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효순·미선 사건’… 추모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전국은 반미 열기로 넘쳐나

↑  심미선(왼쪽)과 신효순

 

주한 미군, 이성적인 ‘설명’보다 ‘사죄’가 앞서야 하는 한국 정서 이해하지 못해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에서 갓길을 걷고 있던 14살의 신효순·심미선 두 여중생이 가교 운반용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은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쯤이었다. 사고는 온 나라가 한일 월드컵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지방선거가 실시된 날에 일어나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미군의 조사 결과 발표도 의례적이었다. 미군은 사고 당일 미 8군 사령관 명의로 유감 성명을 발표하고 사고발생 6일 후인 6월 19일 “차량 구조상 운전병 오른쪽 시야에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관제병이 여중생들을 30m 전방에서 발견해 운전병에게 이를 알리려 했지만 소음이 심해 제때에 경고하지 못했다”면서 “결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 사고”라는 한미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미군 발표는 유가족의 주장은 물론 한국 경찰의 자체 조사 결과와도 배치되었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정서에서는 이성적인 ‘설명’보다 ‘사죄’가 앞서야 한다는 것을 미군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미 2사단 캠프 앞에서 ‘살인 만행 주한 미군 규탄대회’를 열고, 사망대책위원회는 미군 6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 고소했다. 파문이 확산할 조짐을 보이자 7월 4일 주한 미군 사령관이 “미군이 사고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며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취했다.

두 미군은 미 군사법에 따라 7월 5일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다. 우리 정부는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장갑차 탑승 미군에 대한 1차 재판권을 미군이 포기하도록 요청했다. 이는 공무수행(훈련) 중에 일어난 미군 범죄에 대한 형사재판권을 우리 측에 넘겨달라고 한 것으로, 1966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체결 후 요청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러나 미군이 SOFA 규정에 의거해 자신들이 재판권을 행사하겠다고 우리 정부에 통고함으로써 재판은 미군 영내에서 진행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 장갑차가 고의로 여중생들을 치어 여러 차례 밟고 지나갔다는 등의 온갖 루머가 숨진 여중생의 끔찍한 현장 사진과 함께 인터넷과 거리 전시회를 통해 빠르게 확산했다. 사태는 예측 불허로 치달았다. 11월 22일, 미 군사재판이 이 사건을 과실로 인정해 두 미군에게 무죄 평결을 내린 것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무죄 평결을 내리면 우리 검찰이 더 이상 항소할 수 없는 SOFA 규정에 따라 사법적 판단은 마무리되었고 두 병사는 서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해말 대통령선거 판세도 요동 쳐

미군은 원칙대로 처리했다고 항변했지만 정서상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감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했다. 결국 부시 대통령을 비롯 럼즈펠드 국방장관, 허버드 주한 미 대사,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 등까지 나서 유감을 표명하거나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SOFA 개정이 목표였던 시위대에게 부시 대통령의 사과는 성이 차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효순·미선 양을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전국은 반미 열기로 넘쳐났다.

조직적인 반미 촛불집회는 2002년 11월 26일 서울 종로 YMCA회관 앞에서 100여 명의 SOFA 개정론자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 개선’, ‘미군 사과’ 등을 요구하면서 점화되었다. 한 네티즌의 제안에 따라 11월 30일 집회 장소가 미 대사관 옆 광화문 사거리로 옮겨지면서 그곳은 연일 주한 미군의 성토장이 되었다. 열기는 뜨거웠다. 그해 6월 월드컵 4강 신화가 달성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주었던 폭발적인 에너지가 다시 분출하는 듯했다. 오후 6시가 되면 촛불을 든 학생․회사원들이 매일 광장을 메웠고 주말이면 수만 명의 촛불이 광장을 수놓았다. 1년 동안 계속된 촛불집회에는 연인원 500만 명이 참가했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삭발 투쟁을 벌였고 윤도현 밴드, 안치환, 권진원, 이적, 이은미, 싸이 등 유명 가수들은 거리 공연을 주도했다. 가수 신해철은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을 통해 두 여중생의 죽음을 널리 알렸다. 심지어 북한의 7세 신동 작곡가는 여중생을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고 평양의 한 중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진보 세력이 효순·미선 양을 그해 12월 19일 치러진 제16대 대통령선거에 적극 활용하면서 대선 판세도 요동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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