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정율성 ‘중국인민해방군가’ 작곡

↑ 정율성 부부

 

정율성(1914~1976)은 ‘중국 3대 혁명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중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3억 명 이상이 정율성을 알고 있고 10억 명 이상이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한 1곡 이상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행사 때는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이대교, 작가 노신, 서안사변을 일으킨 장학량 등과 함께 ‘신 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 3대 혁명 음악가’의 한 사람

정율성은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정부은’이었다. 부친은 민족적 절개로 가득 찬 애국자 교사였고 큰형(정남근)은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둘째(정인제)와 셋째 형(정의은)은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독립투사였다. 누이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고 매형은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상해에서 김산·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열혈 투사였다. 정율성은 어릴 때부터 서양의 명곡 음반이 많고 유성기를 갖춘 외삼촌 집을 들락거리면서 음악적 소양을 키웠다. 둘째 형이 사준 만돌린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전북 전주의 신흥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아버지를 여의어 경제적으로 곤란해졌을 때 김원봉이 중국 본토에 설치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생을 모집하러 셋째 형이 국내에 잠입했다.

정율성은 1933년 5월 만돌린과 세계명곡음반을 짊어지고 셋째 형을 따라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1933년 9월 의열단 간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고 1934년 4월 졸업했다. 이후 남경에 거주하면서 항일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정율성 아내의 전기에 따르면 정율성은 전화국에 침투해 일본인 전화를 도청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지만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어느 날 의열단장 김원봉이 그의 음악적 자질을 발견하고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 덕에 1주일에 한 번씩 남경에서 상해까지 먼 길을 오가며 러시아 레닌그라드 음대 출신의 저명한 음악가 크리노와 교수에게서 성악, 작곡, 피아노 등을 배웠다. 자신감이 생긴 정율성은 자신의 삶을 아름답고 힘찬 선율을 이뤄 봉사하는 데 쓰리라 결심하고 원래 이름인 정부은 대신 ‘음율이 성취되다’라는 뜻의 정율성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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