 목사가 운영하다가 1893년 8월 한국을 떠나면서 헐버트가 책임을 맡게 되었다. 삼문출판사는 주로 기독교 서적을 발간해 개신교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지만 영어 소설 ‘천로역정’ 제1부를 번역한 ‘텬로력뎡’을 출판(1895)하기도 했다. ‘텬로력뎡’은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소설 번역본으로 기록되었다. 삼문출판사는 또한 독립신문, 협성회보 등 우리나라 개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각종 신문도 인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 ‘한국 소식(KOREAN REPOSITORY)’지

 

조선의 문화 보존과 조선의 역사 저술에 평생을 매진

헐버트를 누구보다 반긴 이는 고종이었다. 고종은 육영공원 시절부터 한국어에 능통하고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은 헐버트를 신뢰했다. 헐버트는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때 민비를 잃어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고종을 위해 에이비슨,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와 함께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1895년 11월 일어난 ‘춘생문 사건’에도 관여해 고종의 신뢰에 부응했다. ‘춘생문 사건’은 친러·친미적인 정동파 인사들과 일부 서양인이 일본에 의해 경복궁에 갇혀 있는 고종을 궁 밖으로 빼내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헐버트는 1년 동안 발행하다가 정간한 ‘한국 소식’을 1895년 1월 아펜젤러 등과 함께 속간하고 1899년 폐간될 때까지 발행했다.

헐버트는 조선의 문화 보존에도 관심이 많았다. ‘한국 소식’지 1896년 2월호에 ‘한국의 소리 음악(코리안 보컬 뮤직)’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구전으로만 불려오던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보해 서양 음계를 붙인 ‘아리랑(문경아리랑)’ 악보를 실었다. 시조 ‘청산아’와 경기민요 ‘군밤타령’도 음계와 함께 논문에 소개했다. 그러면서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주식인 쌀과 같은 존재”, “한국인은 즉흥곡의 명수”라고 기술했다. 1907년에는 개성 부근 풍덕면에 있는 경천사 10층석탑을 일본이 약탈해간 것에 대해 국내외 언론을 통해 신랄하게 비난함으로써 국제 여론을 환기했다.

역사상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보해 서양 음계를 붙인 ‘아리랑(문경아리랑)’ 악보. ‘한국 소식’지 1896년 2월호에 실렸다.

 

헐버트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과 가깝게 지내며 1896년 4월 독립신문 창간을 도왔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만에 ‘독립신문’을 창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인쇄 시설과 관련 지식을 제공한 헐버트의 도움이 컸다. 영문판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사실상 편집인이나 다름없었다. 헐버트의 동생인 아처 헐버트도 1897년 방한해 1년간 머물며 독립신문 발행을 도왔다. 동생은 1902년 미국에서 ‘제주도의 여왕’이라는 한국 소재 소설을 썼고 한국에 관해 여러 차례 강연했다.

헐버트는 1897년 한성사범학교 교장, 1900년 개교한 관립중학교(경기고 전신) 교사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1901년 1월 월간 영문잡지 ‘한국 평론(The Korea Review)’을 창간했다. 잡지는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소개하고 전 세계 19개국에 배포함으로써 한국을 해외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1906년 12월 ‘한국 평론’이 정간될 때까지 120여 편에 달하는 한국 관련 논문과 한국의 역사적 사건에 관한 평론을 게재했다. 헐버트는 더 타임스(1903)와 AP통신(1903~1905) 객원 특파원으로도 활동하면서 한국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 창구 역할을 했다.

헐버트는 특히 한국의 역사 저술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사에 대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한국 평론’에 1901년부터 4년 동안 시리즈로 연재하고 1903년 한자로 쓴 역사책 ‘대동기년’을 중국 상해에서 출판했다. 이 책은 조선왕조를 기술한 최초의 역사서로 전 5권에 1,092쪽이나 되었다. 1905년에는 최초의 영문 역사서 ‘한국사’도 미국 뉴욕에서 출판했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 할 때 헐버트에게 주어진 임무는 고종의 밀사 역할이었다. 헐버트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905년 11월 17일 워싱턴에 도착했으나 미 국무성과 백악관이 고종의 친서를 거부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결국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인 11월 25일 국무장관 루트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했으나 이미 모든 노력이 무위로 끝난 뒤였다. 헐버트의 좌절과 허무는 극에 달해 가는 곳마다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며 모국을 맹비난했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 할 때 고종의 밀사 역할 수행

헐버트는 ‘한국 평론’ 연재물과 ‘한국사’를 재정리한 방대한 분량의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원고를 미국 출판사에 넘기고 1906년 6월 방한했다. 1906년 9월 뉴욕의 더블데이 출판사에서 출판된 ‘대한제국 멸망사’는 한국의 문화, 전통, 풍습 등에 대한 모든 것을 영문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책으로 외국인들이 조선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헐버트는 책 곳곳에서 자신의 모국인 미국을 거세게 비난했다. 을사조약 후 공사관을 가장 먼저 철수한 미국의 처신에 대해 “인사말도 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가장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고 미국을 맹비난했다.

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1906년 발간

 

1907년에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별개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파견되었다. 헐버트는 1907년 5월 8일 가족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 일본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랑스 파리를 거쳐 7월 10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하지만 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7월 10일 밤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부당성과 조선의 국권 회복에 대해 연설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알져져 고종이 퇴위하면서 헐버트는 한국에 오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했다.

호머 헐버트
고종이 헐버트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별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신임장(1906년 6월 22일)

 

헐버트는 1909년 8월 사재를 정리하기 위해 잠시 서울에 왔다가 귀국길에 고종으로부터 예상치 않은 부탁을 받았다. 1903년 상해의 독일계 은행인 덕화은행에 51만 마르크 상당의 금괴와 상당액의 일본 엔화를 예치했는데 이 내탕금을 찾아 미국 은행에 예치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헐버트가 덕화은행에 가보니 일제가 내탕금을 이미 찾아간 뒤였다. 그는 고종의 내탕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으나 결국에는 찾지 못했다.

헐버트는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한국을 잊지 않고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호소했다. 1915년 12월 8일자 뉴욕타임스에 ‘루스벨트와 한국’이라는 제목의 글과, 1916년 3월 5일자 뉴욕타임스에 ‘한국과 벨지움에서의 미국 정책’이란 제하의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기고문을 통해 10여 년 전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한 정책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밖에도 강연, 회의 참석 등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고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미 상원 외교위에 나가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간행하고 있던 ‘더 코리아 리뷰’지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활동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그를 초청했으나 아내가 병환 중이어서 한국에 올 수 없었다. 아내가 사망한 이듬해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그를 초청했다. 여행을 하기에는 몸이 노쇠했지만 헐버트는 흔쾌히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1949년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조선을 떠난 지 40년 만의 환국이었다.

1949년 7월 29일 국빈초청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한 헐버트

 

그러나 86세의 노인에게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한 달가량의 여행은 무리였다. 결국 장거리 여행으로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영면했다. 미국에서 출발 전 AP통신과 했던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합니다”라는 인터뷰는 결국 유언이 되어 8월 11일 외국인 최초로 사회장을 치른 뒤 유해는 서울 마포 한강변 양화진 외인묘지 한쪽, 1897년 서울에서 6세의 어린 나이로 숨진 아들의 묘역 옆에 묻혔다. 1950년 3월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이 추서되고 2013년 7월 외국인 최초로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서울 양화진 헐버트의 묘(출처 헐버트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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